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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 사냥'에 게임업계 여성 노동자들이 쫓겨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싫어하는 ‘한남’ 같은 단어를 쓴 적도 없다. 여성인권 관련한 글을 RT했을 뿐"

ⓒ한겨레

게임업계 여성 노동자들이 쫓겨나고 있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 심지어 미투 운동을 지지했다는 이유가 빌미가 됐다. ‘메갈’이라는 딱지가 붙은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들의 창작물은 하루아침에 게임에서 사라졌다. 작업 의뢰도 줄었다. 사실상 해고이고, 곧 업계 퇴출로 이어진다. 여성혐오 발화는 이제 밥줄을 끊는 ‘실질적 위협’이다. “어떠한 사상 검증도 ‘그래도 되는 일’이 됐다.” 2018년 게임업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신분제 사회에서 평등을 주장하던 노비쯤 되나요?”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 ㄱ씨는 올해 3월 본인이 그린 캐릭터 일러스트가 게임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게임 설정 변경 등의 경우를 빼면 일러스트 교체는 흔한 일이 아니다. 시작은 누군가 ㄱ씨 개인 트위터에 단 멘션이었다. “너 메갈(여성혐오에 ‘미러링’으로 대응한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 이용자를 가리키는 말) 퍼졌으니까 이제 사과문 쓸 준비나 해라”라는 내용이었다. “당황해서 인터넷을 뒤져봤죠. 저더러 메갈이라며 죽어라, 망해라 같은 욕을 하는 글이 이미 퍼졌더라고요. 그런데 전 메갈리아 사이트에는 들어가 본 적도 없어요.”

평소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던 ㄱ씨는 남성 위주의 사회,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를 비판하는 트위터 글을 참고하기 위해 꾸준히 ‘마음에 들어요’를 눌러 글을 저장해왔다. 게임 웹진 사이트 인벤과 비디오 게임 정보 사이트 루리웹 등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근거로 ㄱ씨를 ‘남성을 혐오하는 반사회적인 메갈 작가’로 몰아세웠다. 개인 트위터까지 찾아와 “작품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놀라운 건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게임 공식 누리집에 “이용자들의 의견에 따라 문제가 된 일러스트를 교체하겠다”는 공지가 올라왔다는 점이다. ㄱ씨에게 미리 알리지 않은 채였다. 1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자 결국 ㄱ씨가 먼저 회사에 연락했다. 회사는 “개인 사상에 대해 간섭하는 게 아니”라면서도 “이례적으로 많은 항의 전화와 메일이 왔다”고 강조했다. 회사는 ㄱ씨에게 구체적인 수치는 알려주지 않았다.

ㄱ씨의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한 달에 3~4건씩 들어오던 국내 게임회사들의 작업 의뢰가 3월 이후 서서히 줄어들었다. ㄱ씨는 “한번 ‘메갈’ 손가락질을 받은 작가는 다른 회사에서도 쓰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ㄱ씨는 “고작 성차별 반대, 페미니즘을 외친 게 집단적 폭력과 직업 박탈로 이어질 만한 구실이 되냐”며 “지금 일러스트 작가들은 마녀사냥의 재판대에 올라와 있다”고 호소했다.

