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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두려움과 문재인의 두려움

문재인 대통령이 6월18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6월18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huffpost

6월 13일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끝난 지 닷새 뒤 6월 18일 열린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받았던 높은 지지는 한편으로는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냥 우리 어깨가 많이 무거워졌다는 정도의 두려움이 아니라 정말 등골이 서늘해지는, 저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그런 정도의 두려움이라 생각합니다. 지지가 높았다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뜻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더 잘하라는 주마가편 같은 그런 채찍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지지에 대해서 답하지 못하면, 그리고 높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기대는 금세 실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의 골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정치사를 보더라도 앞에 선거에서의 승리가 그다음 선거에서는 아주 냉엄한 심판으로 그렇게 돌아왔던 그런 경험들을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례들 많이 있죠.

그래서 오늘 정말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지난번 선거 결과에 대해서 한편으로 기뻐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무거운 이 두려운 마음을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다라는 특별한 부탁 말씀을 좀 드립니다.”

‘두렵다’는 “어떤 대상을 무서워하여 마음이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두렵다는 발언은 “지역주의와 색깔론을 끝냈다”는 말에 파묻혀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 저도 민심 앞에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넘겼습니다.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를 다시 읽었습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서전을 쓴 일이 없습니다. 2010년 서거 1주기를 앞두고 노무현 재단이 엮고 유시민 전 장관이 정리한 <운명이다>라는 제목의 노무현 자서전이 출판됐습니다. 노무현 재단 상임이사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서문을 썼습니다.

자서전은 2004년 대통령 탄핵소추 뒤 청와대 관저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그 날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 관저 앞마당에서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관저 마당 왼쪽 나무 계단을 밟고 뒷산으로 올라가면 등산로 진입로에 조그만 탁자를 놓은 작은 쉼터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데크라고 불렀다.

이 쉼터에 올라가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부근까지 불빛이 보인다. 그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무어라고 소리치는지는 알 수 없다. 멀리서 사람들이 외치는 함성이 아련히 들릴 뿐이다.

관저 안에서는 유리가 두꺼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용암처럼 일렁거리던 촛불 바다는 텔레비전 뉴스로만 보았다. 쉼터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아내는 우리 편이 저렇게 많이 왔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겁이 났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밤마다 촛불을 들고 와서 나를 탄핵에서 구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내게 무엇을 요구할까?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촛불 시민들의 함성에 실려 왔다.”

책을 읽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두려움은 고스란히 현실이 됐기 때문입니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지만, 그 이후 재보선에서 연전연패했고 200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일패도지’(一敗塗地)로 무너지고 정권을 넘겨줬습니다.

2004년 탄핵 기간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모습.
2004년 탄핵 기간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모습.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제공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두려움이라는 표현을 문재인 대통령이 똑같이 사용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진 두려움의 정체를 알고 싶었습니다. 선거 기록을 찾았습니다.

2004년 4·15 총선 결과는 열린우리 152, 한나라 121, 민노 10, 민주 9, 자민련 4, 국민통합 21 1, 무소속 2였습니다.

그러나 51일 뒤에 치러진 2004년 6월 5일 재보궐선거에서 놀라운 반전이 나타났습니다.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 야당인 한나라당이 부산시장(허남식), 경남지사(김태호), 제주지사(김태환)를 차지했습니다. 또 다른 야당인 새천년민주당은 전남지사(박준영)를 차지했습니다. 집권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전패했습니다.

기초단체장은 한나라 13, 열린우리 3, 민주당 1, 무소속 2, 광역의원은 한나라 28, 열린우리 6, 민주 2, 민노 1, 자민련 1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열린우리당의 참패였던 것입니다.

4월 15일 총선 이후 6월 5일 재보선까지는 겨우 51일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국회 의석 과반을 확보한 것은 열린우리당의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소추한 한나라당을 국민이 심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집권 세력은 오만하고 무능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총선 이후 정동영-김근태 입각을 둘러싸고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국민에게는 차기 대선주자들의 싸움으로 비쳤습니다. 열린우리당은 영남 지역 패배를 만회하겠다며 6·5 재보선에서 영남에 몰두했습니다. 호남과 제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경제난에 따른 위기론을 정부는 기득권 세력의 음모라고 반박했습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둘러싼 정책 혼란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투표율이 낮은 재보선의 특성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거의 정치적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한 견제였습니다.

6·5 재보선 패배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재보선에서 연전연패로 노무현 정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반면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했습니다.

