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종교가 된 노동이 우리를 배신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에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있다.

일. 현대의 페티시. 예전의 그 어떤 시대에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했던 적은 없었다. 더 많은 일이 끝없이 생기는 게 후대를 위해 좋다고 생각한 세대도 없었다.

경제, 정치, 도덕, 사회적 정체성의 중심에 일이 자리잡고 있다. 일은 신학자 폴 틸리히가 우리 인간이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한 ‘실존적 질문’의 답이자 현대의 종교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시카고 대학교의 전설적 총장 로버트 허친스는 이러한 신앙은 ‘일을 통한 구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16세기의 종교 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다. 막스 베버가 관찰했듯, 종교 개혁은 일 자체를 영적으로 신성한 것으로 취급했다. 신교의 ‘근면한 노동’이라는 윤리는 점차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진화하며, 전통적인 종교적 의미를 잃고 순수히 세속적인 믿음이 되었다. 전통적 종교가 신도를 잃어감에 따라, 일이라는 종교가 불어나 그 틈을 메웠다.

그러나 신앙으로서의 일은 역사적 특정 상황에 기반한 순간적인 현상이다. 일이 영구적인 상수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일이라는 것은 불과 몇 세기 전에 생긴 것이다. 변하지 않는 진실이 아니라 역사가 최근에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의미다.

물론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활동은 근본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 하지만 밭 갈기, 집 짓기, 거래하기 등 특정 형태의 일이 아닌 우리가 생각하는 추상적인 일은 현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수렵-채집 경제에서는 일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었다.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직업, 즉 집에서 나와서 어딘가로 가서 평범한 생활과 분리된 일을 하는 직업은 드물었다. 포부, 성공, 의미, 목적, 정체성은 주로 전통과 신앙에서 찾았다.

산업혁명 이후에야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일이 나타났다. 고용과 급료 등의 현대적 특징으로 정의되는 일이었고, 일과 생활이 분명하게 분리되었다. 이제 그 구분은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일은 역사적으로 볼 때 최근의 사고일 뿐 아니라, 엉성하고 위태롭다. 영구적인 풀타임 완전 고용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일이 생길 거라는 우리의 믿음은 역사상 가장 큰 환상적 유토피아 꿈이라 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본다 해도 전망은 점점 더 암울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모순 위에 서 있다. 순종적인 노동 공급을 위해 일에 대한 선전을 할 필요가 있지만, 이윤 최대화 또한 꾀하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한 더 저렴한 기계로 대체하게 된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가 자동적으로 생길 거라는 보장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컴퓨터, 로봇, 드론, 자동주행 차량 등이 등장하며 애틀랜틱의 표현대로 ‘일 없는 세상’이 찾아올 위협이 커지고 있다. 현재 직업 중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 대다수가 곧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대체될 것이라 예상된다.

게다가 일은 신앙으로서도 우리를 배신하고 있다. 일을 통한 성공의 보장이 과장되었고 공허함을 깨달은 밀레니얼 세대는 직업을 통해 꿈을 실현하겠다는 생각을 점점 더 버리는 추세다. 2014년 해리스 설문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피고용인 중 70% 가까이는 “자신의 일에 깊이 관여하거나 열정적, 혹은 헌신적이지 않다”고 한다.

밀레니얼 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을 삶의 중심에 두고 행복의 주요 원천으로 삼았던 많은 사람들이 상황이 안 좋아지면 승진에 실패하거나, 밀려나거나 해고되는 등 쉽게 내쳐질 수 있음을 깨닫고 ‘일에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돈을 버는 행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충족감을 구하기 시작하고 있다. 자원봉사, 영적 탐구, 인간 관계, 가정이나 지역사회, 사교 및 경제적 교류가 일어나는 클럽 등을 찾는다. 컬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뉴욕 타임스 기고에서 소비지상주의와 소유에서 경험으로 가치가 이동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경험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다고 썼다.

맥킨지의 연구에 따르면 최근 외식과 여행 등 몇 년 간 경험에 대한 소비가 제품에 대한 소비보다 네 배 가까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종교의 몰락이 예상된다는 것은 신도들에겐 끔찍한 일이다. 역사상의 대부분의 인간들과는 달리, 우리 대다수는 일을 넘어선 삶이 있다는 걸 모른다. 우리는 대안을 믿기는 커녕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이고 믿을 수 있는 일의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노동계가 한 세기 동안 점점 더 노동시간을 줄여가기 위해 싸운 역사를 기록하는데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쳤다. 그 싸움에는 월트 위트먼이 ‘고등한 진전’이라고 부른 꿈이 따른다. 경제적 진전이 보다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진전을 불러올 것이라는 확신이 한때 존재했다. 삶에 필수적인 물질적 요소가 갖춰지면 테크놀로지는 점점 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고 더 나은 것들을 추구하게 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가족, 친구, 아름다움, 기쁨, 창조성, 신, 자연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지게 되리라 생각했다.

정부가 그 길을 이끌 것 같지는 않다. 연소득을 보장하거나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이 도입될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 보인다. 더 나은 것들을 찾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생활을 꾸려나가는 게 가능해질 때 스스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삶을 ‘되사들이는’ 선택을 할 확률이 더 커보인다.

노동시간이 점점 더 짧아질 경우 그 결과는 극적일 것이다. 존 라이언 등의 경제학자는 노동시간이 짧아지면 부의 재분배 효과가 있을 것이라 보았다. 자본의 형태로 존재하는 가치가 시간이라는 형태로 보통 사람들에게 다시 흘러갈 것이라는 논리다.

노예 상태로 살며 대부호들의 이윤을 위해 삶을 희생하는 대신, 우리의 삶의 보다 많은 부분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유가 열리면 평등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모두 매일을 살아갈 똑같은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이 아예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예측은 무모하겠지만, 일이 목적 그 자체가 아닌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던 역사적 위치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예상은 합리적이다. 일은 길들여질 수 있다. 일이 삶의 중심이 아닌, 삶의 곁들임에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고등한 진전’이라는 잊혀진 드림이 다시 깨어날지도 모른다.

*허프포스트US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