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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인생은 파리인생

ⓒhuffpost

어릴 적부터 운동이 좋았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늘 주전으로 뛰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일요일. 동네에서 놀다 발목을 삐었다. 문을 연 병원이 없었다. 부친은 그를 동네 유도장에 데려갔고, 관장에게 응급조치를 받았다. 그 인연으로 유도를 배워 3단까지 땄다. 수영 특기생으로 대학 체육학과에 입학했고, 주종목을 스키로 바꿔 캐나다스키강사협회(CSIA) 자격증도 땄다. 해군으로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운동 강사보다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고 싶었다. 2010년 초 신축공사를 마친 신한생명 천안연수원에서 보안요원을 뽑았다. 제복을 입고 연수원의 질서와 보안을 유지하는 일. 그는 입사원서와 여러 자격증을 냈고, 다음날 출근하라는 합격 통보를 받았다.

연 4080시간 살인적 노동으로 생긴 물혹

그를 채용한 회사는 신한서브로 인력 제공과 시설물 관리 용역업을 했다. 신한은행 퇴직자들이 만들었고, 전국적으로 1735명이 일했다. 그런데 그의 면접관은 신한생명 이아무개 본부장이었다. 업무를 지시·감독·관리하는 이는 신한서브가 아니라 연수원에서 일하는 신한생명 직원이었다. 계열사와 비슷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2011년 여름 신한생명 하반기 전략회의가 밤 12시에 끝났다. 보안요원 동료가 새벽 3시까지 정문 근무를 하고, 그는 휴식을 취한 뒤 교대하도록 돼 있었다. 연수원 운영사무실 송아무개 팀장은 연수원 로비에서 밤을 새우라고 했다. 서아무개 사장이 새벽 5시에 산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밤새 로비를 지켰고, 새벽 5시 사장에게 인사드려야 했다.

임직원 행사가 연 15회 이상 열렸다. 인원이 많으면 비번임에도 출근 명령이 떨어졌다. 행사는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신한생명 직원은 보안요원에게 사장을 숙소까지 모시라고 지시했다. 행사장에서 불과 30m 떨어진 거리였다. 새벽까지 술 먹고 난장판이 된 식당의 음식물을 버리고 책상을 나르고 청소해야 했다. 만취한 직원이 엘리베이터에 쏟아놓은 배설물도 치웠다. 신한생명은 생수 수백 병을 나르고, 교육생에게 이불과 수건을 가져다주고, 연수복 350벌을 정리해 온수에 담그는 일까지 보안요원에게 시켰다.

그와 동료들은 월평균 340시간 일했다. 연평균 4080시간으로 세계 2위를 달리는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2052시간)의 두 배였다. 무쇠라도 버티기 어려운 장시간 노동, 만능 스포츠맨의 몸에 이상이 왔다. 쉴 새 없이 식탁과 의자를 나르던 어느 날, 손목에 물혹이 생겼다. 그는 신한서브 윤아무개 반장에게 산업재해를 신청했지만 안 된다고 했다. 겨울철 제설 작업을 위해 염화칼슘 300포대 이상을 옮기다 양쪽 손목 모두 물혹이 생겼다. 그는 개인 돈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불법파견 진정 내자 회유와 협박 맞서

매년 7월 연수원에서 신한생명 임직원 여름 가족캠프가 열린다. 총무부 직원과 연수원 운영팀은 보안요원들을 캠프 도우미로 부렸다. 정규직과 가족들에게 사은품을 전달하고, 영화 관람을 준비해야 했다. 컵과일과 추로스(막대 모양의 밀가루 반죽을 튀긴 것)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입소가 늦어지면 총무부 직원들은 숙소로 자러 가고, 보안요원들이 방 열쇠를 전달하고 인원을 체크해야 했다.

