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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첫술' 표현에는 절묘한 노림수가 있다

ⓒhuffpost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발표에 따른 북한의 대응이 생각보다 차분하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김계관 명의의 성명 중에 내 눈길을 끄는 표현이 있다.

“만나서 첫술에 배가 부를 리는 없겠지만 한가지씩이라도 단계별로 해결해 나간다면 지금보다 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기야 하겠는가 하는 것쯤은 미국도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언론들은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다는 표현에만 의미를 두고 있는데, 나는 위의 문장에 북한의 절묘한 노림수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첫술에 배가 부를 리 없다는 남북에 공히 익숙한 관용적 표현을 들어서 미국이 주장해온 일괄 타결, CVID 방식의 핵폐기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음을 다시 한 번 천명한 것이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언제고 회담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유화 메시지를 보내면서 심중에는 미국이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들의 원칙을 다시금 재무장한 것이다. 미국이 이 표현의 저의를 온전히 해석한다면 북미 정상회담의 재논의는 쉽지 않을 것이다.

ⓒDamir Sagolj / Reuters

내 생각에는 사실 북한도 미국도 정상회담이 물 건너가도 손해 볼 일이 별로 없다. 트럼프는 이미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큼 받았고, 관종으로서의 욕망도 충분히 해소했다. 세계에 대고 서방세계를 대표해서 북핵 폐기를 위해 성심껏 노력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면서 미국 내 강경파와 군산복합 이해당사자들의 요구에도 확실히 부응했다. 북한 역시 북미 정상회담 카드를 흘려서 중국을 교란시켜 마음을 얻어냈고, 미국을 상대로 꿀리지 않는 대응을 해서 북한 인민을 다잡는 데에도 성공했다. 판문점에 다녀감으로써 한국에도 많은 팬을 만들었다. 물러설 곳이 없는 북미 정상회담을 굳이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트럼프를 욕하든 김정은을 욕하든 그건 자유지만 그들은 X새끼가 아니다. 시진핑이나 아베도 X새끼가 아니다. 그들 모두 자국 중심의 이기주의에 충실한 지극히 정상적인 최고권력자들일 뿐이다. 분노하기보다는 한국 정부나 우리 국민이 저들이(특히 미국이) 대국이고 힘이 있는 나라들이니까 건설적인 차원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도와줄 거라고 일방적으로 믿었던 건 아닌지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이다. 대체 어느 나라가 신자유주의의 무한 체제 경쟁 속에서 자국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다른 나라의 이익을 돕겠는가. 오판을 해서 국익을 깎아먹을 수는 있겠지만 손해가 있을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국가나 정부는 없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건 개인들(민간) 사이에서만 드물게 일어나는 미담이다. 우리는 트럼프나 김정은을 현실 속의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의 이상 속에서 리모델링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중요한 게 자주와 자력이다. 남이 해주지 않으면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이 답답한 체제의 뿌리부터 다시금 돌아봐야 한다.

문재인은 그동안 고생한 참모들이랑 불금인 오늘 막걸리 회식이나 하면서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일단 트럼프니 김정은이니 하는 자들의 얼굴을 지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주국방, 안보, 경제선진화의 길을 걷는 거다.

*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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