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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핵포기 진정성? 단서는 북한 '시장경제'에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불가역적인 시장화'다.

  • 허완
  • 입력 2018.06.05 19:52
ⓒKCNA KCNA / Reuters

″최근 북한의 사회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북한에 2개 당, 즉 노동당과 장마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2016년 4월, 국립외교원장을 지낸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는 ‘체제전환의 기로에 선 북한’이라는 제목의 리포트에 이렇게 적었다. 장마당은 북한에 형성된 시장을 뜻한다. 암시장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규모가 커져버린, 우리가 흔히 아는 시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런 시장이다.

 

북한에는 두 개의 당이 있다 : 노동당, 장마당

윤 교수는 당시 리포트에서 북한의 ‘시장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북한 사회에서 당국의 통제력 약화를 초래 할 수 있는 개방 요인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종합시장이 2009년 200여 개에서 2015년 380여 개로 증가했고, 휴대폰 사용자가 300만 명을 넘어섰다. 또한, 외화벌이를 위한 인력송출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해외파견 근무 경험이 있는 근로자가 20만 명에 달한다. 특히 청소년기에 ‘고난의 행군’을 보낸 330만 명에 달하는 장마당 세대가 20대로서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념 보다 돈벌이를 중시하는 등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다. (체제전환의 기로에 선 북한, ‘IFANS FOCUS’ 2016년 4월7일)

몇 년 전부터 전문가들은 ‘사회주의 배급 체계’로만 북한 경제를 설명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해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북한도 많이 변했다는 얘기다. 

장마당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일례로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의 ‘부동산 시장’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부동산 시장도 크게 확대되고 있다. 북한에서 주택은 사적소유가 인정되지 않고, 더욱이 주택의 매매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기존 주택의 매매는 물론, 아파트의 신축 및 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김정은 시대에는 아파트 붐이 불고 있는데 외관상으로는 국영부문이 중심이 되어 아파트를 짓고 있지만 실제로는 민간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부동산 시장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신규 아파트 건설 붐은 이제 평양뿐 아니라 청진, 혜산, 신의주 등 지방 대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김정은 시대의 시장화 : 평가와 전망, ‘한반도 포커스’ 2017년 가을호)

양 교수는 ”최근 평양 일대에 집중 건설된 미래 과학자 거리, 여명 거리 등 북한판 뉴타운 사업도 상당 정도는 민간자본, 즉 돈주들의 자금에 의해 건설되었고, 결국 그것이 김정은의 업적으로 포장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북한에도 ‘부동산 업자’가 있다는 얘기다.   

또 양 교수에 따르면, 2000년부터 북한에는 민간자본으로 운영되는 시외·시내버스가 대거 등장했고 ”사실상 개인 소유인 택시”의 영업도 크게 늘어났으며 ”세차업, 자동차 수리 및 부품 판매업, 그리고 석유 판매업” 등도 함께 발달하고 있다.  

ⓒAFP Contributor via Getty Images

 

이것은 ‘불가역적인 시장화’다

전문가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의 시장화를 사실상 용인했으며, ‘돈주’라고 불리는 신흥 부유층과 시장을 경제성장에 적극 활용해왔다고 말한다.  

양 교수는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시장화의 가장 큰 특징은 정부가 시장화를 견인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이에 따라 ”시장화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적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지난 4월 매일경제 칼럼에서 ”학생 시절에 배웠던 소련식 레닌주의의 영향을 죽을 때까지 극복하지 못했던 김정일과 다르게, 김정은은 시장 경제의 힘을 잘 이해하고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시장경제 도입이 불러온 국력 증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적었다.

1990년대 자발적으로 생긴 이후 경제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게 된 비공식 시장 경제에 대한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김정일 시대에 ‘돈주‘로 알려진 북한의 신흥 사업가들은 가끔 단속과 진압의 대상이 되었는데, 김정은 집권 이후에는 개인 사업에 대한 단속이 완전히 중지되었다. 북한 정권은 암묵적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돈주들이 국가 기업과 협력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북한 법률에서는 ‘내국인‘, 즉 ‘돈주’의 개인 투자에 대한 언급까지 생겼다. (매일경제 칼럼 4월9일

이같은 전문가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북한의 시장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진행된 상황이다. 이제와서 시장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불가역적인(irreversible) 시장화’라고 할 만하다. 

이같은 변화는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진정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리포트에서 윤 교수는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북한 주민에 대한 정권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북한 정권은 점점 체제 전환의 기로에 설 것이며, 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고 그는 결론 내렸다.

그보다 앞선 2015년 5월, 김태환 국립외교원 교수는 북한의 시장화는 ”체제전환의 첫 번째 단계인 자유화 국면의 경제개혁이 사실상 이미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바로 ‘핵 포기’다. 

