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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는 쌍용차의 서른번째 희생자가 되었을까

쌍용차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복직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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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파업 이후 10년 새 서른 번째 희생자가 된 해고노동자 김아무개(48)씨의 고교 동창은 김씨를 가정과 일에서 성실한 친구로 기억했다. 그는 “(김씨가) 복직을 기다리며 밤낮으로 일했다. 빚을 갚기 위해 정말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했다. 새벽에 일해야 하기 때문에 술도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27일 김씨의 장례식장을 찾은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 노조 지부장도 “투잡을 뛰면서 열심히 일했다. 최근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에도 응하고, <한겨레> 와도 인터뷰하는 등 열심이었는데…”라며 동료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김씨는 숨지기 전 아내와 노모, 선배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글을 남길 만큼 주변에도 애틋한 감정을 나타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심리 치료 센터인 와락의 권지영 대표는 김씨에 대해 “평상시 조용한 모습이었다. 파업과 해고 이후 아내가 공장 등에서 궂은일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다. 성격이 우직해서 엄살 안 부리고 부부 모두가 성실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가 왜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김씨는 2009년 8월5일 평택 쌍용차 조립공장 옥상에서 저항하다 체포된 뒤, 지난 10년동안 경찰 폭력의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 최근 김씨와 함께 쌍용차 인권 유린 사태와 관련한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은 이은우 평택시민행동공동대표는 당시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면서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이 대표는 “진상조사위의 조사를 받고 나면 응어리가 풀려 후련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더 화가 나고 분노가 더 치밀었다. 그 날 저녁은 잠도 못 잤다”고 말했다.

경제적 어려움도 컸다. 그는 최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취업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신용불량자가 됐다”며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더욱이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경찰이 진압 당시 훼손된 헬기 비용 등으로 16억원과 회사 쪽으로부터 14억원 등 30억원의 손해배상청구는 여전히 유지돼 해고노조원들을 억누르고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김씨를 비롯해 해고노조원들을 버티게 한 ‘복직의 희망’이 최근 멀어진 것도 김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원인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지난 10년의 어려움 속에서도 해고노조원들이 버텨낸 것은 복직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큰 기대를 걸었던 협상이 깨지면서 해고 노조원들의 불안감과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쌍용차 노·노·사는 2015년 12월 생산물량이 늘어 인력이 필요하면 단계적으로 해고자를 복직키로 합의하면서 복직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복직된 해고노동자는 45명이다. 1년에 15명꼴이다. 이대로라면 나머지 120명 복직에 최소한 추가로 10년이 더 걸리는 셈이다.

쌍용차 회사 쪽과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는 올해 초부터 협상에 들어갔고, 해고노조원들의 복직 기대도 높아졌지만 6월초 노조 요구안에 대해 회사쪽의 완강한 거부로 원점으로 되돌아간 상태다.

노조는 “전년퇴직자가 올해 48명, 내년 52명이 발생하고 내년 상반기 신차 생산 등으로 해고자 복직에 충분한 여력이 있다”며 “단계적인 복직을 수용하되 회사가 최소한 복직 일정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했다. 반면 회사쪽은 “복직 약속은 지키되 일정은 약속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3개 조립라인 중에서 1개 라인은 판매량이 적어서 전체의 60% 정도만 가동되고 40%는 인력이 남는 상태다. 국내외 자동차 시장의 불안정성 때문에 일정을 약속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해고노동자들이 언제 복직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들에 대한 ‘희망 고문’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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