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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미식가’의 혼밥론 “먹는 재미 자체가 사람을 위로하기도”

일본 기치조지에서 구스미 마사유키를 만났다.

  • 강병진
  • 입력 2018.06.02 17:28
  • 수정 2018.06.02 17:29
ⓒ한겨레

▶만화가 원작인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는 이노가시라 고로라는 중년 남성의 혼밥(혼자 먹는 밥) 이야기다. 주인공 고로가 맛집을 찾아다니고, 메뉴를 고르고, 음식을 먹을 때 내면에서 요동치는 온갖 감정은 독백 형식으로 표현돼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한다. 최근에는 <고독한 미식가>의 제작진이 한국편을 촬영하기 위해 서울과 전주를 방문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한국출장편은 국내에서 오는 7일과 14일 방영된다. 드라마의 원작 만화를 쓴 작가 구스미 마사유키를 그의 작업실이 있는 일본 도쿄도 기치조지에서 만나 <고독한 미식가>와 혼밥, 음식, 맛과 삶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를 하며 주인공인 이노가시라 고로에게 그의 유전자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치조지는 일본 젊은이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중 하나다. 도쿄역에서 제이아르(JR) 동일본철도 주오 쾌속선을 타고 출발하면 정확히 38분 뒤 기치조지역에 도착한다. 역의 남쪽 출구 개찰구로 나와 쇼핑몰을 지나면 나나이바시도리라는 아담한 상점가가 손님을 유혹한다. 소품가게, 카페, 화랑 등을 지나 골목 끝자락에 있는 목재 계단을 내려가면 한가운데 호수를 품은 이노가시라 공원이 기다리고 있다. 오리배들이 잔잔한 호수에 물결을 일으키며 공원을 가로지른다. 공원 호수 가운데 놓인 다리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설립한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 안내 표지판이 붙어 있다.

‘중년 남성’의 혼밥 이야기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은 만화다. 원작 만화의 스토리 작가인 구스미 마사유키는 기치조지 인근에서 나고 기치조지에서 자랐으며, 현재 그의 작업실도 기치조지에 있다. 혼밥을 하나의 장르로 승화시킨 구스미를 지난 29일 기치조지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국에 나타난 고로

 ―‘고로’(<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가 최근 한국에 깜짝 등장해 화제가 됐다.

“마쓰시게(고로 역의 배우 마쓰시게 유타카)가 한국 촬영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볼 줄 몰랐다며 정말 놀랐다고 하더라.”

―당신도 한국에서 촬영한 식당 두 곳을 모두 갔나?

 “나는 서울에 있는 숯불갈빗집 한 곳만 갔다. 맛있었다. 그 식당에서 가장 맛있었던 건 김치였다. 내가 지금까지 먹은 김치 중 가장 맛있었다. 엄청났다. 가게 주인이 담근 지 2년 된 김치라고 했다. 조금 산미가 있었고, 아삭거리는 식감이 살아 있었다. 일본 배추와는 전혀 다른 식감이 느껴졌다. 맛있는 김치를 개발해준 한국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웃음)”

<고독한 미식가> 드라마 제작진은 5월8~11일 한국을 방문해 시즌7의 9화 전주편과 10화 서울편을 촬영했다. 고로는 전북 전주시 평화동의 식당 ‘토방’에서 청국장과 비빔밥을, 서울 보광동의 식당 ‘종점숯불갈비’에서 돼지갈비를 먹는다.

 ―두 식당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고독한 미식가> 제작진은 식당 선정에 상당히 많은 공을 들인다. 어마어마하게 거리를 걷고 찾아 헤맨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제작진의 기준은 이런 것이다. 도심 번화가가 아닐 것, 일본 아사쿠사처럼 예전 느낌이 있을 것, 조금 한적한 곳에 있을 것. 물론 맛집이어야 한다. 이런 분위기는 내 원작 만화에 다 담겨 있다. 화려하지 않고 서민적 분위기다. 제작진은 내 작품 취지에 맞는 식당을 찾으려고 거의 100번 넘게 원작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원작 이미지에 맞는 음식점을 끊임없이 찾고, 먹고 또 먹는다. 나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원작에 가까운 식당을 제작진이 잘 찾는다. 여담이지만 제작진이 식당 섭외하느라 너무 많이 먹다 보니 어떤 제작진은 한 시즌 찍는 동안 15㎏ 살이 찌기도 했다.”