ⓒ한겨레

■ 피해자만 최소 10명…“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업계 ‘메갈 사냥’ 피해자는 올해 3~4월 한 달 동안 ㄱ씨를 포함, 최소 10명(게임개발자연대 추산)에 이른다. 피해자 대부분은 ㄱ씨와 같은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로 업계의 가장 약한 고리로 꼽힌다. 게임개발자연대 김환민 대표는 “게임업계는 여성 종사자 비율이 17.7%(2016년 기준)에 불과한 ‘남초 산업’인데 여성들이 몰린 아트 직군에서 특히 외주화, 주변화가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ㄴ씨도 올해 3월 ‘메갈 작가’로 몰린 뒤 하루 만에 게임에서 일러스트가 삭제됐다. ㄴ씨는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번 사태의 원인을 프리랜서 작가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외주 계약에서 찾았다. ㄴ씨는 “모든 게임회사가 작가에게 매절 계약, 즉 저작권을 통째로 넘기라고 요구한다. 계약서 수정 요청이라도 할라치면 아예 답장을 안 보낸다. 작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계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ㄴ씨는 “매절로 인한 불이익이 매우 심각하다”며 “내 일러스트가 납품한 게임이 아닌 다른 게임에 쓰인 적도 있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손 쓸 방법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일러스트 ‘생살여탈권’을 회사가 쥐고 있는 현실에서 프리랜서 작가들이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심지어 작가에 대한 ‘메갈’ 의혹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러스트를 삭제한 회사도 있다. 경력 4년의 프리랜서 일러스트 작가 ㄷ씨가 겪은 일이다. ㄷ씨의 설명을 종합하면, 회사는 ㄷ씨에 대한 ‘메갈’ 논란이 생기자마자 먼저 연락을 해 “작가 잘못이 아니니 무대응으로 나가자”고 권했다고 한다. 불과 2~3일 뒤 회사는 말을 바꿨다. 회사는 ㄷ씨에게 “게임 이용자층이 적다 보니까 그분들을 안고 가야 할 것 같다”며 “(작가 잘못이 아니므로) 최대한 작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공지를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ㄷ씨는 “막상 올라온 공지를 보니 ‘최근 논란이 된’이라고만 썼다. 그 자체가 내 잘못인 것처럼 보였다”며 “이 모든 과정에서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고 말했다.

■ 돈은 다 줬으니 괜찮다? “해고보다 더한 고통”

게임회사들은 일러스트 교체를 알리면서 ‘돈은 이미 다 지불했다’고 명시했다. 회사가 작가들과 근로 계약을 맺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모양새다.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구조를 이미 알고 있다. “외주는 손절이 쉽다’, “돈 다 받아놓고 잘렸다고 빼액” 같은 노골적인 말이 나돌기도 한다.

하지만 ‘근로관계가 아니’라는 회사 쪽 주장은 게임 개발 현실을 외면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문화평론가 성상민씨는 “일러스트 작가들은 개발사로부터 지속적으로 업무 메일을 받고 정해진 틀에 맞춰서 일한다”며 “말로는 프리랜서지만 사실상 근로관계에 있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라고 지적했다. 김환민 대표 역시 “티시지(TCG, Traiding card game) 등 일러스트가 대량으로 들어간 모바일 게임이 지속적으로 출시된 배경에는 작가들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그럼에도 핵심 인력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취약한 노동권 위에서 일해왔다”고 비판했다.

“창작물로서 가치를 훼손당한 그 자체가 노동권 침해”라는 말까지 나온다. ㄴ씨는 “(일러스트 교체로) 창작물이 가치를 인정받는 기회 자체를 빼았겼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ㄴ씨는 “작가에게 작품은 그 자체로 포트폴리오다. 어느 게임에 참여했는지가 중요하고, 트위터 역시 포트폴리오를 홍보하기 위해 한다. 회사가 일러스트를 지우면서 홍보 기회도 같이 사라졌다”고 강조했다.

일러스트 교체가 사실상 해고이며, 더 나아가 업계 퇴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ㄴ씨는 “작업 의뢰가 아예 끊긴 것은 아니지만, 국내 회사에서 작업이 더 들어올지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국내 일은 이런 식으로 배제당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ㄷ씨 역시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며 “일러스트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털어놨다. ㄷ씨는 “차라리 내 잘못 때문에 해고를 당했다면 오히려 속이 시원했을 것”이라며 “온갖 사이버불링과 욕설, 마녀사냥까지, 해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게임 커뮤니티에서 유명 인디게임 개발자 소미를 '메갈'이라고 몬 증거들
게임 커뮤니티에서 유명 인디게임 개발자 소미를 '메갈'이라고 몬 증거들 ⓒ한겨레

■ “페미니즘에 메갈 낙인…2년 전보다 상황 심각”

문제는 사실상 해고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온 이른바 ‘메갈’ 의혹이 실체조차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피해 작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미투 운동 지지’ 해시태그를 달거나 페미니즘 강연 글에 ‘마음에 들어요’를 누른 점도 ‘메갈의 증거’가 됐다.

