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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임금제 지도지침' 발표시기가 또 늦춰졌다

  • 이진우
  • 입력 2018.06.30 10:37
  • 수정 2018.06.30 10:42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을 앞두고 정부가 사용자에 대한 ‘6개월 처벌유예’, ‘정보통신기술(ICT) 업종 연장근로 확대’ 등 대책을 내놓고 있다. 대부분 재계가 요구한 조처다. 반면 포괄임금제에 대한 정부의 지도지침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노동계에서는 야근수당 등 법정수당을 기본급과 따로 구분하지 않는 포괄임금제를 ‘과로 사회’의 한 원인으로 꼽는다. 노동시간 단축에 관한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주 52시간 근무제가 현장에 제대로 뿌리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29일 고용노동부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법·제도 개선 과제의 하나인 ‘포괄임금제 지도지침’ 발표 시기를 오는 8월로 다시 늦춘다고 밝혔다. 김왕 고용부 근로기준정책관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여러 대법원 판례가 있어 포괄임금제 허용 기준은 명백한데, 실제 사업장에 적용할 지도지침을 마련하려면 실태조사를 거쳐야 한다”며 “오는 8월에는 (포괄임금제 지침을) 발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정부 지침이 나오면, ‘가짜 포괄임금제’로 인한 과로나 초과근로수당 체불 등에 대해서도 근로감독 요청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런 기대도 또다시 ‘유예’됐다.
2010년 5월 대법원 판결 등을 보면 포괄임금제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에만 도입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16년 한국노동연구원이 100인 이상 사업장 206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니, 포괄임금제를 적용받는 사무직 노동자 비율은 41.3%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법원 판례대로 ‘노동시간 산정이 어려워서’ 이를 채택했다고 응답한 기업(45.9%)은 전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나머지는 ‘임금 계산의 편의’(30.6%) 등을 이유로 포괄임금제를 활용하고 있다.

노동계에서는 무분별하게 활용되는 포괄임금제에 대한 정부 규제가 없으면, 노동시간 단축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야근 등에 따른 가산임금 부담이 줄면, 사용자는 그만큼 ‘더 많은 노동’을 바라게 마련이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활동가는 “현재 수많은 노동자가 포괄임금제 때문에 노동시간 제한 없이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상 임금 청구소송이 아니면 노동자가 포괄임금제에 저항할 방법도 없다. 정부의 포괄임금제 지침 발표가 늦어지는 만큼, 주 52시간 근무제도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도 출범 직후 포괄임금제 규제를 수 차례 약속한 바 있다. 먼저 정부는 지난해 7월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며 ‘주 52시간 노동 확립을 위한 법·제도 개선, 포괄임금제 규제’ 목표를 제시했다. 이어 김영주 고용부 장관이 같은해 8월 문재인 대통령 주재의 ‘핵심 정책토의’에서 “포괄임금제 개선 지침을 10월까지 마련하겠다“고 보고했다. 지난 5월8일 이성기 고용부 차관도 “포괄임금제 지침을 6월에 발표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정부의 이런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반면 정부는 노동시간 단축에 관한 재계 요구에는 발빠르게 응답했다. 지난 20일 정부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제안대로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는 7월부터 최대 6개월의 시정기간을 두고 주 52시간 위반에 따른 처벌을 유예하겠다고 밝혔다. 26일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재계 요청을 받아들여 정보통신기술 업종에 대해 연장근로 확대를, 28일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 기간 연장을 언급했다. 모두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을 열흘도 안 남긴 시점에서 찾아온 변화다.

노동시간 단축은 한국 사회에 별안간 떨어진 과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부의 ‘시험 전날 벼락치기’ 식 대응에 비판이 따른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2003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도입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 기간에 주 52시간 노동 법제화 공약을 내세웠다. 지난 2월 노동시간 단축 입법은 이미 15년 전 사회적 합의가 끝난 주 52시간 근무제를 ‘정상화’하는 조처인 셈이다.

여러 노동 전문가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넘어 ‘2022년까지 1800시간대 노동시간 실현’이라는 국정과제를 이행하려면, 정부가 좀더 책임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정부가 포괄임금제 지침을 발표해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의지를 명확히 보이고, 근로감독을 통해 무분별한 포괄임금제를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 52시간 도입을 계기로 정부가 노동계와 재계를 모두 아우르는 가운데, ‘일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경영학)는 “지금껏 ‘노동시간이 곧 돈’이라는 노사의 담합구조 속에서 장시간 노동이 유지돼 왔다”며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을 기회로 삼아 불합리한 임금체계, 유명무실한 휴가제도 등 다양한 쟁점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할 때”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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