구스미는 <고독한 미식가> 드라마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드라마 매회 마지막에는 구스미가 직접 등장해 음식을 먹는 에필로그 영상이 나온다. 하지만 배우 마쓰시게 유타카와는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평소 고로가 식당에서 식사하는 에피소드 촬영이 끝난 뒤 구스미가 해당 식당을 따로 찾아 ‘한잔 걸치며’ 밥을 먹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 전날 <고독한 미식가> 시즌7 마지막 촬영을 끝냈다. 최종 에피소드에서는 고로와 구스미가 극중에서 만나는 장면이 있어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맛집의 기준은?

“나는 특별히 맛집에 대한 기준은 없다. 어떤 음식 만화를 보면 가장 맛있는 음식 찾는 일을 목적으로 하더라. 나는 맛이 목적은 아니다. 작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식당이 좋다. 한국에서 촬영한 숯불갈빗집도 엄마와 아들이 사이좋게 운영하는 가게였고, 그 아들이 굉장히 어른스러우면서도 순수했다. 그 식당 안에 나름의 드라마가 있어 섭외했다. 좋은 사람, 그리고 재밌는 사람들이 있는 식당, 나는 그런 곳이 좋다. 음식은 맛이 아니라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본다. 한번 가고 나서 다시 가고 싶은 식당이 좋다.”

―맛은 혀로만 느끼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맛은 두번째다. 그 식당에 작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최근 기억에 남을 이야깃거리를 만난 식당이 있다면?

“지금까지 갔던 모든 곳이 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추억들이 다 녹아 있어 하나를 꼽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촬영한 숯불갈빗집도 애초 한국의 한 여성 영화감독의 소개를 받았다. 이 감독이 데리고 있는 영화 제작진이 촬영을 끝내고 쫑파티를 하러 갈 경우 항상 많은 인원이 가기 때문에 사전 예약이 힘들었는데 그 식당은 언제든 반갑게 환영해줬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제작진이 가 본 것이다.”

―한국 촬영에서도 인상 깊은 이야기를 접했나?

“제작진이 처음 갔을 때 어머니와 아들의 인상이 너무 좋았고 음식도 맛있어서 곧바로 결정했다. 그 뒤 촬영을 하러 갔더니 어머니가 사전답사 때는 하지 않았던 보석도 착용하고 화장도 하고 옷도 화려하게 입어서 당황했다고 한다.(웃음) 그래서 평소처럼 하고 촬영하자고 정중히 부탁드렸다고 한다.(웃음) 전주의 식당은 촬영날 갔더니 가게가 아예 간판도 바꿔 달고 집 앞을 깨끗이 꾸몄다고 한다. 수리한 거는 다시 되돌릴 수 없어서 그대로 촬영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예전의 모습들이 더 좋다.”

 

ⓒTVTOKYO

“음식에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구스미는 젊음과 예술의 도시 기치조지에 애정이 가득하다. 그는 마음속에 간직해온 골목골목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구스미는 “나나이바시도리 상점가 바닥이 지금은 시멘트지만 예전엔 흙이었다. 바닥부터 변했다. 골목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옛것이 그리울 때가 많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그런 게 좋다”고 말했다.

 

―기치조지와 어떤 인연이 있나?

“바로 옆 미타카에서 출생했고, 부모님은 아직 그곳에 산다. 미타카는 번화한 도시가 아니다. 어릴 때 친구들과 놀러 가거나 물건을 사려면 기치조지가 가장 가까웠다. 신주쿠, 시부야는 너무 멀었다. 나에겐 놀이터 같은 곳이다. 현재도 기치조지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의 많은 만화 작가들이 이곳에서 작업한다.”

―<고독한 미식가>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의 이름을 이노가시라 공원에서 따온 것인가?

“예전에 살았던 지역이 이노가시라 5번지다. 만화 <고독한 미식가>를 쓸 때 정확히 그 주소에 살았다. 그래서 이노가시라 고로라고 지었다.(웃음) 깊이 생각하고 고민한다고 항상 잘되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곳에서, 쉽게 소재를 찾으려고 한다.”

―항상 이렇게 작명하는 편인가?