ㄷ씨는 “나는 그들이 싫어하는 ‘한남’ 같은 단어를 쓴 적도 없다. 여성인권 관련한 글을 아르티(RT)하고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분들을 팔로우했을 뿐”이라며 “페미니즘을 그냥 다 메갈로 낙인찍는 수준까지 온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 작가들을 중심으로 “2년 전 ‘넥슨 사태’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넥슨 사태는 2016년 7월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 인증 사진을 올린 성우 김자연씨가 게임 <클로저스>에서 갑자기 하차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김자연씨 지지 의사를 밝힌 뒤 지금껏 사이버 스토킹, 악플에 시달리는 작가 박지은씨는 “이렇게 빠른 시간에, 잦은 빈도로 ‘메갈’의 정의가 확대될 줄 몰랐다”며 “남자한테 거슬리면 모두 메갈이다. 메갈은 표적을 찍는 수단이자 마법의 단어”라고 꼬집었다. 평론가 성상민씨도 “2년 전에는 직접적인 발언이 문제가 됐다면 이제는 아르티(RT)와 ‘마음에 들어요’ 같은 간접적인 의사 표시에도 화를 낸다. 메갈이라고 비난할 명분의 수준이 더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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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트리오브세이비어>의 개발사 IMC게임즈 사례는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IMC게임즈 김학규 대표는 3월26일 게임 공식 누리집에 장문의 공지를 올렸다. 자사 정직원인 일러스트 작가가 여성인권단체 ‘여성민우회’와 여성주의 정보생산자 조합 ‘페미디아’를 팔로잉했다는 이유로 ‘메갈 의혹’을 받자 해당 작가를 면담하고 그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김 대표는 작가에게 “여성민우회와 페미디아 계정은 ‘문제가 될 계정’인데 왜 팔로잉을 했냐”고 물었다. 작가는 “막연히 좋은 방향의 (변질되기 이전의) 페미니즘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팔로잉을 눌렀다”고 해명했다. 작가는 개인 트위터에도 별도의 사과문을 올려 다시 한 번 “잘 모르고 한 일”이라며 머리를 숙여야 했다. 당시 김 대표는 “정말로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무지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썼다. 하지만 한국성폭력상담소는 3월27일 논평에서 “성차별적 사회 구조에 분노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압하겠다는 뜻과 다름없다”며 “김 대표의 태도야말로 ‘무지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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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인디게임 개발자 소미(SOMI)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게임 커뮤니티에서 ‘메갈’로 몰렸다. 직장 내 성폭력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 <뉴욕타임스> 기사와 노키즈존(영유아와 어린이를 동반한 고객 출입을 제한한 공간)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기사 등에 ‘마음에 들어요’를 눌렀다는 게 이유였다.

작가들은 “알려지지 않은 피해도 많다”고 입을 모은다. 작가 박지은씨는 “5월 말에도 유명 일러스트 작가가 게임에서 잘렸지만 공론화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나중에 상황이 괜찮아지면 다시 일을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인데, 내 경험상 게임회사는 한 번 자르면 다시는 작가에게 일을 안 준다”고 덧붙였다.

‘메갈 사냥’은 게임회사 내부마저 숨죽이게 하고 있다. ㄱ씨는 “일부 게임회사에서 내부 직원들에게 SNS를 자제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언제까지 숨죽이고 눈치 보면서 버텨나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 게임 배급사에서는 입사한 지 3개월도 안 지난 여성 수습 직원이 익명 SNS 계정에서 자사의 ‘메갈 의혹’ 대처를 비판했다가 내부 고발로 사실상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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