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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쓰고, 화면 안에서 웃었으니 성폭력이 아니라고?

공정하지 않은 계약

  • 백승호
  • 입력 2018.06.02 17:35
  • 수정 2018.06.02 17:36

 

스텔라라는 걸그룹이 있었다. 2011년 알록달록한 원색의 의상을 입고 발랄하고 무난한 사운드의 걸팝을 구사하며 데뷔한 스텔라는 처음엔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다. 3장의 싱글 앨범을 내고도 제대로 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스텔라는, 데뷔 4년차가 되던 2014년 모험을 강행한다. 지상파에선 심의조차 나오기 어려운 수위의 섹시 콘셉트의 의상과 안무로 방향을 선회한 ‘마리오네트’를 들고 나온 것이다. 하이레그 레오타드 의상(몸에 딱 달라붙는 체조복 같은 옷의 다리 옆선을 깊게 판 스타일)과 성교를 암시하는 안무와 오브제로 가득 찬 뮤직비디오만으로도 당혹스러웠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소속사는 페이스북에 ‘오빠, 시키는 대로 다 해줄게―마리오네트’라는 계정을 만들고는 블러 처리가 된 멤버들 티저 사진을 올리며 ‘좋아요’가 눌릴수록 조금씩 블러를 해제한 사진을 업로드하겠다는 천박한 프로모션을 감행했다.

그것이 힐난의 눈빛이든 욕망의 눈빛이든,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던 걸그룹은 하루아침에 모두가 바라보는 걸그룹이 됐고, 멤버들은 극단적인 콘셉트 변화를 적극 변호했다. “‘마리오네트’는 스텔라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고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섹시 콘셉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한번 바꾼 콘셉트를 다시 변경하기란 쉽지 않았다. 콘셉트를 바꾸기 전에는 사람들이 스텔라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예 없었지만, 콘셉트를 바꾸고 나니 사람들이 스텔라에게 기대하는 바가 지나치게 고정되어 버렸다. 섹시 콘셉트를 하니까 비로소 주목하는 이들을 향한 원망을 담은 곡 ‘마스크’는 전작만한 주목을 받지 못했고, 세상의 악플에 시달리는 멤버들의 심경을 담은 잔잔한 노래 ‘멍청이’도 예전만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시 더 자극적인 콘셉트를 시도한 ‘떨려요’는, 곡을 근사하게 잘 만들어 놓고도 지나치게 자극적인 탓에 대중의 외면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텔라는 왜 항의하지 못했나

해체 전 마지막 앨범을 발매하며 한 인터뷰에서, 멤버들은 3년 만에 제대로 된 속내를 털어놓았다. 섹시 콘셉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던 멤버들은, 뮤직비디오의 수위나 프로모션에 사용된 사진을 선택할 때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폭로했다. “콘티에도 ‘연인과 헤어져서 힘들어한다. 우유를 마신다’고 적혀 있었다. 감독이 ‘우유를 흘려보세요’라고 하길래 ‘헤어져서 힘이 없어서 흘리는구나’ 했는데 편집을 한 걸 보며, 그에 대한 반응을 보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리더 가영) “테스트 컷을 보니 너무 야해서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몇 장 찍은 그 테스트 컷이 티저 사진으로 나갔더라. 그때도 상처를 좀 받았다.”(멤버 민희) 뒤늦게 받은 충격과 트라우마로 흰 우유도 먹지 못하게 된 멤버들은, 왜 제대로 된 항의를 하지 못한 걸까? 기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스텔라 멤버들은 ‘그땐 몰랐다. 의견을 내면 안 되는 줄 알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스텔라는 ‘섹시퀸’이고 싶지 않았다’. <티브이데일리>. 2017년 7월12일. 김지하 기자

왜 아니었겠는가. 언론에는 소속사 대표가 자기들 때문에 5년간 10억원을 쓰느라 전세를 빼고 월세로 옮겼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회사가 어려운 건 다 자신들 탓인 것 같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뭐든 참고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그리고 본인들이 충분히 설명받거나 동의한 적 없는 콘셉트의 결과물들이 제 이름을 달고 세간에 풀려버린 이후엔, 이미 벌어진 일이니 더는 어쩔 수 없었다. 위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우유를 마시다가 흘리는 장면을 찍었던 멤버 전율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에는 사람들 만나기가 부끄러웠다. 대화를 하다가도 너무 슬퍼서 울고 그랬다. 일주일 동안은 되게 힘들었다. 그런데 이미 해버린 것을 슬퍼하면 뭐 하냐 싶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수치심과 슬픔에 툭하면 울음이 터져 나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말고는 주어진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뉴스1

