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18년 05월 29일 20시 24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6월 12일 18시 46분 KST

'북한 비핵화 최대 15년 걸린다'는 보고서에서 알 수 있는 3가지 교훈

비핵화는 '담판승부'가 아니라 기나긴 '과정'이다.

STEPHEN JAFFE via Getty Images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서구 전문가 중 하나로 꼽히는 지그프리드 헤커 스탠포드대 교수가 북한 비핵화 절차는 최대 15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이렇게 어려우니 꿈 깨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과 미국의 견해차를 좁힐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이며 완성도 높은 조언에 가깝다.

또 비핵화가 한 번의 ‘담판‘으로 완성되거나 확정되기 어렵고, 기나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쌓여가는 신뢰로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는 냉정하고도 현실적인 진단이기도 하다.

헤커 교수는 북한 비핵화의 구체적 로드맵이 담긴 보고서(원문)를 28일 공개했다. 같은 대학 국제안보협력센터(CISAC) 소속이자 북한을 30차례 이상 방문했던 로버트 칼린 연구원(전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 담당관), 엘리엇 세르빈 연구원이 공저자로 참여했다.

헤커 교수는 2004년 북한 영변 핵 시설을 처음 방문한 이래 2007년과 2008년, 2010년에도 북한을 방문했다. 특히 그는 미국 과학자들 중 북한 우라늄 농축 시설을 방문한 유일한 인물로 꼽힌다. 농축 우라늄은 핵무기의 연료가 되는 물질이다.

그는 냉전 이후 로스 앨러모스 무기연구소 소장으로서 미국과 러시아의 핵 연구소들 사이에 진행된 장기간의 협력 작업에 관여하기도 했다. 구소련 국가들이 쌓아놓았던 핵물질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임무였다.

그는 보고서 공개 직전 뉴욕타임스(NYT)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 현실적이고도 세밀한 접근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NYT는 ”헤커 박사가 제시한 시간표(time frame)는 애초 미국이 요구했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해서 합의 가능성을 비관할 필요는 없다. (헤커 교수가 보기에는) 자명한 현실을 미국 정부가 충분히 인식하고 여기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오히려 협상이 긍정적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NYT는 헤커 교수팀이 작성한 이 보고서가 몇몇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의원들 사이에서 회람되고 있다고 전했다. 

헤커 교수에 따르면, 북한과 비핵화 협상을 벌이고 있는 미국 정부가 기억해야 할 교훈은 크게 세 가지다.

STR via Getty Images

 

1. ‘리비아 모델’은 터무니 없는 얘기다

미국 쪽에서 나온 가장 ‘과격한’ 비핵화 방식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지난 13일 ABC뉴스 인터뷰에서 북한의 비핵화는 ”(북한의) 모든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 그것들을 해체해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가져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오크리지는 미국이 핵물질 관련 장비를 보관하는 곳이다. 리비아가 포기한 핵무기가 이동된 장소로 알려져있는 곳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볼턴 보좌관은 리비아를 북한 비핵화의 ‘롤모델’로 꼽아왔다. 

그러나 헤커 교수는 ”북한의 핵무기를 나라 바깥으로 꺼내오자는 제안은 나이브하고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핵 프로그램의 스케일은 (리비아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리비아는 핵무기 (완성에) 가까이 간 적이 없다. 북한은 위협적인 핵무기와 거대한 집합체(complex)를 가지고 있다.”

그가 말한 ‘거대한 집합체’는 문자 그대로 거대하다. 연구팀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8개 카테고리와 23개 하위그룹으로 나눴다. 그 내용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핵무기 : 핵무기

② 인력 : 과학자, 엔지니어

③ 핵 실험 : 핵실험, 갱도, 실험 인프라스트럭처

④ 미사일 실험 : IRBM(중거리탄도미사일) &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 고체로켓모터, 새 엔진 실험, 중단거리 미사일, 위성발사체

⑤ 플라토늄 : 재고, 5메가와트(5MWe) 원자로, 실험용 경수로(ELWR), 소형 원자로(IRT-2000), 재처리 시설, 금속연료 제조 시설

⑥ 핵융합(수소폭탄) 연료 : 삼중수소(Tritium), 리튬-6

⑦ 우라늄 농축 : 고농축 우라늄(HEU) 재고, 영변 원심분리기 시설, 비밀 원심분리기 시설

⑧ 수출 금지 : 핵 & 미사일 기술

이 모든 걸 ‘한 번에’ 해체하고 제거해서 들고 나오자? 헤커 교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가 ‘리비아 모델’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이게 기본적으로 항복 요구나 다름 없다는 것.

‘리비아 모델’을 따라 모든 걸 먼저, 단 번에 없애버리라는 즉각적인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요구하는 것은 북한으로서는 항복 시나리오나 마찬가지다. 김정은이 리비아 모델에 동의할 것이라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렵다.

CISAC/Stanford

 

2. 비핵화는 ‘단계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 비핵화는 단계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게 헤커 교수의 결론이다. 그는 ”미국은 핵실험장 폐쇄처럼 김정은이 일찌감치 양보할 의지가 있는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지만 단계적 접근법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가 말하는 단계적 접근법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중단(1년 이내), 되돌리기(2~5년), 제거 또는 한도 설정(6~10년)으로 각각 이어지는 단계다. 그는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이 기간이 짧아질수도, 길어질수도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15년까지도 걸릴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단계적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의 세부 항목에 따른 위험 관리가 필요하다고 그는 분석했다. ▲ 가장 위협적이어서 시급한 조치가 필요한 부분 ▲ 관리 가능한 수준의 위협이거나 평화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을 각각 산정한 뒤 서로 다른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는 것. 즉, ‘한꺼번에 몽땅 다 내놔라’가 아니라는 얘기다.

