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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성폭력' 당한 한 모델이 당시 경험을 털어놨다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5월21일 만난 ㄱ씨는 경찰과 검찰에서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과정이 너무도 힘들어 “이제는 지쳤다”고 밝혔다.
5월21일 만난 ㄱ씨는 경찰과 검찰에서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과정이 너무도 힘들어 “이제는 지쳤다”고 밝혔다. ⓒHuffpost Korea / 윤인경

ㄱ씨는 2016년 2월 사진작가 ㄴ씨와 술을 마시던 중 모델 권유를 받았습니다. 당시 ㄱ씨는 24살이었습니다. 친구로부터 ㄴ씨가 회원 수 4만명이 넘는 한 사진 동호회에서 소위 ‘네임드’로 활동하는 작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ㄱ씨 친구 가운데 한 명도 과거 ㄴ씨와 촬영을 한 경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심했습니다.

피팅 모델을 꿈꿔온 ㄱ씨는 예쁜 옷을 입고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말에 흥미가 돋았습니다. 그래서 ㄴ씨가 말한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로 향했습니다. 최근에는 많은 피팅 모델 지망생이 자신의 사진을 인스타그램 등에 노출해 꿈을 이루기도 합니다. 속옷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해 란제리 촬영으로 합의했고, 의상을 가져오라는 말에 원래 그렇게 하는 건 줄 알고 자신의 속옷도 챙겨 갔습니다.

그러나 작업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ㄱ씨의 주장에 따르면, ㄴ씨는 속옷까지 벗는 노출 촬영을 요구했습니다. 이어서 입맞춤을 요구하고 침대에 함께 누워 ㄱ씨의 가슴을 만지기도 했습니다. 상업적 노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무보수 합의 촬영’의 경우 사진가는 모델료 대신 사진을 제공하는 게 관행입니다. ㄴ씨는 ㄱ씨에게 입맞춤을 하고 브래지어를 벗을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사진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ㄱ씨는 다른 생각보다 둘밖에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성급히 촬영을 마쳤다고 합니다.

ㄴ씨는 이날을 다르게 기억합니다. ㄴ씨는 한겨레와 만나 “강압적으로 몰아붙인 적이 없다”며 “여러 차례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속옷만 입고 있어 사실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속옷까지 벗으라는 요구가 강압으로 받아들여지기 충분하지 않으냐”는 한겨레의 질문에 ㄴ씨는 “당시에는 모델이 ‘란제리 사진까지 찍었는데 누드 사진도 하나 갖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봤고, 그런 의사가 있는지 물어본 것”이라는 답을 내놨습니다.

특히 ㄴ씨는 ㄱ씨와 촬영 이후 사진 공유에 대해 일상적으로 나눈 대화를 갈무리한 화면을 보여주며 “강압이 있었다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ㄱ씨는 ㄴ씨의 이 말을 듣고 “치가 떨린다”며 “촬영이 끝나고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던 느낌을 기억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은 ㄴ씨가 활동하던 사진 동호회 안에서 입에서 입으로 퍼졌습니다. ㄴ씨는 요주의 사진가를 모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2016년 3월께 동호회에서 퇴출당했습니다. 그러나 ㄱ씨의 사진은 ㄴ씨의 하드디스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ㄱ씨에게 모델 요청이 쏟아진 것은 그 이후입니다. 알음알음 ㄱ씨의 존재를 알게 된 사진가들로부터 함께 촬영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두번째 사건의 가해자 ㄷ씨 역시 그중 한 명입니다. ㄷ씨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자신이 그동안 찍은 노출이 적은 사진들을 보내주면서 “개인 스튜디오에 수백벌의 옷이 있다”며 ㄱ씨에게 촬영을 제안했습니다. 이번에는 모델료를 주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ㄱ씨는 첫 촬영의 악몽을 잊고 싶었음에도 다시 한번 촬영에 응했습니다. 비슷한 촬영을 했던 친구들의 무난했던 경험담이 있었고, 다시 ㄴ씨의 성추행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ㄱ씨의 기대는 또다시 무너졌습니다. 2016년 3월께 서울 지하철 합정역 인근에서 ㄱ씨를 만난 ㄷ씨는 ㄱ씨를 차량에 태웠습니다. 곧 망원동의 한 허름한 건물로 데리고 간 뒤 ㄱ씨를 앞장세워 깊숙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습한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찔렀고, 덧문과 현관을 지나자 두려움이 커졌습니다. 지하 촬영장에는 욕조가 있었고, 한쪽에는 침대가 있었습니다.

일단 원피스를 입고 촬영을 시작했으나 옷을 갈아입을수록 점점 노출 수위가 높아졌습니다. ㄱ씨의 눈에 40대의 건장한 남성으로 보인 ㄷ씨는 ㄱ씨를 설득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벗으라”고 명령할 뿐이었습니다. 현관문은 멀었고, ㄱ씨의 머릿속에는 “여기서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면 ㄷ씨는 “욕조에 볼일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ㄷ씨의 태도가 ㄱ씨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습니다.

ㄷ씨는 ㄱ씨에게 급기야 생크림케이크와 성기구 등을 소품으로 들이밀었습니다. ㄱ씨는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ㄱ씨는 “거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성기구를 사용한 촬영을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더니 사진작가가 짜증을 냈기 때문”이라며 “(협의했던 모델료) 15만원을 안 줄 테니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고 밝혔습니다.

