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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7월 05일 11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7월 05일 12시 01분 KST

껍데기는 가라

AlexandrBognat via Getty Images
huffpost

얼마 전 이야기다. 친구 집에 들렸다가 우연히 한 TV 프로그램을 몰아서 볼 기회가 생겼다. 프로그램 이름은 Mnet의 <고등래퍼2>. 만 19세가 되지 않는 출연진이 자신의 고민과 랩에 대한 열정,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놀라운 창작열로 승화시켰던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평소 유튜브와 네이버에서 짤막한 영상만 쏙쏙 골라보던 터라 간만에 겪는 연속 상영의 그윽한 맛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화는 한 팀에 4명씩 총 네 팀을 결성하고 멘토를 정한 후 처음으로 팀별 대항전을 하는 대목이었다. 주제는 ‘교과서 랩’. 말 그대로 교과서에 나온 문학 작품을 소재로 두 사람이 짝을 이뤄 랩을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 중 조원우와 김근수가 고른 작품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였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것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0년대 사회 참여에 앞장선 신동엽 시인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는 1967년 발표되어 이젠 고전의 반열에 든 명시다. 50여 년 전 쓰인 시인데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명징한 메시지가 마치 스님이 절에서 사용하는 죽비 소리처럼 증폭되어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그동안 내게 소중한 알곡들을 제대로 차곡차곡 쌓았는지, 혹여 껍데기만 추종한 것은 아닌지 자기 반성의 시간이 엄습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회사를 나와서 마련한 개인 명함이 떠올랐다.

나는 개인적으로 활동할 때면 가장 먼저 명함을 준비한다. 회사에 속하지 않은 개인에게 명함은 그 의미가 묵직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기본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방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척 작은 부분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명함의 규격부터 들어가는 정보의 종류, 그 위계와 각종 시각 요소, 그리고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까지 이 조그마한 네모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생각을 표출하고 무척이나 조심스레 접근하게 된다. 명함에는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도 턱없이 모자라는 용량 때문에 덜어내고 또 덜어내 꼭 필요한 것만 들어가면서 그 사람의 취향까지 숨겨놓을 수 있다. 껍데기라는 단어가 들어갈 틈이 없다. 알곡만 넣기도 힘든 게 바로 명함이다. 즉 내게는 명함이야말로 알맹이인 셈이다.

하지만 보통 명함은 사소한 그래픽 물로 간주되기 쉽다. 포스터처럼 물리적인 절대 크기가 확보된 것이 아니라서 다양한 시각 요소를 넣기가 쉽지 않다. 들어가는 정보 또한 개인적이고 한정적이라 특정한 메시지를 담기도 애매하다. 인쇄 매체에 최적화된 물성 덕분에 (터치 디스플레이를 사용하지 않으니!) 정보적인 측면에서 여러 겹의 레이어가 형성되지 않고 UX도 단층적이다. 그래서인지 명함은 그래픽 아이덴티티를 구축할 때 추가적으로 생산하는 애플리케이션의 하나로 치부되며 매우 가볍게 디자인되는 경향이 있다. 그 저변에는 이런 속마음이 깔려있는 것 같다. ‘명함이란 이름과 소속, 연락처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매개체다. 그 본질은 정보의 교환이므로 명함 디자인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겉치레에 집착하는 행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명함은 껍데기다. 시각적으로 손을 댈수록 허무함이 몰려오는 쭉정이다. 

각종 박과 엠보싱, 다양한 컬러와 디자인 요소로 이루어진 명함을 접할 때면 사람들은 명함 하나에 너무 ‘오바’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그들에게 있어 이런 명함은 정보 전달을 방해할 정도로 과도하게 디자인된 흉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영리한 PR 기법일 수도 있다. 천편일률적이고 재미없는 명함 뭉치 속에서 그만큼 존재감을 발휘하고 한 번이라도 더 눈길을 끌며 기억력까지 높이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시선이 공존하는 명함 만들기에서 과연 디자이너는 어느 부분에 집중해야 하는 것일까.

