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LG그룹은 '재벌가'보다는 '양반가'를 닮았다

딸 대신 양자가 경영권을 승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 백승호
  • 입력 2018.05.21 17:01
  • 수정 2018.05.21 17:18

‘착한 기업’으로 알려진 LG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지난 20일 별세하면서 1995년부터 23년간 이어진 LG의 3세 경영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려고 구광모 상무의 ‘4세 경영’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Sergio Perez / Reuters

 

LG그룹은 각종 ‘미담‘으로 유명하다. LG의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이 독립운동에 자금을 댔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2015년 비무장지대(DMZ) 지뢰 폭발로 큰 부상을 당한 두 군인에 대한 보상 문제로 잡음이 일자 두 군인에게 각각 5억원씩을 지원한 것도 LG였다. 가장 최근에는 ‘고의 충돌’로 대참사 막은 투스카니 의인, 한영탁 씨에게 LG 의인상을 수여하겠다고도 밝혔다.

폭력과 폭언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한진그룹 일가와는 다르게 LG그룹사를 4대째 경영하고 있는 구씨 일가에 대한 주변의 이야기는 호평이 가득하다. 구회장의 측근과 지인들은 ‘구본무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공통적으로 소탈함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배려를 꼽았다.

″외부행사가 끝난 뒤에는 수행원이 있는데도 운전기사에 직접 전화를 건다”

″행사장 앞이 복잡하면 차를 멀찌감치 대라고 한 뒤 수백미터를 손수 걸어가 탄다”

″옷도 평범하게 입고 다녀, 사람들이 못 알아볼 때가 많다. 정말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

LG그룹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지난 2005년에 이뤄진 LG그룹과 GS그룹의 분리과정이다. LG그룹은 현 LG그룹의 창업주 연암 구인회, 그리고 구인회와 사돈 관계였던 현 GS그룹의 창업주 허만정의 동업으로 시작됐다. 2005년 그룹사 분리를 결정하면서 GS칼텍스, GS건설, GS홈쇼핑, GS리테일 등 현금 수입이 많은 사업은 허씨 일가에 이전되었다. 당시 경영권 분리가 허씨 일가에 더 유리하게 정해진 것 아니냐는 의문에 대해 구 회장은 ‘조금 더 가진 사람이 양보하면 타협이 된다’는 말을 강조했다고도 한다.

최근 별세한 구본무 회장은 1995년 취임 당시 ‘정도경영’을 선언했다. 윤리경영을 기반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기업이 되자는 취지였다. 내부에서는 “실적을 올리려면 정도경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우려도 나왔지만 구 회장은“편법·불법을 해야 1등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1등을 안하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LG그룹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겼던 구본무 회장의 뒤를 현 LG전자 구광모 상무가 이어받게 되었다. 그런데 구광모 상무는 구본무 회장의 친자가 아니다. 그는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이다. 1994년 구본무 회장은 사고로 외아들을 잃게 되자 구본무 회장이 2004년 구광모를 양자로 입적했다. 그 뒤 구광모는 LG그룹의 4세 승계 대상이 되었다.

구본무 회장에겐 구연경 구연수 두 딸이 있다. 그런데 왜 구 회장은 두 딸이 아닌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해 경영권을 물려준 걸까? 여기에는 LG가 특유의 ‘양반가’ 가풍이 있다.

‘독립운동’에 몰래 동참한 명문가 출신 사업가

LG그룹의 창업주, 구인회는 이름난 명문 양반가 출신이다. 구인회의 할아버지 구연호는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해 홍문관의 교리,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했던 조선 시대 고위 공직자였다. 9대조 구음은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했고 8대조 구문유는 고령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구인회의 어린 시절, 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주권을 침탈당했다. 그리고 1919년 구인회는 할아버지가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모진 수모를 겪는 상황을 지켜본다.

일제에 침략 당한 암울한 상황을 지켜보던 구인회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는다. 당시 지역에서 일본인이 잡화류와 문구, 석유 등을 팔아 큰돈을 버는 것을 보고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일본인이 독점해 큰 부를 올린다니 안 될 말이다. 우리 몸에 닿는 물건은 우리 손으로 사고팔도록 하자”는 신념으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 지수협동조합을 세우고 싼값에 석유, 비누, 광목을 팔았다. 

1931년, 구인회는 본격적으로 장사의 길에 접어들었다. 자기 이름을 따 ‘구인회 상점’을 열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중시하던 집안 어른들은 반대도 있었지만 구인회는 세상이 바뀌었다며 자신의 고집을 밀고 나갔다. 구인회 상회는 차근차근 성장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몸소 느꼈던 그였기에 이시기에 몰래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대기도 하였다.

구인회는 1953년에 락희산업주식회사를 시작으로 국내 최초 전자회사인 1959년 금성사를 창업하는 등 차례차례 여러 사업에 손을 뻗쳤고 이게 오늘날의 LG에 이르게 된다.

LG가 지켜온 전통, 그리고 직면한 한계

“LG그룹은 철저한 유교적 가풍을 토대로 후계 경영인들을 교육하고 있으며, 장자가 경영권을 승계하면 형제들이 물러나는 원칙을 오랜 기간 지켜오고 있다”

이번 LG그룹의 경영 승계에 대해 언론 등이 내놓은 분석이다. 세간의 평처럼 LG그룹은 보통의 재벌과는 다른 원칙과 전통을 지켜오고 있으며 그 원칙이 후세에 이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

 

(왼쪽부터) 구본무 LG 회장, 구본준 부회장, 구광모 상무
(왼쪽부터) 구본무 LG 회장, 구본준 부회장, 구광모 상무

 

5대 그룹의 총수 중에서 사법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구본무 회장이 유일했다.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경영승계에 관한 잡음이 거의 없고 그룹 일가가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었던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편법이나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소위 ‘체면 떨어지는 짓‘을 하지 않는 LG는 보통의 ‘재벌가‘보다는 전통의 ‘양반가’를 닮았다. 

하지만 이런 전통이 마냥 달가운 것은 아니다. ‘장자 상속’의 원칙에 따라 두 딸이 경영 승계에서 처음부터 배제된 것, 여성들이 경영 일선에 나서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과거와는 달라진 세상에서 LG가 고민해야 할 새로운 과제로 보인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본무 #LG #구광모 #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