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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인들이 고국을 떠난 이유는 그때의 우리와 비슷하다

짧게 보는 예멘 현대사.

ⓒMohamed Al-Sayaghi / Reuters

지난 4월말 제주에 들어와 난민신청을 한 예멘인 아드만은 제주에서 놀라운 경험 두 가지를 했다. 하나는 사람들이 놀랍도록 친절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노인들이 예멘인들이 처한 상황을 아주 잘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는 최근 허프포스트코리아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특히 나이 든 분들은 우리가 겪은 일을 이해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유를 물어보면 1950년대에 있었던 전쟁 때문이라고들 하셨다. 4.3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한국 사람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얘기를 정말 많이 하셨다.”

그들은 왜 지금 이곳에 왔을까. 이 단순한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매우 복잡한 예멘의 현대사를 이해해야 한다. 

“지금 예멘에서는 당신이 누구의 친구인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합니다. 서로서로 향해 싸우고 있죠. 전기도 없고, 물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징집되고, 누군가는 죽어 나가죠.” (한겨레, 난민에 따가운 시선 알지만…“이들은 전쟁을 피해 왔을 뿐”, 6월25일)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예멘인의 이 말이 어떤 상황을 뜻하는지 몸으로 알 수 있다. 내전, 외국군대의 개입, 분단, 통일, 다시 내전. 한국도 매우 비슷한 일을 겪었고, 어쩌면 또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랍의 봄’ 이후 지옥문이 열렸다

‘행복의 아라비아‘는 아주 오래전 예멘의 별칭이다. 국토는 작지만, 홍해에 접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부유하던 시절이 있었다. 커피와 향료 교역이 주 수입원이었다. 카페모카의 ‘모카’는 예멘의 도시 이름이다.

ⓒPawel Gaul via Getty Images

예멘의 번성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로 가려면 예멘 남부를 지나야 했고, 중동의 원유가 이 길을 지나다녔다. 1960년대 경제 중심지였던 예멘 도시 아덴(Aden)은 뉴욕에 이어 세계 제2위의 항구도시로 불릴 정도였다.

1962년 북예멘이 영국에서 독립했다. 1967년 남예멘도 독립했다. 북쪽은 자본주의, 남쪽은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1990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남북 합의로 통일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 정파 간 통합에 실패했다. 소외감을 느낀 남예멘 정치 세력들은 1994년 5월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내전을 일으켰다. 소외됐던 다른 정파와 종파들도 반정부 세력으로 자리 잡아나갔다. 이 긴 세월 동안 대통령은 알리 압둘라 살레였다. 1978년 북예멘 대통령이 된 그는 1990년 통일 예멘의 대통령 자리에도 올랐다. 장기 독재와 부패·무능으로 그는 국민들의 공적이었다.

2011년 예멘에도 ‘아랍의 봄’이 찾아왔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살레 대통령은 이듬해 물러났다. 과도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또 통합에 실패했다. 정파, 종파, 부족 간 권력 분점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내전이 시작됐다.

ⓒAHMAD GHARABLI via Getty Images

축출된 살레 전 대통령은 복귀를 노렸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던 시절 싸웠던 북부의 시아파 후티 반군과 손을 잡았다. 과도 정부를 이끄는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정권을 몰아내자는데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2015년 2월 결국 후티 반군은 예멘 수도 사나를 장악했다.

시아파인 후티 반군이 예멘 수도를 장악하자 이번엔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나섰다. 아랍에미리트(UAE) 등 아랍 10개국을 모아 아랍연합군을 꾸린 사우디는 2015년 3월26일 수도 사나를 공습했다. 내전은 후티 반군을 지원하던 시아파 맹주 이란과 수니파 맹주 사우디 간 국제전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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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전인지 내전인지 알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온갖 세력들이 등장했다. 폭탄 하나도 시아파 반군의 짓인지, 수니파 정부군의 소행인지, 아랍연합군이 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미군의 무인폭격기가 쏜 폭탄일지도 몰랐다. 알카에다, IS, 특정 부족의 민병대, 범죄세력까지 뒤엉켰다. 지옥 그 자체였다.

  

어린이 100만명이 떠돌다

지난 4월 유니세프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4월 한달간 어린이 61명이 숨졌고, 어린이 67명이 장애를 입었다. 지난해 4월 콜레라가 발생해 1년간 약110만명이 걸렸다. 이중 2277명이 숨졌다. 

유니세프는 ”어린이 1100만명에게 인도주의적 도움이 필요하다”라며 ”어린이 100만명이 국내에서 난민으로 떠돌고 있다. 5세 미만 어린이 40만명은 심각한 급성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유니세프는 ”예멘인 1647만명이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덧붙였다. 

2015년 10월 6세 예멘 어린이 파리드 샤키는 피투성이가 된 채 수술대에 누웠다. 미사일 공격에 머리를 다쳤다. 아이는 울면서 의사에게 애원했다. “저를 땅에 묻지 말아주세요.” 죽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땅에 묻히는 걸 계속 봐왔던 모양이다. 의료진이 웃으며 아이를 달래주려 했지만, 아이는 겁에 질려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영상이 촬영되고 며칠 뒤 아이는 숨졌다. 시리아 난민 문제를 상징했던 세살배기 ‘쿠르디’의 사진이 공개된 직후의 일이었다.

2017년 8월엔 6세 소녀 부타이나 알 라이미의 사진 한장이 트위터에 올랐다. BBC에 따르면 아이의 가족들은 아랍동맹군의 전투기 폭격으로 모두 숨졌다. 사진 속 아이는 앞을 보기 위해 손가락으로 한쪽 눈을 억지로 벌리려고 했다. 사람들은 연대의 표시로 아이와 같은 포즈를 취한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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