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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서 나의 직장 생활은 달라졌다

'사람 참 별것 아니구나'

ⓒhuffpost

직장 생활 3년 만에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았을 때, 가장 기뻤던 점 중 하나는 언제든 퇴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였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러지도 않았고. 당시 다니던 회사의 근무 환경은 굉장히 만족스러웠으므로 누가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단지 좀 더 홀가분해졌을 뿐이었다. 회사와 잘 맞지 않을 때나 조직에서 내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을때, 혹은 정말 쉬고 싶을 때 퇴사라는 최후의 선택을 할 자유를 얻었다는 것에.

처음 대출을 받던 날 웹사이트에서 본 화면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거치 기간 5년에 상환기간 5년. 상환 일정표에는 10년 간 내가 내야 할 이자와 원금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남은 학기가 거듭될수록 그 금액은 계속 불어날 터였다. 시중 은행 대출에 비해 훨씬 좋은 조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내 윗세대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alexialex via Getty Images

 

다만……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앞으로 10년 간 내가 저 돈을 갚아 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엄마 아빠가 10년 넘게 빚에 시달리는 걸 봐 왔으면서도, 나는 그제야 빚을 진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실감했다.

누군가 내 뒤에서 10년짜리 타이머를 누른 것 같았다. 생활비는 줄일 수 있었지만 상환금은 내가 멋대로 줄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바를 하든, 취직을 하든 항상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했다. 취업이 늦어지고 원금 상환 기간이 다가오면서부터 부담감은 더 정교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한 옮겨 갈 곳을 정하기 전까지는 그만둘 수 없다는 압박감에 짓눌리자 아주 일상적인 스트레스도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더 비굴해지고 소심해졌다. 지옥이라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도망칠 수 없다는 생각이 지옥을 만든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렇기에 ‘상환율 100%’가 찍힌 화면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였다. 힘들면 잠시 쉬어갈 수 있다는 선택지는 그 틈으로 새어드는 빛이었고, 그 빛을 받은 나는 비로소 언제든 퇴사할 수 있는 몸으로 거듭난 셈이었다.

 

ⓒYaorusheng via Getty Images

 

우습게도 그 후 내 직장 생활은 훨씬 활기차졌다. 좀 더 과감하게 제안했고 때로는 다른 일을 벌이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었으므로,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훨씬 가볍게 털어 낼 수 있었다.

사람 참, 아니 나는 참 별것 아니구나. 쓰게 웃다가 결혼한 친구들이 신혼집을 20년 대출로 구했다느니 30년 대출로 구했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문득 다시 암담해진다. 겨우 10년짜리 빚에도 이토록 쪼그라드는 보잘것없는 내가, 과연 30년짜리 빚에 주눅 들지 않고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까. 아니면 다들 티를 내지 않을 뿐, 원래 모든 어른들이 다 그렇게 사는 걸까.

내가 많은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자였으면 좋겠다. 나만 못나서 그런 생각을 해 온 거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다들 무서운 걸, 도망가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라면 그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유정아의 에세이집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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