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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 한 정신질환자 퀴어의 이야기

ⓒwhiteson via Getty Images
ⓒhuffpost

첫 번째. 내가 정신질환을 처음 진단받게 된 계기는 8년 전 학교폭력을 당하던 스트레스로 이상증세가 발현되자, 어머니가 병원에 이끌고 간 것이었다. 여러 검사를 받고 나서, 나에게 주어진 병명은 양극성 장애. 그 이후로 몇 번의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나는 내 병을 일종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두 번째. 한 친구가 있었다. 항상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나는 (그 당시에는 *젠더퀴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나를 좋아해주는 그 친구와 항상 같이 다녔고, 얼마 후 그 친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 전에도 남성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 스스로를 바이섹슈얼 (팬으로 정체화하지 않은 것은 나에게 *젠더블라인드가 없기 때문이다.) 로 정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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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접한 건 아주 어릴 적 책에서였다. 그때 나는 때때로 남성으로 느끼지만 나 자신을 완전히 남자라고 느끼지는 않기에 나는 트랜스젠더가 아닌가 보다 하고 그 책과 의심을 덮었다. 그 이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트위터에서 한창 젠더퀴어 관련 담론이 들어와서 시끌벅적해졌던 때였다. 나는 웃기게도 노래방에 가서, 소위 ‘남자’ 키로 노래를 낮춰불렀는데, 그때 *디스포리아를 느껴서 내가 시스젠더가 아닌 것 같다는 것을 느꼈고, 많은 고민 끝에 나는 젠더퀴어로, *바이젠더로 정체화하게 되었다.

디스포리아 : 자신의 젠더 정체성이 지정 성별과 다르기 때문에 오는 위화감이나, 자신의 1차·2차 성징이나 특정 신체 부위에 대한 위화감 혹은 자신의 젠더 또는 외모에 대한 타인의 인식 및 그에 따른 인간관계에서 오는 위화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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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로 다른 세 이야기를 나는 엮으려고 한다. 동떨어진 것 같은 세 일화는 모두 내가 소수자임을 자각한 일화이고, 내가 내 삶을 투쟁이라고 정의 내리게 된, 세가지 정체화이다. 하나는 정신 질환자로서의 투쟁, 다른 하나는 성소수자로서의 투쟁.

투쟁이란 뭘까? 꼭 소위 말하는 ‘사회 운동’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 투쟁이란 어떤 형식으로든 사회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사회의 혐오에 그것이 틀렸다고 이야기 하면서, 남에게 영향을 주는 일. 그것이 투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삶은 투쟁이다. 나는 사회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정신질환자로서의 투쟁은 죽음과 싸우면서 동시에 사회와도 싸워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정신질환은 끊임없이 나를 몰아세운다. 약을 먹어도 심한 날은 자살사고가 오며, 나는 스트레스를 조금만 받으면 비질환자보다 과잉반응을 보이고, 조증삽화가 오면 주위와 눈치를 살피지 못하는 과잉행동을 일으키고, 우울삽화가 오면 침대 밖으로 나가기 조차 힘들어진다.

물론 사회는 정신질환자에 대해 무지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으며, 내가 보이는 행동을 항상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내 행동과 성과에 대해 내가 달고 있는 정신질환이라는 짐 덩어리를 고려하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는 한다. 나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정신질환과 싸우면서, 나를 멋대로 재단하고 폭력적인 평가를 휘두르는 사회와,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하는 사회와 동시에 싸워야 한다. 나는 이 싸움, 내 숭고한 투쟁을 한시라도 멈추면 살아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남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투쟁이라고 생각하는 바, 나는 내 기록을 남김으로서 정신질환자로서 다른 정신질환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어떤 형식이라도 좋다. 트위터의 아주 작은 글 조각이어도 좋다. 내가 어떤 식으로 병을 이겨내고 있는지, 내가 어떤 식으로 사회와 맞서 싸우고,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 그것에 어떻게 내가 싸우고 있는지를 알리는 것이 나의 작은 사명이다. 내가 예전에 어떤 양극성장애 환자의 글을 보고 내 병을 가지고도 오랫동안 생존하며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기에, 나는 그를 본받고자 끊임없이 기록을 남긴다.

성소수자로서의 투쟁 또한 만만치 않은 투쟁이다. 나는 수많은 혐오자의 언행에 시달린다. 학교에서나마 오픈리 바이섹슈얼, 오픈리 트랜스젠더로 살면서도, 늘 직간접적인 혐오적인 언행에 시달리며, 집에서는 부모에게 만약 네가 성소수자라면 부모의 지원을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폭력적이고 혐오적인 언사에 시달린다. 사회에서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수술에 보험을 인정해주지 않으며, 그에 대한 기술 또한 아주 미비하다. 또한 나는 내 사랑하는 파트너와 결혼조차 불가능하다. 나와 그의 법정성별은 모두 여성이므로. 언제나 스스로가 무엇인지 숨기고 살며, 만약 들킨다면 린치로 인한 죽음에 까지 몰릴 수 있다는 점이 나를 힘들게 한다.

국가가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고, 나의 삶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서나마 오픈리 성소수자로 살며, 정책을 바꾸려는 시위에 참여하거나 청원에 서명하며 사회에 대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성소수자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성소수자로 정체화하면서 받은 혐오와 멸시가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했으리라. 나는 정신질환 진단이 성소수자 정체화보다 빨랐던 사람이기도 하고, 호르몬 요법이나 성별 정정을 염두에 두고 있진 않기에 둘의 교차적 억압에는 약간 자유롭다는 느낌이 있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끊임없이 사회에 의해 ‘정신병자’ 라는 소리를 듣고, 교정 받아야 할 존재라는 딱지가 붙고는 한다. 이러한 혐오는 정신질환자와 성소수자 양쪽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정신질환자를 혐오하는 ‘정신병자’ 단어의 사용 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자는 마치 공공연하게 차별받고 멸시받아도 될 그런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가 ‘정상인(비성소수자)’로 교정받아야 한다는 시각 자체가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의 혐오적 언행이다. 이런 말을 듣는 정신질환 보유 성소수자는 어떤 마음이겠는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을 볼 때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두려움은 정말 큰 억압으로 작용한다.

위에 써놓았듯이, 사회는 정신질환자를, 그리고 성소수자를 끊임없이 혐오하고 배척한다. 그 혐오에 맞서 나는 목소리를 내며 투쟁한다. 두 투쟁에 다른 점이 있다면, 정신질환자로서의 투쟁은 나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내 성정체성, 지향성이 자랑스럽고, 나를 괴롭히는 것은 오로지 타인과 사회와 국가의 억압과 혐오이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많이 다르다. 이것은 나를 실제적으로 불편함을 주고, 심지어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나는 글을 잘 읽기 위해, 대화 사이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더 크게는 내 삶을 보전하기 위해, 이 병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도록 스스로와 싸운다.

오늘도 나는 여러 혐오와 병에 맞서며 살고 있다. 나는 싸우고 맞서지 않으면 스스로로 살 수 없으며, 생존할 수 조차 없다. 그렇기에 내 삶은 투쟁이다. 나는 내 병이, 내 지향성이, 내 정체성이 인정받는 사회를 위해 싸운다. 내 투쟁이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줘 세상을 바꾸고, 내가, 더 나아가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리라 믿고 있다. 내 삶은 나를 억압하는 권력을 해체하기 위한, 그리고 행복을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 이 삶이 이어져, 내 투쟁이 성공해 나와 같은 길을 걸을 많은 이들에게, 약자와 소수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글 · 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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