명함은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고 디자이너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어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다. 대량으로 생산되어 가격까지 저렴하다. 누구나 명함 하나는 가질 수 있어 민주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정보 때문에 글자를 지닐 수 밖에 없는 터라 타이포그래피의 개념이 뒤따라간다. 그래픽 디자인이 발현된 가장 일상적인 대상물로 명함을 꼽는 이유다. 브랜딩과 포스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명함은 생기 넘치는 시각 요소가 정중동의 상태에서 캡쳐된 결과다. 괴테가 말했던가.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명함 하나에 커다란 미학적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겠지만 그래픽 디자인을 즐기는 입장에서 명함이 주는 ‘시간이 멈춘’ 느낌은 매우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적절한 콘셉트와 섬세한 타이포그래피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콘셉트와 타이포그래피라니, 너무 당연한 걸 말하는 거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당연한 행위가 발현된 명함 디자인의 예가 과연 얼마나 있던가 한 번 생각해보자. 기업 명함의 경우 그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기업 아이덴티티(이하 ‘로고’라고 하자)가 앞면에 떡 하니 박히고 뒷면에는 각종 정보들을 왼쪽 정렬, 혹은 오른쪽 정렬로 밀어버린 이 뻔한 디자인이 얼마나 흔한지 차마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조금 낫다고 하는 수준이 바로 로고에 쓰인 색을 이용해 팔레트로 만드는 방법이나 로고에서 기하학적 모티프를 따와 평면에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로고를 만들고 애플리케이션으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명함 디자인이 이정도만 나와도 꽤나 신경 쓴 거다. 그런데 이런 기업 명함에서는 개인의 영역이 존재할 수 없다. 기업의 부속물로 월급 받으며 일하는 회사원의 처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게 바로 이런 기업 명함 디자인이다. 몇 만에서 몇 십만이 일하는 글로벌 기업이라도 개인의 역할은 모두 다르다. 임직원이 100명 이하의 중소 기업이나, 단 몇 명이 의기투합해 뭉친 스타트업 기업처럼 가장 개인화된 집단은 더욱 더 그렇다. 하지만 이런 곳의 명함에서조차 그 이름이 박힌 개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꽤나 문제 아닐까. 어떤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는 명함이 정작 해당인을 대변하지 못한다면 이게 바로 쭉정이다. 알맹이처럼 번듯한, 쭉정이다.

개인 명함은 다행히 상황이 좀 낫다. 일단 콘셉트의 방향이 사람에게 맞춰져 있는 경우가 잦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수도 없이 많지만!)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콘셉트는 있는데 시각적인 발현이 엉망이라는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 심각한 부분은 타이포그래피다. 타이포그래피는 명함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명함이 지닌 정보적 속성, 즉 주요 기능이 타이포그래피의 대상물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기초 도형부터 그림, 일러스트, 다양한 색채, 각종 후가공이 존재하는 명함에서 우리가 가장 집중하는 것은 톤앤매너가 아니라 명함에 박힌 글자다. 이름, 소속,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등 오직 문자만이 정보를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사각형 세계에서 타이포그래피는 무궁무진한 힘을 발휘한다.

타이포그래피는 뿌리 깊은 나무와도 같다. 그 근원이 깊고 단단할 수록 가지는 울창하며 잎은 푸르고 그 열매는 풍요롭다. 적당한 서체와 크기를 선택하고 공간으로 정보의 위계를 나누며 행간과 자간으로 그 집중도를 조절하는 과정을 거치며 명함은 뼈대를 완성한다. 지향하는 콘셉트를 얼마나 탄탄한 타이포그래피로 밑작업을 했느냐에 따라 명함의 수준이 달라진다. 그 위에 미니멀리즘의 속옷을 입히던, 맥시멀리즘의 망토를 채우는 것은 이런 필수 요소를 충족시킨 이후에나 생각할 문제다. 즉 명함 외피의 단순함과 화려함은 결코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는 정녕 개인의 취향과 관련된 문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고대 백제의 미학을 한 번 생각해보라. 타이포그래피를 잘못 쓰면 곧 누추하고 사치스러운 디자인이 된다. 즉 아름답지 않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명함 하나로 이렇게 부산 떨 일이던가. 하지만 어떡하지. 부산 떨 일 맞다. 사회에서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이 작고 굉장한 그래픽 작업 하나가 알곡 덩어리인 당신을 쭉정이로 오인시킬 수 있다면 말이다. 껍데기는 가라! 반 세기 전 한 시인이 외쳤던 말은 이렇게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알곡만 찾아 내기에도 너무도 바쁜 인생 아니던가. 모든 쭉정이를 하늘 높이 날려버리는, 키질 하는 디자이너가 이 시대에 필요하다.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또한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 디자이너가 절실해지는 요즘이다. 

타이포그래피 전문지인 <The T> 12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