일례로 그는 위협 수준이 높고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북한의 핵 프로그램으로 핵무기와 IRBM, ICBM, SLBM, 5메가와트 원자로, 삼중수소, 수출 금지 등을 꼽았다. 그러나 과학자와 엔지니어, 소형 원자로, 영변 원심분리기 시설 등은 관리 가능한 수준의 위협이라고 판단했다. 

또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이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가입은 핵무기 제거와 핵실험 금지 같은 선행 조치가 마무리 된 이후의 장기적 과제로 설정해도 된다고 헤커 교수는 진단했다. 

그러면서 헤커 교수는 북한이 한꺼번에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이를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그것 봐라! 역시나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섣불리 단정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

그는 오히려 단계적 접근법이 비핵화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기나긴 여정에서 차근차근 서로 신뢰를 쌓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탁월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 단기적으로 북한은 핵 프로그램 일부를 유지함으로써 (비핵화 합의에 따르는) 위험을 줄이려 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노란색 영역의 위험은 관리가능하며, 이는 빨강색으로 표시된 가장 즉각적이고 긴급한 위험들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단계적 접근법은 북한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비군사화(demilitarization)라는 실행 가능한 장기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꼭 필요한 신뢰와 상호의존성을 구축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 만약 북한이 민간 핵 프로그램과 평화적 우주 접근권을 유지하겠다고 한다면, 이로 인해 초래되는 증가하는 위험은 적절한 검증 방법이 개발될 수 있다면 관리될 수 있다. 전기를 생산하는 경수로가 잠재적으로는 플라토늄 생산에 쓰일 수 있고 의학적 용도의 동의원소 연구용 원자로도 똑같이 쓰일 수 있지만, 이 위험은 관리가능하다. 그 위험들은 북한의 현재 플라토늄 생산 원자로보다는 낮다. 위성 발사체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검증 프로토콜에 따르는 한, 이런 것들이 북한의 ICBM 프로그램을 현재와 같은 수준의 미사일 발전으로까지 진전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Damir Sagolj / Reuters

 

또 그는 민간 분야의 핵 프로그램이나 평화적 우주개발을 북한에 허용하면 핵·미사일 전문가들의 재배치 문제도 해소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헤커 교수는 NYT에 ”그들이 모든 걸 제거하지는 않을 것이며, 몇 가지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몇몇 위험은 관리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미국이 북한 민간 분야의 핵·우주 프로그램을 북한의 ‘속임수’로만 간주해왔던 게 거꾸로 문제를 키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 북한 문제를 다뤄왔던 우리의 경험은 민간 핵 프로그램과 평화적 우주(개발) 프로그램을 유지하는 게 북한에게는 기술적이고 상징적 이유들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쳐줬다. 지난 17년 동안, 미국은 그와 같은 민간 활동을 군사적 야망을 감추려는 것으로 간주하고 계속해서 이를 거부해왔다. 그와 같은 활동들이 북한의 군사적 프로그램을 지원할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험 관리가 아니라 이런 식의 위험 회피는 군사적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거나 되돌릴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를 놓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처음으로 ‘단계적 접근’ 가능성을 시사한 건 일단 긍정적인 신호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최근 군사·민간 핵 활동을 구분하는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간격 절충”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Reuters Photographer / Reuters

 

3. 북-미 관계 정상화가 핵심이다 

그렇다면 최장 15년이나 소요되는 비핵화 절차를 밟아나가는 동안,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헤커 교수가 또다른 발상의 전환을 주문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는 NYT에 ”우리는 수십개의 장소들, 수백개의 건물들, 수천명의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집합체를 해체하는 핵심은 ”북한의 안전이 핵무기가 아닌 다른 것에 바탕을 두는 다른 관계를 북한과 맺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여기에 제안된 접근법은 체제 안전이 보장되기 전까지는 북한이 (핵)무기와 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 보장은 미국의 약속이나 서류 상 합의로 간단히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상당한 기간 동안의 공존과 상호의존성을 필요로 한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비핵화가 단기간에 달성될 수 없다면, 그 기나긴 기간 동안 북미 관계 정상화는 필수적이다. 서로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긴밀히 협력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미국이 앞으로 맺어야 할 ‘다른 관계’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평화협정이 될수도 있고, 북미 수교로 이어지는 외교 관계 복원일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생각보다 꽤 만만치 않은 일이다. 곳곳에 장애물이 있고, 곳곳에 반대 세력이 있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여전히 북한을 믿지 못하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 미국 내 보수·매파나 트럼프 대통령의 ‘성과’를 탐탁치 않게 여길지 모르는 미국 내 진보진영의 반대를 모두 넘어서야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입장에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군부의 반발을 억제해야 하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뒤따르는 개방으로 북한 주민들의 ‘충성심’이 약해질 위험을 관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비핵화 달성을 위해서는 북미관계가 ”공존과 상호의존”에 바탕을 둔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헤커 교수의 진단이다. 그런 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북한 비핵화는 그만큼 거대한 전환이며, 그에 상응하는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한편 NYT 보도 이후 과학국제연구소(ISIS)는 북한이 비핵화 조치에 적극 협력할 경우 핵심적인 핵 프로그램 폐기는 짧으면 약 2년 만에 이뤄질 수 있다며 헤커 교수가 제시한 시간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ISIS는 ”우리의 진단은 다른 국가들의 검증된 폐기 사례에 기초하고 있다”며 ”북한이 비핵화에 동의하고 전적으로 협조한다면 - 큰 가정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 북한 핵 프로그램의 핵심 부분에 대한 검증된 해체는 동시에 이뤄질 수 있으며 최소 약 2년 내에 완결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 업데이트 : 2018년 5월30일 : 과학국제연구소(ISIS) 반박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