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18년 07월 04일 14시 03분 KST

[허프포스트 인터뷰] 제주 예멘 난민들을 만나다 : 내 이름은 무함마르

그는 예멘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549명에게는 549개의 이야기가 있다. 549개의 서로 다른 삶이, 생명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좀처럼 개별적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뭉뚱그려 ‘제주 예멘 난민’으로 지칭된다. ‘우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로 간주돼 배제와 차별에 시달린다. 이들은 누구일까. 왜 집을 떠나와야 했던 걸까. 질문들은 좀처럼 벽을 넘지 못한다.

허프포스트는 사흘 동안 제주에서 예멘인 다섯 명과 마주 앉아 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 예멘 난민’으로 묶는 대신, 각자의 이름과 삶을 끄집어냈다. 이들의 경험은 비슷하지만 또 각각 달랐다. 오고 가며 인사를 주고 받은 다른 예멘인들의 삶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모든 삶은 개별적으로 말해져야 한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무함마르가 숙소에서 기도하고 있다. 그는 독실한 무슬림이다. 예멘에는 아내와 부모, 세 아들과 두 딸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과 통화한다. 집을 떠난지 벌써 2년이 넘었다.

무함마르의 이야기

무함마르는 그저 평범한 알루미늄 기술자였다. 부친에게 물려 받은 작은 회사를 12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 셋 딸 둘을 가진 가장이었고, ”자동차를 바꾸는 게 취미”였던 평범한 남성이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매일 정해진 시간 기도를 잊지 않는 독실한 무슬림이기도 했다. 그의 일상은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2011년 예멘에서는 혁명이 있었다.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이 예멘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격렬한 시위 끝에 살레 대통령이 33년 만에 물러났다. 무함마르는 그 때 정당 ‘알 이슬라’의 당원으로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에는 후티도 같은 편이었다. 후티가 하디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정부와 대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살고 있던 사나는 후티 반군에 의해 점령됐다. 그의 부친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알 이슬라 당원이었다. 알 이슬라가 (하디) 정부를 지지하고 있고, 내가 그런 정당을 지지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많은 알 이슬라 당원들이 후티 반군에 납치됐다. 후티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당원들이 도시를 떠났다.”

그는 예멘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결혼도 했고, 부친에게 물려받은 직업도 있었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더 행복해지고 있었다. 모든 게 좋았다. 예멘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떠나야만 했다. 가족을 남겨두고 말레이시아로 피했다. 비자를 연장해가며 2년 가까이 버텼다.

말레이시아는 비교적 안전했지만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가 제주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건 약 1년 전이다. “7년 전까지만 해도 예멘인들은 비자 없이 한국에 갈 수 있었다. 상황은 괜찮았고, 위험을 느끼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멘을 떠나 한국으로 가게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곳에 왔다.

그는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제일 먼저 가족을 데려오고 싶다고 말했다. 2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는 탓이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가족과 통화하냐’고 물었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장 최근 통화기록은 불과 2시간 전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내일 아침이라도 예멘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함마르는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항상 웃음으로 대해줬고, 난민들을 존중해줬다”고 했다. 그는 다른 예멘인 10여명과 함께 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다. 이곳 관리인은 ”단체 손님인 줄 알고” 덜컥 받았던 예멘인들의 사정을 듣고 숙박비를 받지 않고 있다. 사비를 털어가며 음식 재료를 마련해줬다. 

무함마르는 끝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는 예멘인이 있다고 해도 한국인들이 그 한 사람으로 전체 예멘인들을 판단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예멘인들은 어딜 가든 상냥하고, 그 나라의 문화와 법을 존중한다.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지 모든 예멘 난민들의 잘못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