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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포스트 인터뷰] 제주 예멘 난민들을 만나다 : 내 이름은 레질라

레질라는 한국인들의 불편한 시선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549명에게는 549개의 이야기가 있다. 549개의 서로 다른 삶이, 생명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좀처럼 개별적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뭉뚱그려 ‘제주 예멘 난민’으로 지칭된다. ‘우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로 간주돼 배제와 차별에 시달린다. 이들은 누구일까. 왜 집을 떠나와야 했던 걸까. 질문들은 좀처럼 벽을 넘지 못한다.

허프포스트는 사흘 동안 제주에서 예멘인 다섯 명과 마주 앉아 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 예멘 난민’으로 묶는 대신, 각자의 이름과 삶을 끄집어냈다. 이들의 경험은 비슷하지만 또 각각 달랐다. 오고 가며 인사를 주고 받은 다른 예멘인들의 삶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모든 삶은 개별적으로 말해져야 한다. 

레질라(34)는 제주에 온 몇 안 되는 미혼 여성 중 하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달을 지냈고, 지금은 한국인 부부와 함께 살면서 주말에 카페 일을 돕고 있다. </p></div>
<p>이혼한 부모는 모두 오래전에 예멘을 떠났다. 8남매 중 4남매는 아빠를 따라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다. 엄마는 재혼한 뒤 미국으로 갔다. 레질라는 자매 둘, 오빠 하나와 함께 예멘에서 살았다.
레질라(34)는 제주에 온 몇 안 되는 미혼 여성 중 하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달을 지냈고, 지금은 한국인 부부와 함께 살면서 주말에 카페 일을 돕고 있다. 

이혼한 부모는 모두 오래전에 예멘을 떠났다. 8남매 중 4남매는 아빠를 따라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다. 엄마는 재혼한 뒤 미국으로 갔다. 레질라는 자매 둘, 오빠 하나와 함께 예멘에서 살았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레질라의 이야기

레질라는 비교적 일찍 제주에 온 편이다. 그 중에서도 미혼 여성은 드물었다. 그는 오빠와 ”사랑스러운” 조카 셋을 예멘에 남겨두고 지난해 8월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해외로 나간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전쟁이 나기 전에는 화장품 판매원으로 일했다. ”월급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든 게 (지금보다) 더 좋았다. 안전했고, 그 때는 모든 게 괜찮았다”고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우리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집에 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집들이 폭격을 당하기도 했다. 많은 가족들이 죽었고, 대부분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아이, 여성들... 비극이었다.”

예멘을 떠난 이유를 물었다. 답은 간단했다. ”예멘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너무 위험하다. 너무, 너무 위험하다.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하기 힘들 정도다. 어디에든 폭탄이 떨어지고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고... 우리는 우리나라를 정말 사랑한다. 아름답고 안전한 곳이었다. 경제적으로도 괜찮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친구의 형제는 지난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후티 반군은 대뜸 오토바이를 내놓으라고 했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들은 집으로 도망친 그와 문을 열어주러 나온 형에게 총을 쐈다. 둘 다 그 자리에서 숨졌다. 26살, 32살이었다. ”이건 전쟁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예멘에서는 이런 일이 늘 벌어진다.” 

13~14세쯤 되는 이웃 어린이가 어느날 실종되는 일도 있었다. 부모가 찾으러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3~4개월 뒤, 후티 군인들이 나타났다. ”우리랑 같이 전쟁에 참여했고, 전사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했다. 아빠는 큰 총을 꺼내 그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곧 아이의 아빠도 끌려갔다. 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예멘 후티 반군 군인들이 수도 사나에서 기념행사를 마치고 귀환하는 모습. 후티 반군은 사우디 주도 아랍연합군의 공습 1000일을 맞아 사우디 수도 리야드(Riyadh)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예멘 후티 반군 군인들이 수도 사나에서 기념행사를 마치고 귀환하는 모습. 후티 반군은 사우디 주도 아랍연합군의 공습 1000일을 맞아 사우디 수도 리야드(Riyadh)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Mohammed Hamoud via Getty Images

탈출은 험난했다. 레질라가 살고 있던 사나는 후티 반군에 장악됐다. 공항은 문을 닫았다. 국제 항공편이 뜨는 유일한 공항은 정부군의 임시수도인 아덴에 있었다. 가는 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너무 위험했다. 버스를 타고 하루 반나절을 달려 오만으로 갔다. 작은 가방 하나만 챙겼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생활을 레질라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1년 내내 덥고 습한 날씨도 힘들었고, 취업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도 힘들었다. 불법취업이 적발되면 구금된다. 그는 ”(말레이시아의 감옥은) 세계 최악의 감옥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한 친구에게서 제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레질라는 한국인들의 불편한 시선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많은 예멘인들이 왔다는 게 그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거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겁나는, 사실 겁나는 상황이다. 모두가 이 상황을 받아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 우리를 안 좋게 보는 한 사람의 의견으로 모든 한국인을 판단할 수는 없다.”

이슬람에 대해 물었다. 주저없이 답했다. ”이슬람은 복잡하지 않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무슬림이라고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무슬림은 소박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누구도 증오하지 않으며, 타인의 종교를 존중한다.”  

예멘 여성의 삶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레질라의 부모는 그를 ”더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키웠다”고 한다. 20년 전만 해도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게 많았다. 여성은 집에서 요리를 하고, 가족들을 돌보고, 농사를 거들 뿐이었다. 이건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문화적인 전통 같은 것”이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1995년에 내가 (사우디에서) 예멘으로 이사했을 때만 해도 여성에게는 살아가기 끔찍한 곳이었다. 여성이 저녁 5시에 밖에 돌아다니면 뭔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다르다. 여성들도 바깥에 나가고, 직업을 가진 여성들도 많다. 예전에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게 뭔가 끔찍한 일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레질라는 아직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다만 언젠가는 오빠와 세 조카가 있는 예멘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예멘을 떠날 때 조카들이... 완전 웃겼다. 잡아당기고, 울고, 소리지르고... 그날 집을 나오는 게 정말 힘들었다. 날 붙잡으면서 ‘가지마! 가지마!’ 소리 지르고… 정말 사랑스럽다. 엄청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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