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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검경 수사권'을 조정하려 하는가?

누가 더 실리를 얻었느냐보다 중요한 것

ⓒhuffpost

예전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1990년대 법정 활극 한마당.
 
형사재판 도중에 검사와 피고인이 감정싸움이 붙었다. 예상보다 훨씬 무거운 구형을 받은 피고인은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재판장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재판장님, 제가 조사를 받을 때 저기 앉아있는 검사님이 공범에 대해 불면 구속도 안 하고 용서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못 믿겠다고 하니까, 각서를 써주겠다고 하더니 실제로 자기 도장을 찍어서 각서를 써줬습니다. 그런데 자기 말을 뒤집고 구속도 시키고 이제 이렇게 무거운 구형을 때리다니 저런 거짓말쟁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서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각서를 꺼내서 폭로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한다.
 
자기 사건 순서를 기다리던 아버지를 비롯해서 법정에 대기하던 변호사들, 방청객들은 아연 흥미진진 모드. 검사가 수사를 받는 사람에게 각서를 써줬다니 얼마나 잠이 확 달아나는 재밌는 얘긴가.
 
순간 당황한 검사는 움찔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Michał Chodyra via Getty Images

 
“재판장님, 피고인이 가지고 있는 각서는 제가 조사를 하다가 화장실에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 위에 있던 제 도장을 훔쳐서 만든 겁니다. 위조된 각서에 속지 마십시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검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몇 초간 쳐다보던 피고인은 한숨을 푹 쉬더니 주머니에서 손을 빼면서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재판장님, 사실 그런 각서는 없습니다. 그냥 제가 한번 지어낸 말입니다. 그런데 저 검사는 있지도 않은 각서 얘기를 꺼내니까 한술 더 떠서 제가 도장을 훔쳐서 각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진짜 거짓말쟁이 아닙니까? 저런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으시겠습니까?”
 
피고인의 한판승. 망신을 당한 검사는 얼굴이 벌게진 채 말을 잇지 못했고, 법정에 있던 변호사들은 웃겨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해석은 이랬다.
 
“어떤 경위로든지 각서 비슷한 게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피고인도 그런 얘기를 꺼냈고, 검사도 위조 운운했겠지. 그런데 피고인의 입장에서 순간적으로 판단해보면 어차피 우리 법정에서 검사랑 싸워봤자 이기기 어렵고, 또 그런 각서가 있다고 한들 판사가 무죄를 해줄 리도 없으니까 포기하고(각서를 꺼내지 않고) 그냥 검사를 망신주는 쪽을 택한 거지. 그 시점에서 피고인이 바랄 수 있는 최대치가 그거 아니었을까. 머리는 좋은 친구네.”
 
뭐 아버지의 해석에 다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단계에서 실현 가능한 목표와 희망 사항에 불과한 목표를 구별하고 과감하게 헛된 희망을 포기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피고인은 전략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발표된 정부의 수사권조정안을 놓고 아침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훑어보니 대체로 기존에 있던 수사에 관한 권한이 경찰과 검찰 중 어느 쪽에 더 많이 배분되었는지 해설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어떤 매체에서는 경찰이 많은 것을 얻어냈다고 하고, 어떤 매체는 오히려 검찰이 실리를 챙겼다고 한다. 두 기관 사이의 권한 배분이라는 틀에서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한번 생각을 해본다. 수사권 조정과 관련해서 우리의 ‘전략적 목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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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어려운 때라면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의 달성을 위해서 노력해야겠지만, 지금은 ‘게임 체인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가 검찰 혹은 경찰이라는 수사기관에 의해서 결정되고, 온 국민이 그 결과를 기다리는 그런 모습을 바꿔야 하고 또 바꿀 수 있는 때가 아닐까?
 
PD수첩 사건, 내곡동 사저 사건 등등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사건들을 제쳐 놓고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심지어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진품인지 아닌지 같은 문제조차 검찰이 판정을 내린다.
 
최근 칸트의 저작에 대한 번역을 놓고 학계의 논쟁이 뜨거운데 ‘법적 대응’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조금 지나면 ‘a priori’를 ‘선차적’이라고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학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웃을 수만은 없는 생각도 든다.
 
주로 법원, 검찰을 취재하는 법조 기자들과 수사권 조정에 대한 얘기를 해보면, “검찰도 문제가 많지만 경찰은 더 문제예요. 지금 검찰이 하는 사건들을 경찰에 맡기면 잘 해낼 수 있을까요?”라고들 한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왜 그걸 해내야 할까.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진품인지 여부를 검찰이 아닌 경찰이 가린다고 해서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 왜 우리는 모든 문제를 형사사건화해서 수사기관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다 보니 여론을 통한 공방, 국회의 조사권한 등등이 모두 무력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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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라인에 서고! 검찰에서 10시간이 넘게 조사를 받고! 다섯 시간이 넘게 조서를 읽어보고!(도대체 왜 속기를 하지 않고 내용을 요약한 조서를 만들어서 공방을 벌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해야만 속이 시원한 것이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수사기관이 다루는 문제, 행사하는 권한 자체를 줄여야 한다. 그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당연히 한 기관에게 권한을 몰아주지 말아야 한다. 1차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기관이 행사하게 하고, 현장에서 수사권을 행사하는 기관은 강력한 견제와 감독을 받도록 해야 한다.
 
애초에 검찰개혁이 시대적 과제가 된 것은,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 공수처 설치나 수사권 조정이 등장한 것은 ‘수사의 정치적 중립성’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든 지 검찰이나 경찰을 이용해서 정적을 공격하고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시도를 못 하게 하려는 것이다. ‘정의로운 검사’들을 선발해서 발탁하고 ‘불의한 검사’에게 불이익을 주어서 검찰 조직을 ‘정의로운 조직’으로 만드는 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수사기관이 우리 사회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는 player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게임 자체를 바꾸는 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우리는 MB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검찰의 편향적 수사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의 목록을 만들 수 있다. PD수첩 사건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무역협상을 비판한 언론보도와 먹거리의 안전성을 바라는 국민 여론을 억누르는데 검찰이 동원되었고, 법원은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구체적 보도 내용의 진위를 일일이 따져줬다.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이런 사건들이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게 방지할 수 있을까. 그것을 염두에 두고 검찰 개혁의 방법론을 전개해야 한다. 검찰 특수부가 온전한 상태에서 일반 민생범죄에 대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대폭 줄이면 그런 문제를 막을 수 있을까. 만약 이번에 발표된 정부 안이 이미 법제화가 되어 시행되고 있었다면, MB정부, 박근혜 정부에서 문제가 되었던 정치적으로 편향된 수사가 일어날 수 없었을까.
 
검찰의 직접 수사권 폐지,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 그리고 직접 수사를 담당하는 기관에 대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철저한 견제와 감시가 우리의 전략적 목표에 정확히 들어맞는 대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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