2013년 여름 신한생명 연수원장이 금붕어를 키운다며 연못 청소를 하라고 했다. 어느 날 식당에서 크루아상 빵이 많아 근무자들을 위해 남겨놓았다. 원장은 빵을 전부 금붕어 밥으로 주었다. 겨울철엔 금붕어가 얼어 죽는다고 보안요원들이 금붕어 수백 마리를 대야로 옮겨 호수에 풀어줬다. “우리는 연수원장에게 금붕어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냐며 동료들과 푸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2016년 초였다. 신한생명 연수원 보안담당 최아무개 차장은 매주 금요일 퇴근 시간에 KTX 천안아산역까지, 매주 월요일 아침 7시 천안아산역에서 연수원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6개월 동안 그와 동료가 교대로 정규직의 운전사가 되어야 했다.

다른 기관의 보안요원을 만났다. 왜 보안 업무가 아닌 일을 하느냐고 했다. 한 동료가 노동법을 찾아봤다. 보안팀과 시설팀 동료 9명이 모였다. 자료를 모아 노무사를 찾아갔다. 받지 못한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이 월 200만원이 넘었다. 2017년 7월 고용노동부 천안지청에 9명의 3년치 체불임금 5억원을 받아달라는 진정을 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①신한생명이 채용 절차에 참여했고 ②신한생명 한아무개 팀장이 작업 배치와 변경 결정권을 행사했고 ③신한생명이 당직 등 근태관리권과 징계권을 가졌으며 ④신한생명이 모든 작업 지시를 했고 ⑤신한생명이 평가와 교육까지 했기 때문에 파견법에 따라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신한서브가 아니라 신한생명 직원으로 직접 고용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동료들은 고용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냈다.

그런데 고용노동부 천안지청 서동윤 근로감독관이 3차례 조사하더니 4개월 뒤 타지로 발령 났고, 전종포 감독관이 추가로 2차례 조사하더니 한 달 만에 세종시로 갔다. 세 번째 온 윤희상 감독관은 “최대한 빨리 결론을 내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6개월이 지나갔다. 고소 취하 조건으로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업체가 바뀌어도 고용을 승계하고, 합의금을 주겠다는 회유가 들어왔다. 신한생명이 신한서브와 도급계약을 해지하겠다는 협박도 들려왔다. 그와 동료들은 불법파견을 인정받아 신한생명 정규직의 노비로 살아야 했던 지난 세월의 한을 풀고 싶어 회유를 거부했다. 그는 직장갑질119를 찾았다.

직장갑질119에 들어온 파견법 위반 제보는 산업과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 법을 만드는 국회 방송에서 파견노동자를 6년 넘게 쓰고, 공기업에서 직업상담사를 파견직으로 고용해 2년이 지나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파견직으로 하루만 일해봤으면

7월1일은 파견법이 시행된 지 만 20년 되는 날이다. 외환위기를 맞은 1998년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노동유연화 요청으로 정리해고제와 파견법을 통과시켰다. 해고된 일자리는 파견, 하청, 용역으로 채워졌다. 반월·시화공단을 비롯해 전국 국가공업단지에는 파견법을 악용한 3개월·6개월짜리 초단기 파견직이 넘쳐난다. ‘파견인생’은 ‘파리인생’이 됐다. 외환위기는 3년 만에 극복했는데 악법은 20년 동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노조가 없는 사업장의 도급·하청·용역 노동자는 상당수가 파견노동자임에도 본인이 파견직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일한다는 점이다. 사용자들이 도급·하청·용역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파견노동을 광범위하게 쓰는데, 정부는 어떤 감독과 규제도 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참여정부 시기에 민생 문제, 비정규직, 양극화 문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뼈아픈 부분”이라며 “비정규직 사용 사유를 제한하지 않았고, 불법파견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문재인 정부 1년이 지났지만 파견노동은 요동조차 없다. 오늘도 안산역, 시화역에선 “일하러 가실래요?”라며 ‘사람장사’를 하는 파견업체가 판친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벽에 안산역에 나가봤으면 좋겠다. 반월공단 파견노동자로 딱 하루만 일해봤으면 좋겠다. (직장갑질 제보 gabjil119@gmail.com)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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