- 2004년 10·30 재보선

기초단체장 : 한나라 2, 민주 2, 열린우리 1
광역의원 : 한나라 5, 민주 1, 무소속 1

- 2005년 4·30 재보선

국회의원 : 한나라 5(신상진 고조흥 이진구 정희수 김정권), 무소속 1(정진석)
기초단체장 : 한나라 5, 민주 1, 무소속 1
광역의원 : 한나라 8, 민주 1, 무소속 1

- 2005년 10·26 재보선
국회의원 : 한나라 4(유승민 윤두환 임해규 정진섭)

2005년 4·30 재보선으로 국회 지형은 여대야소에서 여소야대로 바뀌었습니다. 여당 참패의 정점은 2006년 5·31지방선거였습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유세 도중 얼굴을 칼을 맞고 입원했던 그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광역단체장 16개 가운데 12개를 쓸어 담았습니다. 민주당은 광주시장, 전남지사를 챙겼고, 열린우리당이 이긴 곳은 전북지사 한 곳이었습니다. 기초단체장 선거 결과도 한나라 155, 민주 20, 열린우리 19, 국민중심 7, 무소속 29였습니다. 서울의 25개 구청장을 모두 한나라당이 이겼습니다. 열린우리당의 악몽은 그 뒤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2006년 7·26 재보선
국회의원 : 한나라 3(맹형규 차명진 이주영), 민주 1(조순형)

2006년 10·25 재보선
국회의원 : 한나라 1(이원복), 민주 1(채일병)
기초단체장 : 한나라 1, 무소속 4

2007년 4·25 재보선
국회의원 : 한나라 1(고희선), 민주(김홍업), 국민중심(심대평)
기초단체장 : 한나라 1, 무소속 5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무려 500만표 차이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재보궐선거의 결과입니다.

기초단체장 : 한나라 4, 대통합 3, 국민중심 1, 무소속 5

광역의원 : 한나라 7, 대통합 4, 무소속 1

기초의원 : 한나라 20, 대통합 2, 무소속 3

대통합민주신당 당선자는 거의 다 호남에서 나왔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이합집산을 통해 대통합민주신당이 탄생한 데다 정동영 후보가 호남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호남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2004년 총선으로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까지 장악했던 노무현 정부는 2년 반 만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본래 이상주의자입니다. 자서전 <운명이다>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대의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정당정치이다. 개인이 아니라 정당이 집권한다. 당연히 정당도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민주적 정당에 필요한 것은 대통령을 겸한 제왕적 총재가 아니라 분권적, 수평적, 개방적 리더십이다. 이것이 내 지론이었다. 당 총재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총재직을 떠나게 하고, 당선되어도 총재를 겸임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뒤 실제로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력 분점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이 관심이 많았습니다. 취임 뒤 2003년 4월 2일 국회 연설에서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한다면 17대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게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정가에서는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 낭만적이고 이상주의적이었던 것 같다. 동거 정부로 권력을 분점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문제를 검토하면서 나를 지지했던 국민과 정치인들이 이것을 이해하고 용인해 줄지 여부를 깊이 살피지 않았다.”

이상주의자가 현실을 넘어서지 못하고 좌절하는 장면은 계속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8월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역시 아무런 반향을 얻지 못했습니다.

“대연정 제안은 완전히 실패한 전략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했던 열린우리당과의 관계가 더 심하게 뒤틀렸고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까지 흔들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여당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을 깨자고 하는 데까지 갔다. 결국 대연정 제안이 이런 행동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니 실로 뼈아픈 실책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청분리(당정분리) 실패와 권력분점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 실패를 문재인 대통령은 반면교사로 삼은 것 같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전부터 ‘민주당 정부’를 제안했고 당선 뒤 많은 민주당 사람들을 청와대와 행정부에 포진시켰습니다. 중요한 정책 결정은 당정회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연립정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선거제도 개편에도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다음 재보궐 선거는 2019년 4월 3일입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재보선이 1년에 두 차례였지만 2015년 선거법 개정으로 지금은 1년에 한 차례로 줄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서는 선거를 통해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위기가 그만큼 줄어든 셈입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와 달리 6·13 지방선거 압승을 정치적 성공으로 이어갈 수 있다고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정권은 대통령 혼자 끌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8월 25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문재인 후보들이 난립하는 모습에서 2004년 총선 직후 차기 대선주자들이 장관직을 둘러싸고 벌였던 신경전이 떠오릅니다. 김동연 경제 부총리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갈등이 2004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노무현 정부 당정갈등의 데자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유능함, 도덕성, 겸손한 태도를 당부했습니다. 청와대 참모들뿐만 아니라 문재인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도 깊이 새겨야 할 덕목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두려움도 물론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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