“그때그때 영감을 얻어 짓는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일본 사람들도 다 웃는다. 아마 내가 서울에 살았다면 ‘서울 고로’가 되지 않았을까. 또는 ‘명동 고로’?(웃음)”

―식당 선정 등 사전 취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

“인터넷으로 사전에 찾아갈 지역이나 식당 관련 정보를 조사하지 않는다. 엊그제 규슈 북서부에 있는 사가현의 사가시라는 곳에서 머물렀다. 저녁을 먹으러 나갈 때 특별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고 길을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숙소 앞에는 식당이 거의 없었다. 매우 곤란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숙소 뒤쪽으로 나가봤더니 그곳이 예전 사가성의 번화가였던 것이다. 상점가를 찾아 첫번째 식당을 방문하기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목적지 없이 이렇게 곧잘 나간다.”

―고로처럼 결정에 어려움을 겪나?

“(웃음) 비슷하다. 한 식당에서 너무 많이 먹으면 다음 식당에 가기 힘들기 때문에 ‘여기서 더 먹을까, 다른 곳을 갈까’ 상당히 고민하는 편이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전부 검색하고 사전 조사해 식당을 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메뉴가 있는지, 음식평은 어떤지 살펴보고 간다. 머리로 음식을 미리 인식한 뒤 가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쓰지 않는다. 실제 가서 보고, 깊이 생각해보고, 여기가 좋겠다며 매우 떨리는 마음으로 음식점에 들어간다. 자신의 발로, 눈으로, 느낌으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패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맛있다. 지금까지 20~30년 동안 이런 방식으로 취재했다. 그동안의 여러 실패가 도움이 됐다.”

―그동안 당신이 ‘제친’ 노렌(상점의 출입구에 내걸어 놓은 천)은 몇개나 되나?

“(웃음) 나는 사실 항상 맛집을 찾아다니는 미식가는 아니다. 단지 배가 고파 먹으러 간다든지, 만화 마감일이 다가올 때 혼자 식당을 가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이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혼밥의 재미가 주는 위로

―일본 음식문화는 어떤 특징이 있나?

“다른 문화권 음식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고 변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드는 특징이 있다. 일본에서는 인도, 중국, 프랑스, 한국 등의 음식에 그 나라 고유의 맛을 살리면서도 일본적 맛을 가미해 탄생한 요리들이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음식을 맛보려는 일본 사람들의 욕구가 강하다. 한 외국인한테 들은 말이 있다. ‘일본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학생도 숟가락, 젓가락, 나이프, 중국 그릇, 서양 접시 등 여러 나라 음식을 다 먹을 수 있는 식기류가 있었다’고 하더라. 이를 보고 언제든 다양한 문화의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의지의 증표로 읽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음식에 대한 인상은?

“일본은 고깃집에 가면 다른 사이드메뉴 없이 고기만 먹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한국은 삼겹살의 경우 고기와 함께 기타 여러 야채를 같이 먹을 수 있다. 김치, 나물, 상추 등이 메인접시 주변에 있다. 뭔가 여러 음식을 곁들여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삼겹살을 굉장히 좋아한다. 일본에서 삼겹살을 먹으려면 도쿄 중심가에는 가야 한다. 시 외곽에는 거의 없다.”

―삼겹살은, 최근 가격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한국에서 대표적 서민음식으로 꼽힌다.

“그 삼겹살 가게들을 그대로 도쿄로 옮기면 안 되나.(웃음) 부럽다. 일본에서 한국의 삼겹살과 같은 서민음식은 꼬치구이다.”

―또다른 촬영지인 전주는 맛의 고장이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맛집이 많다.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일본 오사카 같은 곳 아닌가. 한국 비빔밥도 좋아한다. 거기에 살짝 청국장을 얹어 비벼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청국장은 낫토와 풍미가 비슷하다. 난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이번 한국 방문 때 땅콩막걸리를 먹었는데,(웃음) 대단하더라. 다만 그 뭔가 가오리를 오래 삭힌 거, 그게 뭐더라?”

―홍어일 거다.

“그거는 톡 쏘는 맛이….(웃음)”

 

<고독한 미식가>는 1994년에 연재를 시작해 1996년에 완결됐지만 정작 10년가량 지나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는 2012년부터 만들어졌다. 1990년대는 일본 사회에서 혼자 외식하는 사람이 적었다. 특히 여자가 혼밥하는 건 굉장히 드물었다고 구스미는 기억한다. 최근에는 여자 혼자 라면이나 덮밥을 먹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고 한다. 혼밥에 대한 인식이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고 구스미는 진단했다.

