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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프포스트 인터뷰] 제주 예멘 난민들을 만나다 : 내 이름은 아드난

그는 자신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여론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549명에게는 549개의 이야기가 있다. 549개의 서로 다른 삶이, 생명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좀처럼 개별적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뭉뚱그려 ‘제주 예멘 난민’으로 지칭된다. ‘우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로 간주돼 배제와 차별에 시달린다. 이들은 누구일까. 왜 집을 떠나와야 했던 걸까. 질문들은 좀처럼 벽을 넘지 못한다.

허프포스트는 사흘 동안 제주에서 예멘인 다섯 명과 마주 앉아 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 예멘 난민’으로 묶는 대신, 각자의 이름과 삶을 끄집어냈다. 이들의 경험은 비슷하지만 또 각각 달랐다. 오고 가며 인사를 주고 받은 다른 예멘인들의 삶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모든 삶은 개별적으로 말해져야 한다. 

아드난(29)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석유 관련 프랑스계 회사에서 근무했고, 전쟁이 터진 뒤에는 영어 교사 일자리를 임시로 구했으나 학생이 줄어들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p></div>
<p>지금은 제주의 한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오후 3~5시는 쉬는 시간이다. 식사시간을 빼면 하루에 8~9시간 일하는 셈이다.
아드난(29)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석유 관련 프랑스계 회사에서 근무했고, 전쟁이 터진 뒤에는 영어 교사 일자리를 임시로 구했으나 학생이 줄어들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은 제주의 한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오후 3~5시는 쉬는 시간이다. 식사시간을 빼면 하루에 8~9시간 일하는 셈이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내 이름은 아드난

아드난은 예멘에서 MBA를 전공했다. 승마와 축구를 즐겼다.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리버풀 팬이기도 하다. 프랑스계 회사에서 일하던 중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인 직원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회사는 문을 닫았다. 급한대로 영어교사 일자리를 구했다. ”누구도 전쟁이 이렇게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그의 삶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좋은 집도 있었고, 월급도 좋았다. 좋은 직업, 풍족한 생활이 있었다. 의료보험도 있었고, 차도 있었고, 모든 게 괜찮았다.” 전쟁은 모든 걸 바꿔놨다. ”가족들은 일찌감치 예멘을 떠났다”고 했다. 가족들은 카타르로 갔다가 다시 흩어져 각각 다른 곳으로 갔다. 그는 혼자 남았다.

아드난은 예멘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오래 버텨보려 했다. “1주나 2주, 아니면 한 두 달이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떠났지만 나는 남기로 했다. 어차피 일도 해야 했고. 누군가는 집을 지켜야 했다. 금방 모두가 돌아오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오래 남아있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내 목숨도 몇 번 위험에 처했다”고 그는 말했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들(정부군과 반군)은 사람들을 강제로 징집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도록 한다. 어느 쪽에서 싸울지를 정해야 할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한다.” 그것 말고도 예멘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죽는다. 

″공습으로 죽을 수도 있고,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굶주림으로 죽을 수도 있다. 만약 병이 생기면, 대부분의 병원은 문을 닫았고 그나마 남은 병원은 비쌀 뿐더러 봉쇄 때문에 의약품도 부족하다. 병원에 갈 여력이 없거나 가더라도 약이 없어서 죽을 수도 있다.” 그는 예멘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예멘 수도 사나(Sana'a)에 위치한 Thawra 병원에서 환자들이 투석을 받고 있는 모습. 2018년 4월1일.
예멘 수도 사나(Sana'a)에 위치한 Thawra 병원에서 환자들이 투석을 받고 있는 모습. 2018년 4월1일. ⓒMOHAMMED HUWAIS via Getty Images

그러나 막상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예멘에 있는 외국 대사관들이 일제히 철수하면서 비자를 신청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대사관이 있는 가까운 나라로 가려면 비자가 필요했다. ”비자를 신청하러 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피를 나눈 사이”인 옆 나라들은 예멘인들이 쏟아지자 국경을 닫아버렸다.      

목적지가 그렇게 정해졌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많은 국가들에서는 겨우 2주, 1개월만 체류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가 제일 체류허용기간이 길었다. 3개월이다. (...) (사정이) 좋을지 안 좋을지 몰랐다. 그저 예멘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비자 없이 가장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아드난은 오만과 카타르를 거쳐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말레이시아는 난민협약 가입국이 아니다. 난민을 받지 않는다. 취업도 허용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제주로 갈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소식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은 ”비자 없이 갈 수 있으면서도 난민을 받아주는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왜 캐나다나 유럽으로 가지 않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곳으로 갈 수 없었던 건 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왜 그 멀리에서 이 극동 지역까지 왔냐고, 옆 나라나 유럽 같은 곳으로 갔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한다. 난민을 받아주는 (유럽) 다른 나라들은 모두 비자가 필요하다. 전부다.” 

아드난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난민신청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항 내 송환대기실에서 나흘을 머물다가 바깥으로 나왔다. 5월2일이었다. 지금은 제주의 한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고 있다. ”내 난민신청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국제협약에 서명했고, 내가 그 협약의 당사자다. 나는 난민이 될 자격이 있다.”

제주 시내 한 호텔에서 예멘인들이 음식을 나누고 있는 모습. 2018년 6월27일.
제주 시내 한 호텔에서 예멘인들이 음식을 나누고 있는 모습. 2018년 6월27일. ⓒNurPhoto via Getty Images

그는 자신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여론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는 ″모든 인종에는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있고,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나쁜 사람은 어느 종교나 인종에나 다 있지만 일반화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나쁜 점을 가지고 전체를 일반화해서 나쁘게 보이도록 하면 안 된다. 그건 옳바르지 않은 일이다.”

″극단주의자들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사람들의 공포를 조장한다. 이슬람이나 아랍, 예멘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나쁘게 보이도록 하려 할 것이다. 전부 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전부 다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디에나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드난은 ”전쟁 때문에 해외를 떠돌았고, 시험을 거친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사람들은 ‘일정 기간 동안 예멘인들을 제주에 묶어놓고 아무 데도 못 가도록 해서 시험을 거친 다음에 괜찮으면 그 때 아무 곳이든 갈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사람들이 말레이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아드난은 ”우리는 난민이지 노예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난민들이 향했던 어떤 국가들에서는 난민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난민에게는 어떤 일이든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민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난민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우리가 이곳에서 그런 대우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 나쁘지는 않다. 그는 한국인은 물론, 제주에 사는 미국, 캐나다, 남아공, 호주인들과 친구가 됐다. 주민들도 친절했다. 특히 노인들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정말 말씀을 많이 하셨다. 1950년대 한국 사람들도 우리랑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아드난은 ”우리가 받은 걸 돌려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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