 

대중문화산업에서 대상화된 성의 상품화를 어느 선까지 용인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늘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논쟁이 아무리 치열하더라도, 어느 선까지 대상화가 되고 상품화가 될 것인지, 화면 위에 등장하는 피사체 당사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점만큼은 큰 이견이 없었다. 그 선을 넘어가면 그때부터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멤버들의 입으로 열심히 변호되었던 스텔라의 섹시 콘셉트도, 사실은 멤버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회사의 판단만으로 강행된 선택이었다. 멀쩡하게 계약서를 쓰고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도 알고 보면 이와 같은 음습한 뒷얘기가 존재한다. 화면 안에 등장한 이가 방긋방긋 웃고 있다고 해서 그걸 마냥 안심하고 소비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정하지 않은 계약일 뿐

하물며 세상이 다 보는 앞에서 진행된 일도 이럴진대, 무명의 모델을 불러서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비공개 촬영회’라고 공정했을까. 최근 비공개 촬영회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동의 없는 사진 유포를 당했다고 고발한 유튜버 양예원씨를 둘러싼 논란 중 가장 어이가 없는 대목은 “계약서를 쓰고 한 일 아니냐”는 일각의 백래시(반발)다. 사진작가들을 갑으로, 모델을 을로, 거간꾼 노릇을 한 스튜디오를 병으로 놓고는 추후 발생하는 모든 법적 분쟁의 책임에서 스튜디오 병이 쏙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그 불공정 계약서 말인가? 혹자는 계약서 뒷면에 스튜디오 실장이 손글씨로 적은 문구를 근거로 어느 수위까지 노출하고 어떤 의상으로 진행할지도 계약서에 포함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계약서 내에 포함되지도 않고 별지로 첨부되지도 않은 메모를 계약의 일부로 볼 수는 없다. 갑-을-병 사이의 법적인 책무도, 계약이 불공정하게 흘러간다 생각될 경우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안전조항도 없는 A4 용지 한 면짜리 얄팍한 계약서는 빈틈투성이다. 본디 계약에 빈틈이 많으면 돈을 주는 사람이 장난질을 치기 좋은 법이다.

 

 

“그게 그렇게 싫었으면 왜 자기가 먼저 추가로 촬영을 하자고 메신저로 요구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몇 문단을 거슬러 올라가 인용구를 가져오도록 하자. “사람들 만나기가 부끄러웠다. 대화를 하다가도 너무 슬퍼서 울고 그랬다. 일주일 동안은 되게 힘들었다. 그런데 이미 해버린 것을 슬퍼하면 뭐 하냐 싶었다.” 이미 원치 않은 콘셉트의 결과물이 나왔고, 상대는 그 결과물을 손에 쥐고 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자포자기와 생활고가 참혹하게 결합한 메신저 대화 내용을 보면서도 “네가 먼저 하겠다고 해서 한 일이지 않느냐”며 힐난을 택하는 이들은 애써 착취의 구조를 무시하는 중이다. 현직 사진작가 박재현씨가 페이스북을 통해 비공개 촬영회의 실태를 폭로하며 이게 예외적인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양예원씨가 고발한 스튜디오 실장 ㄱ씨가 이미 두차례 비슷한 유형의 범죄 전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경찰 조사 과정에서 피해를 주장하는 이가 6명으로 늘고 입건된 피의자가 5명으로 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의도적으로 ‘구조맹’이 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흙수저 청년이 살아남기 위해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가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조폭 서사는 흔쾌히 소비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모델 일을 섰다가 원치 않게 성추행과 강압촬영을 당한 젊은 여성이 그 피해를 고발하는 건 무고일 것이라 단정짓는 이 선택적 구조맹들의 행렬. 까놓고 얘기하자. 이 모든 게 다 동의를 거쳐 진행되고 있다는 환상이 깨지면 더 이상 속 편하게 성을 소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닌가. 하지만 화면 속 사람이 웃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게 동의를 거쳐 진행되었을 거라고 자신을 속이는 동안, 화면 너머에서 상처받고 고통을 받는 건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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