ⓒ이숲Comics

―1990년대 초는 일본 경제 버블이 꺼질 때다. 혼밥 증가의 배경에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다고 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990년대 초 일본 경제가 나빠질 때 묘하게도 일본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가는 현상이 붐처럼 일어났다. 원래 출판사 편집장은 혼자 맛집을 찾아다니는 여성을 모티브로 작품을 구상해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보다는 서민이 아주 평범한 음식을 찾아다니는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당시엔 ‘맛있는 음식은 비싸야 한다’는 생각들이 강했다. 나는 비싸고 맛있는 식당보다는 10년이 흘러도 2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맛집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고독한 미식가>를 집필했다.”

―고로라는 인물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

“솔직히 나는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나 마음이 전혀 없다. 단지 가난한 사람도 잘사는 사람도, 지옥에 있는 사람도 천당에 있는 사람도 누구나 다 배고픔이라는 공통의 본능을 갖고 있다. 이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재밌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소재화했을 뿐이다.”

―왜 혼밥을 꺼내들었나?

“나는 사실 소식가다. 여러 사람과 같이 먹으면 이것저것 음식을 맛볼 수 있어 그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둘 이상 식사할 때는 상대를 신경 써야 한다. 대화도 하고. 이와 달리 혼밥할 때는 자유롭다.(웃음) 어디를 갈지부터 뭘 먹을지, 옆에 사람들은 어떻게 먹는지 등 여러 생각의 변화들이 춤을 춘다. 내 앞에 놓인 음식 한 접시를 보고 있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이 있지 않나. 이는 정말 재밌는 것이다. 그것을 밖으로 표출해내고 싶었다. <고독한 미식가> 드라마에서 고로가 가게 안에 들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대략 10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 그걸 만들어내기 위한 촬영에는 8시간가량 소요된다. 주인공 고로와 같은 기분을 시청자들이 느끼고 공감할 수 있도록 고로가 느끼는 모든 주변 상황들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고독한 미식가> 드라마에는 고로가 일하다 갑자기 차렷 자세로 허공을 바라보며 “배가 고프다”고 외치는 장면이 매회 반복된다.

“(웃음) 그 순간에 음향 효과는 ‘둥, 둥, 둥’ 이런 소리가 나온다. ‘배가 고프다’는 대사가 매회 들어가지만 별다른 뜻은 없다. 인간이 느끼는 공복감은 역설적이지만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배고프다는 신호체계가 작동한다는 안전감, 그리고 빨리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위기감이다. 그런 본능에 충실한 순간, 인간은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방영 초기 시청자 반응은 어땠나?

“시즌1까지는 인기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래서 심야시간대에 방영됐다. 그런데 시청자들로부터 ‘오감 테러리스트’라는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시청자가 배고픈 시간대에 고로가 음식을 그렇게 먹으니 안 그랬겠나. 그 시간에는 음식점도 거의 문 닫고 배달도 안 될 때다.(웃음)”

ⓒ한겨레

거장 다니구치 지로의 추억

1958년생인 구스미는 1981년 단편만화 <야행>으로 데뷔한 이후, 만화가인 동생 구스미 다쿠야와 함께 작업한 <중학생 일기>로 제45회 문예춘추 만화상을 수상했다. 에세이 작가와 북디자이너, 음악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구스미는 일본 만화계 거장 다니구치 지로와 두 편의 작품을 공동 작업했다. <고독한 미식가>와 <우연한 산보>다. <우연한 산보>는 주인공 우에노하라 조지가 자유롭게 산책하며 겪는 일상의 소소함을 그린 만화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닮았다. 고로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며, 우에노하라는 산책을 하며 일상에서 온전한 자유를 찾는다.

―<우연한 산보>에서 산책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나?

“<우연한 산보>의 원제목은 <산책>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산책에는 세 가지 뜻이 담겨 있다. 만남, 풍경, 자유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지만 ‘우아한 헛걸음’을 통해 전혀 다른 시공을 사는 사람을 만나고, 풍경을 접하다 보면,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우연한 산보>를 취재하며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했다. 첫째, 미리 조사하지 않는다, 둘째 옆길로 샌다, 셋째 일정이나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산책은 의미 없이 걸을 때 깨닫는 즐거움이다. 천천히 걸으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 평소라면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이 우리의 모든 감각으로 들어온다. 그런 작은 소재들을 통해 옛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실제 자주 걷나?