ㄱ씨는 촬영이 끝난 뒤 이 강제 촬영에 대해 페이스북에 폭로 글을 올렸습니다. 이후 ㄷ씨 역시 아마추어 모델들을 상대로 비슷한 강제 촬영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진 동호회에서 퇴출당했습니다. ㄷ씨는 이후 연락처도 바꿨습니다. 당시 ㄱ씨의 피해 사실을 전해 듣고 ㄷ씨에게 ‘원본을 지우라’고 대신 요구한 한 유명 사진가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당시 양쪽의 얘기를 다 들어봤는데,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며 “ㄷ씨에게 사진을 지우라고 하니 내게도 처음에는 ‘지울 수 없다’고 버텼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ㄷ씨가 “ㄱ씨의 나체를 찍은 사진은 지우겠다”고 말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ㄱ씨의 첫번째 피해 사례는 지금까지 문제로 대두한 ‘비밀 촬영회’나 직업 모델 성추행 사건과는 결이 다소 다른 ‘무보수 촬영’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행태입니다. 몇몇 사진 동호회에서는 모델과 사진가, 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이 모여 ‘무보수 촬영’을 진행합니다. 이해관계가 맞는 아마추어들끼리 보수를 받지 않고 비상업적인 사진 작품을 완성해 포트폴리오로 공유하는 작업입니다.

선의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면, 작업에 참여한 사람인 모델과 사진가, 메이크업 아티스트 모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작업에 참여하는 모델 중에는 스튜디오에서 예쁜 사진을 찍어보고 싶은 일반인도 있고, 피팅 모델 지망생도 있습니다. 문제가 된 가해자들은 사진 동호회에 둥지를 틀고 중심과 주변부를 어슬렁거리며 취약한 대상을 물색합니다.

ㄱ씨가 피해를 봤을 당시 이 사진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한 회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페이스북 게시물 등을 보고 모델들이 어느 정도의 욕망을 가졌는지 살핀다”며 “취약한 상태의 회원, 주로 20대 초반 초짜 모델 지망생에게 예쁜 사진을 보여주며 접근해 촬영 도중 계속해서 칭찬하며 노출을 유도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동안 이 동호회 안팎에서 미성년자를 모텔로 끌어들이고 부적절한 접촉을 시도한 사진가, “딸 같다”며 드레스를 직접 벗기고 입혀준 사진가, 추운 겨울에 모델에게 란제리 의상을 입히고 강남대로에서 촬영하게 한 사진가 등이 퇴출당했습니다. 이는 그나마 사진 동호회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퇴출이라는 내부 제재를 통한 자정 노력이라도 기울일 수 있었던 경우인지도 모릅니다.

한겨레가 ㄱ씨와 만나 “왜 두 사람을 고소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ㄱ씨는 “사진 속의 제가 웃고 있잖아요”라고 답했습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등을 통해 조언을 구해봤으나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촬영에 동의한 것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겁니다.

이 사진 동호회의 한 운영진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여성 피해자들이 신고하지 않는 이유는 신분이 노출되기 때문”이라며 “지망생의 경우 모델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사라질까 걱정한다. 지금까지의 경우를 보면 이런 사진가들은 서로 연대를 구성해 피해자에게 꽃뱀의 프레임을 씌우고 작업을 하지 못하도록 정보를 공유한다”고 밝혔습니다.

ㄱ씨는 지난 1년10개월 동안 10여 차례 촬영을 진행하면서 보수를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앞선 두 사례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체 촬영을 하는 등 착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벌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ㄱ씨의 나체 사진은 적어도 두 명의 사진가가 자신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싸워볼 여지는 있습니다. 여성 인권 영역을 주로 다루는 김재련 변호사는 “형사로 가면 혐의 입증이 힘들지 모르지만, 민사로 배상을 받거나 유포를 막을 수는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 변호사는 “가해자는 합의했다고 주장하지만, 피해자는 이 촬영이 앞으로 불러올 또 다른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피해자들이 적어도 원본을 자신이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진가가 허락 없이 이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 쌍방간 구두 계약의 내용이 달랐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 변호사는 또한 “가해자들은 합의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합의라는 게 두려움이나 외부적인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성립하는 것”이라며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는 형식적으로는 합의로 보일 수 있으나 실질적 합의로 볼 수는 없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실질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김 변호사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합의를 무효화할 수 있다면 원본 사진에 대한 소유권이나 유포권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로 인해 생긴 정신적 피해를 배상받을 수 있으며, 유포하지 말라는 내용의 유포 금지 혹은 삭제 가처분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한겨레가 만나본 피해자 ㄱ씨는 이미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수개월째 안정제와 수면제에 기대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지난한 법적 절차를 밟을 정도의 여력이 쉽게 생길 것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또 다른 성추행 사건을 다투고 사진 촬영 사건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 경찰서와 검찰청 그리고 법률구조공단을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더는 다투고 싶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제도적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막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 변호사는 “이번 사태로 인해 사진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진가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도 “동호회 차원에서 원본 사진에 대한 권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의 조항, 촬영 현장에서 동성 입회인을 반드시 참석하게 하거나 노출 수위를 명시화하는 조항을 넣은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공시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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