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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언니의 시간

ⓒhuffpost

다큐 <어른이 되면>을 보았다. 감독 장혜영의 동생 장혜정은 중증발달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열세 살에 시설에 들어갔다. 감독은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동생의 삶을 동생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고, 그녀를 데려와 함께 살기로 한다. 그러나 당장 받을 수 있는 복지서비스가 아무것도 없다. 감독은 묻는다. 왜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다른 누군가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되어야 할까. 

초등학교 시절 혜영은 오전에는 동생의 교실에 있다가 동생의 수업이 끝나면 자기 반으로 가 수업을 들었다. 혜영이 중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동생은 시설로 보내졌다. 언니의 삶을 위해서, 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언니는 깨달았다. 누군가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을 이유로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 있다면, 남아 있는 삶 역시 온전히 그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혜영은 말한다. “혜정이와 같이 살기 위해서는 두 개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는 나의 시간이고 하나는 혜정이 언니의 시간이다. 혜정이를 시설로 보낸 대가로 얻어진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진짜 나의 시간을 찾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한동안 다시 ‘혜정이 언니의 시간’을 살기로 한다.

혜영은 이제 어마어마하게 불확실해진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나는 그녀가 인생이라는 바다를 탐험하는 항해사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배는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러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듯, 인생 또한 그러함을 잘 아는 사람. 그녀는 삶의 모호함과 불가해함을 온몸으로 받아안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다정한 언니의 시간을 통제하는 건 이제 막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처럼 엉뚱하고 흥이 많은 동생뿐이다. 그리하여 6개월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자매의 이야기보따리에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도전과 응전의 스펙터클 대신 작은 일상과 상냥함이 가득하다. 친구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함께 화장을 하고 스테이크 써는 법을 가르쳐주는 시간 같은 것.

혜영의 친구가 물었다. 안정된 삶에 대한 욕망 같은 거 없어? 혜영이 대답하길, 나는 이게 안정된 상태야.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아침에 5분만 더 자겠다는 동생을 보면서 방문 닫고 나올 때가 진짜 행복하다고.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자신이 겪어본 가장 평화로운 경험이라고.

그 말은 다시 영화 속 내레이션으로 이어진다. “혜정이를 돌봐야 했던 어린 시절,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혜정이가 시설로 사라졌을 때 내게 찾아온 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그저 혜정이의 빈자리가 마음속에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나에게 이 영화를 한마디로 줄이라면 ‘마음속 동그란 빈자리’라고 말하겠다.

‘그리워’를 영어로 말하면, ‘아이 미스 유’. 내 존재에서 당신이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라고 어디에선가 보았다. 감독은 어느 날 13년을 함께 자란 동생이 사라지자 자신의 존재에서 동생이 빠져 있음을, 그래서 자신은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나에게도 그런 동그란 빈자리가 있다. 타인을 위해 자기를 온전히 내주고 진정한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충분히 애쓰는 존재들을 보면 시큰시큰 아파오는 자리. 세상엔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은데 다정함도 그중 하나임을, 세상엔 필요한 권리가 참 많은데 ‘자매가 함께 무사히 할머니가 될 권리’도 그중 하나임을 알았다. 행복하다. 이 다큐를 7월7일까지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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