“집이 있는 미타카에서 작업실까지 3㎞ 정도 된다. 매일 그 길을 걸어 다닌다.”

―당신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한참을 고민하다) 재미다, 재미. 그것이 무엇이라도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 결과물을 만화와 음악, 문서로 남기는 작업에 나는 재미를 느낀다. 사람들은 보통 위대하고 감동적이며 슬픈 것들은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반면, 재밌다고 하면 수준이 낮은 것으로 인식한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재미 자체가 인간을 위로하기도 한다. 고로가 식사할 때 재미를 느끼는 것과 같다.”

구스미에게 다니구치 지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존재다. 다니구치는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생활상을 담은 <도련님의 시대>로 1994년 일본만화가협회상 우수상을 받았고, 2011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 훈장을 받는 등 일본의 대표 만화가 중 한명이다. 구스미는 자신이 글과 사진으로 도저히 표현하지 못한 느낌을 그가 한 컷의 만화로 담아냈다고 회상했다. 다니구치는 지난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니구치 지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은 그가 없다.

“(눈을 살며시 감으며) 그렇다. 다니구치와 인연을 맺은 건 출판사 편집장이 내가 쓴 <고독한 미식가> 원고를 다니구치 지로가 그리도록 연결해주면서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그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사람들은 ‘왜 이름도 없는 구스미 같은 사람이랑 일을 하지?’라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다니구치의 그림을 평가한다면?

“음식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면 보통의 만화들은 먹는 대상, 즉 음식에 초점을 맞춰 부각시킨다. 다니구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음식과 함께 그 배경, 풍경, 사람, 가게 등 음식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을 세심하고 평등하게 묘사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를 즐겼고,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그의 그림이 있다면?

“다니구치와의 작업은, 내가 취재한 사진과 원고를 넘기면 그가 만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번은 도심의 밤을 표현하고 싶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내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모습을 카메라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설명하고 찍은 사진 100여장을 넘겼다. 그런데 그가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생각했던 도시의 밤 느낌을 한 컷의 만화로 표현해냈다. 놀라웠다.”

―기억에 남는 그의 말이 있나?

“언젠가 내가 <고독한 미식가> 사진과 원고를 넘겨주러 간 적이 있다. 그때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구스미는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맛있는 거라도 먹지. 나는 매일 여기 앉아서 그림만 그리니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웃음)”

 

ⓒ한겨레

 

“마감 뒤 즐기는 생맥주 딱 한잔이 최고”

―음악밴드 활동도 한다. 스크린톤즈 맞나?

“그렇다. 한국에서 올해 라이브 공연을 할 예정이다. 밴드는 내가 18살 때 결성한 이후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곡도 만들고, 악기 연주(기타, 우쿨렐레)도 한다. 보컬도 맡고 있다. <고독한 미식가> 시즌 한 개당 보통 50곡의 크고 작은 주제곡이 삽입되는데 모두 스크린톤즈의 곡이다.”

―음악할 때와 글을 쓸 때, 언제가 좋은가?

“둘 다 나에겐 즐거움을 주는 소중한 도구다. 차이점은 음악은 청중이 눈앞에 있기 때문에 반응을 곧장 느낄 수 있고, 글은 시간이 조금 걸린다. <고독한 미식가>가 10년 지나 인기를 끌지 않았나.”

―<고독한 미식가> 방송 말미에 항상 식당을 방문해 술(맥주는 보리탄산음료, 사케는 우물물 등으로 표현)을 곁들여 음식을 먹는다. 술을 좋아하나?

”사실 술은 평소에 잘 마시지 않는다. 평상시엔 저녁때도 입에 잘 안 댄다. 술 마실 때는 딱 한 순간이다. 원고 마감 뒤 마시는 생맥주 한잔. 그 딱 한잔까지만 즐겁다.”

―한국에 <고독한 미식가> 마니아들이 많다.

“한국과 일본이 외교적, 정치적으로 좋지 않을 때가 있지 않나. 그런데도 내 작품에 애정을 보내주는 한국 팬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랍고 궁금하기도 하다.”

―당신이 배고픔은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이라고 하지 않았나?

“(웃음) 그렇긴 하다. 어찌됐든 나로서는 매우 감사한 일이다. 서로 밥상을 나누거나 상대의 음식을 먹는다면 불편한 감정들도 조금은 사그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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