북한의 현 자유화 국면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발전 단계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북한의 입장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핵 문제가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현 단계에서 핵과 사실상의 초기 자유화 개혁은 양립할 수 있지만, 외국으로부터의 대규모 자본 유치를 필요로 하는 발전 국면에서는 경제발전과 핵의 양립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탈사회주의 25년의 경험과 북한의 체제전환, 2015년 5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지고 있는 북한의 최근 변화는 2~3년 전에 제기된 이런 예측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KIM WON-JIN via Getty Images

 

‘핵 무력 완성’ 선언은 협상의 시작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3년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천명했다. 경제발전과 핵 개발을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김정은 정권은 두 개의 목표를 어느 정도 꽤 그럴듯 하게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경제발전 분야를 보자. 북한의 경제성장률 수치에 대해서는 분석이 엇갈린다.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5~10%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고, 1%대 수준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 하에서 북한이 ‘적어도 1990년대 같은 극심한 경제난에서는 벗어났다’는 점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시장화를 통한 비공식 경제 부문 활성화, 중국 등과의 대외무역 증가가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다만 북한의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가 꽤 큰 충격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특히 트럼프 정부의 주도로 연달아 도입된 제재는 역대 가장 강력한 수준이었다. 지난해 9월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안(제2375호)은 북한의 수출, 원유 수입, 해외 노동자 파견 제한 등으로 제재대상을 넓혔다. 

핵 개발의 경우, 북한은 지난해에 이미 ‘완성’을 선언했다. 북한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4형 시험발사(7월), 핵탄두 소형화의 ”완전 성공”이었다고 주장한 6차 핵실험(9월)에 이어 화성-15형 ICBM 시험발사(11월)를 끝으로 ”국가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달성했다고 밝힌 것.

기술적으로 ‘완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어쨌든 김정은 정권은 서둘러 핵 개발 완성을 선언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완성된’ 핵무기를 어디에 쓸 것인가? 미국을 공격할 것인가? 아니면 협상용으로 쓸 것인가?

북한의 대답은 분명했다. 북한은 스스로를 ‘핵 보유국’으로 선언한 상태에서 마침내 미국과 협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KCNA KCNA / Reuters

 

‘시장이 무너지면 김정은 정권도 무너진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핵 개발 완성을 선언한 지한 달만인 지난해 12월말, 북한 당국이 평양 외곽에 ‘강남경제개발구’를 조성해 외자를 유치하겠다고 발표한 것.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당시 ”전문가들은 대부분 생뚱맞다고 느꼈다”며 북한의 의도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실은 김정은이 이미 유엔의 대북경제제재를 조기에 풀기 위한 전략으로 조건부 비핵화를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이런 분석에 따르면, 북한의 변화는 꽤 오래 전부터 계획된 일이다. 모두를 놀라게 한 극적인 변화를 이끈 힘 중 하나는 역시 ‘경제’다.

이 전 장관은 ”믿기 어렵겠지만 그(김정은 위원장이)가 갈구하는 것은 북한 경제의 도약”이라며 ”김정은이 핵 포기 대신에 절실히 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의 비핵화 의지는 믿을만하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의 유토피아가 하루 세 끼 ‘인민’이 굶지 않는 정도였다면 그는 비핵화에 응하지 않고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국·베트남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고도성장을 거듭하는 북한 경제를 꿈꾼다. 여기서 다행히 그가 북한이 경제제재에서 벗어나고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정상국가로 거듭나야 이 유토피아를 향한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칼럼 3월25일)

‘탈북자 기자’로 잘 알려진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의 진단도 비슷하다. 그는 최근 칼럼에서 ”지금 김정은에게 어떠한 양보를 해서도 북-미 수교를 이루라고 압박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북한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북미 관계 정상화를 통한 경제 발전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분석했다.

시장에서 돈을 번 ‘신흥 돈주’들은 국영상점을 사들이고, 소기업을 만들어 몸집을 키운다. 이렇게 번 돈으로 각종 공사에 ‘충성의 자금’을 내면 노력영웅 칭호까지 받는다.

김정은이 통치하는 인민은 바로 이런 ‘장마당 인민’이다. 한번 잘살아 본 이들은 다시 허리띠를 조이려 하지 않는다. 시장이 말라 죽는 순간, 김정은의 권위도 함께 죽는다. (동아일보 칼럼 5월30일)

ⓒED JONES via Getty Images

 

물론 경제적 동기 만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핵포기 진정성’을 완전히 입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경제 성장 압박이 그를 비핵화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만들었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 핵을 완전히 포기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럼에도 ‘북한도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꽤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 북한에 대한 익숙한 편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의 협상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일단 북한이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나온 이상 북한의 ‘진정성’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말처럼, ”말이 행동으로 이행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게 바로 외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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