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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의 가능성

ⓒnantonov via Getty Images
ⓒhuffpost

“이혼이 세번 있네. 남편을 치겠어. 성질 좀 죽여야겠다.”

9년 전 우연히 들른 사주카페에서 사주명리 상담사에게 들은 이야기다. 당시에도 결혼할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 내가 그런 팔자인가 고민했다. 이성애 결혼이 인생과업으로 취급되는 세상에서 이혼은 불행이라고 믿는 사람의 해석이었다는 걸 지금은 안다.

최근에는 한 사주명리학자를 만났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명리학에 대한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러 갔던 자리다. “남자 같은 팔자네. 그래도 여자는 두부랑 달걀 같은 거예요. 연약해서 남자가 잘해줘야 돼.” 타인의 속마음과 미래도 보(본다고 자부하)는 운명학자가 남자/여자 이분법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하는 게 우습고 슬프다.

온라인에서 사람들의 사주팔자 상담을 하고 있다. 상담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여자에 대한 편견 가득한 팔자 풀이와 무례한 말들에 위축된 경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상담사가 그렇지만 운명을 상담하는 사람은 특히 강력한 권력이 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말을 뱉어야 하는데, 운명을 다루는 많은 사람들이 기존 세계의 고정관념과 인식틀을 가지고 타인의 삶을 너무 쉽게 해석한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좁은 식견에 가두고 자기 인식의 한계를 타인의 삶의 한계라고 착각하는 거다.

모든 언어가 그렇듯 운명학에도 소외된 존재가 있고, 모든 해석이 그렇듯 운명학도 풀이 투쟁이다. 다양한 성정체성과 관계지향, 이성애 일대일 독점 연애와 결혼·출산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 등 정상기준을 따르지 않는, 따르지 못한 사람들의 언어가 그렇다. 소외된 사람들은 답답해서 직접 운명학을 공부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내 팔자를 풀이하면서 9년 전 그 상담사가 내 팔자에 있는 ‘상관’ 세 글자를 보고 이혼수라고 표현했던 거라는 걸 알게 됐다. 상관이란 사주명리에서 기존 질서와 조직, (여성에게는 흔히 남편운이라고 해석되는) ‘관’을 치는 기운을 의미한다. 이런 관을 치는 상관이 남자에게 있으면 언어표현 능력, 여자에게 상관은 남편을 치는 기운을 의미했다. 여자에게 상관이 있어서 집안이 망했다거나, 아내의 상관 때문에 남편 기운이 쇠약해졌다고 해석했던 거다. 현대사회에서 상관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기존질서를 전복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창조성을 의미한다(물론 성역할 규범으로 팔자를 해석하는 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느낀다. 현대사회에서도 여성이 결혼을 하면 다른 사회적 역할은 거의 중단된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이 바뀔 수 있냐고 질문한다. 운명, 흔히 팔자라고 하는 게 정말 정해진 걸까. 사주명리는 기호라서 무한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운명의 여덟 글자(팔자)는 바뀌진 않지만 무한한 변주곡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사주팔자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는 그 자신의 의지(낮은 비율), 그를 둘러싼 편견과 고정관념을 생산하는 교육과 일상적 상호작용(아주 높은 비율)의 영향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하게도 세상이 나아져야 운명도 나아지는 거다.

운명학은 개개인의 삶을 신화로 만드는 미신이 아니라 고정된 언어를 해체하고 삶을 다르게 해석해 보자는 실천에 가깝다. 고정된 관념을 자꾸 버려야 하는 이유는 삶의 무한성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서다.

운명은 하나의 좁은 직선의 길이 아니다. 뻔한 관념은 있어도 뻔한 인생은 없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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