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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6월 11일 11시 48분 KST

여성들이 임신중단약 구하러 네덜란드 비영리단체를 찾고 있다

임신 10주 미만 여성들에게 약을 제공한다.

임신 사실을 안 순간부터 ㄱ씨의 생각은 확고했다. “절대로 안 된다.”

대학생인 ㄱ씨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고, 타국에 사는 남자친구는 학자금을 갚아야 했다. ㄱ씨는 아이를 낳을 형편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임신중절 수술은 원치 않았다. 수소문 끝에 ㄱ씨는 네덜란드의 비영리단체인 ‘위민온웹’(Women on Web)에 도움을 요청했다. 위민온웹은 한국처럼 임신중절이 불법인 나라의 임신 10주 미만 여성들에게 70~90유로(8만~11만원 정도)의 기부금을 받고 임신중절약을 제공하는 단체다.

위민온웹에서 임신중절약을 구하려면 몇가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심리적·신체적으로 약 복용이 적절한지 묻는 25개 문항의 질의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위민온웹 소속 산부인과 의료진은 ㄱ씨의 문진표를 토대로 적정량의 임신중절약을 처방했다.

이메일을 통해 수시로 몸 상태에 대한 상담도 받았다. ㄱ씨는 약이 무사히 도착하는 순간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차라리 불법 수술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자다가 잠에서 깬 적도 있어요”. 2~3주 뒤 알약 형태의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이 한국의 ㄱ씨 집에 도착했다. ㄱ씨가 위민온웹에 공유한 자신의 사연이다.

.관련기사: 이 산부인과 의사는 ”합법적인 ‘임신 중지’가 세계적인 흐름”이라고 말한다(검은 시위 화보)

합법적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길이 없는 한국 여성들에게 네덜란드 비영리단체인 위민온웹이 피난처가 되고 있다. ‘임신중단’을 위해 ‘국경’과 ‘법’의 경계를 넘는 여성이 늘고 있는 것이다. 위민온웹이 한국어 서비스를 시작한 2015년 이후 한국 여성들의 상담이 3년간 4000여건에 달했고, 이 가운데 700여명은 실제 임신중절약을 처방받았다.

위민온웹을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은 ‘안전한 임신중절’에 대한 접근성 향상을 목표로 1999년 설립됐다.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등 인공유산이 불법인 나라의 여성들을 네덜란드 국적의 배에 태워 공해상까지 나간 뒤 약물을 통한 임신중단 시술을 해왔다. 이 단체가 제공하는 임신중절약은 67개 국가에서 판매되고 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 필수의약품에 포함하기도 했다.

최근엔 국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위민온웹의 이용법을 안내하고 후기를 공유하는 계정도 등장했다. 에스엔에스에서 위민온웹을 알리고 있는 ㄴ씨는 “위민온웹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이유로 중절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스텔싱(성관계 중 몰래 콘돔을 제거하는 것) 등 피해자를 도운 적도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위민온웹을 통해 임신중절약을 구입하려면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낙태죄뿐 아니라, 국내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의 안전성 검토를 거친 임신중절약이 없어 위민온웹이 제공하는 임신중절약 복용은 그 자체로 법 위반이 된다.

그러나 임신중절약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분명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8년 낸 ‘임신중단에 관한 여성의 인식과 경험 조사’를 보면, 조사에 참여한 2006명의 여성 중 68.2%가 임신중절약 합법화에 찬성했다. 지난해 9월에는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임신중절약인 ‘미프진’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와 23만명이 동의했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핀란드나 스웨덴에서는 인공유산 중 약물유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90%가 넘었다”며 “안전하게 복용할 수 있는 임신중절약이 있는데도 외과적 수술을 해야 하고, 더구나 불법이라는 꼬리표까지 뒤따라오는 것이 현실”이라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임신중절에 대한 헌재의 위헌 여부 결정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범죄자를 양산하는 법과 현실의 괴리를 메울 기회라고 말한다. 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의 박건 연구위원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임신 9주 이하인 경우 임신중절약이 인공유산의 보편적인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여성들이 좀 더 안전하고 검증된 환경에서 약물을 통한 인공유산을 할 수 있도록 임신중절약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정원 녹색병원 과장(산부인과)은 “홈페이지 노출 폐쇄나 거래 단속과 같은 눈가림으로 임신중절약에 대한 수요를 막을 수 없다”며 “식약처의 관리, 의사의 처방 등을 전제로 임신중절약을 도입하면 안전한 의료 서비스의 선택지를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