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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명 아이돌’ 설경구 매력에 풍덩…우리는 ‘꾸꾸’의 비판적 지지자

이 '덕질’은 어느새 1년을 넘어섰다.

16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설경구를 지지하는 팬들이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6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설경구를 지지하는 팬들이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겨레

비가 많이 내린 지난 17일 새벽 5시 서울 잠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 개점도 하지 않은 극장 앞에 파란색 옷을 입은 10여명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손에는 카메라와 ‘형, 나 1주년이야’ 등이 쓰인 손팻말을 든 채였다. 6시가 되자 줄은 금세 40여명으로 불었다. 이들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개봉 1주년 기념 상영회’에 참석하러 온 팬, 즉 ‘불한당원’이었다. 월차를 내고 왔다는 한 당원은 “행사 시작까지 14시간 넘는 기다림조차 다들 ‘불한당 돌잔치’를 축하하는 세리머니라 여겼다”고 했다.

흥행 성적이 손익분기점에도 미치지 못한 ‘불한당‘이지만 그 팬덤인 불한당원의 활동은 영화 관람 문화를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대단했다. 불한당원들은 지난 1년 동안 서울뿐 아니라 수원, 대구, 부산 등 전국에서 약 70회에 이르는 대관 상영회를 진행했다. 이들의 성원 속에 ‘불한당’ 디브이디는 천만 영화 ‘베테랑’보다 많이 팔렸고, 시나리오북과 오에스티(OST)는 발매와 동시에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불한당원의 활약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배우 설경구다. 최근 몇 년 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그는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런 귀한 경험은 이전에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못 할 것이다. 나는 천운을 받은 배우다”라는 설경구의 소감은 지난 1년 동안 극적으로 달라진 자신의 삶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20~30대 여성 팬들은 대체 왜 영화 ‘불한당‘을, 그리고 배우 설경구를 이토록 애정하는 것일까? 불한당원이자 설경구의 열혈팬이라는 김정희(25·직장인), 이승연(27·대학원생), 김정아(21·대학생), 김인영(35·직장인), 박성연(37·직장인) 등 팬 5명을 지난 16일 저녁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마주했다. 이들은 ‘불한당원=설경구의 팬’은 아니라며, 자신들이 이 둘의 ‘교집합’임을 강조했다.

17일 오후 서울 잠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불한당> 개봉 1주년 기념 상영회에서 감독과 배우들이 함께 축하 케이크 촛불을 불고 있다. 변성현 감독(왼쪽부터), 배우 김희원, 설경구, 전혜진, 허준호
17일 오후 서울 잠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불한당> 개봉 1주년 기념 상영회에서 감독과 배우들이 함께 축하 케이크 촛불을 불고 있다. 변성현 감독(왼쪽부터), 배우 김희원, 설경구, 전혜진, 허준호 ⓒCJ E&M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어디 다녀오냐”고 묻자 “비가 와서 젖을까 봐 그렇다”며 캐리어 속 내용물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영화 ‘불한당‘과 배우 설경구에 관련된 ‘굿즈’(특정 배우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낼 수 있게 제작된 상품)가 쏟아졌다. 5명이 가져온 굿즈는 12인용 테이블을 꽉 채우고도 바닥에 늘어놔야 할 만큼 많았다. 사진첩, 디브이디, 머그잔, 컵홀더, 부채, 배지, 펜, 담요, 팸플릿, 티셔츠, 점퍼, 책, 스탬프 등 족히 200가지는 넘어 보였다. “이건 일부예요. 우리끼리는 ‘이제 이불과 냉장고만 나오면 굿즈로 하는 혼수 장만 끝난다’고 해요. 하하하.”

■ 첫 경험의 날카로운 추억…결국 ‘개미지옥’으로 이들이 배우 설경구를 향한 ‘덕질’을 시작한 것은 모두 영화 ‘불한당’ 때문이었다. ‘불한당‘을 최소 50번 이상(그 이상 세는 건 포기) 봤다는 ‘골수 불한당원’인 이들은 작품을 접했던 첫 경험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2017년 5월28일에 지인 손에 이끌려 봤어요. ‘임시완 나온다’고 해서요. 어느 순간 펑펑 울고 있더라고요, 제가. 바로 다음 회차 끊어 두번째 봤는데, 또 울어 눈이 팅팅 부은 채 극장을 나섰어요.”(승연) “저는 22일 밤 10시 영화. 보면서 숨을 쉴 수 없었어요. 같이 본 친구들 집에 못 가게 붙든 뒤 호텔 방을 잡고 밤새워 ‘불한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하하하.”(인영) 성연이 말을 받았다. “6월15일에 남편과 아이피티브이로 봤어요. 단숨에 설경구 배우에 빠졌죠. 내가 어떻게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놓쳤나 땅을 쳤어요. 난생처음 덕질이 시작된 순간이죠. 푸하하.”

누군가에겐 그렇고 그런 ‘조폭 누아르 영화’일 수도 있는 ‘불한당’이 왜 그리 특별했을까? 설경구의 압도적인 연기력은 너무 당연해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이들이 꼽은 첫번째 키워드는 ‘섹시함’이다. “정말 섹시했어요. 재호(설경구)뿐 아니라 거기 나온 모든 인물 각각의 섹슈얼리티가 극대화됐다고 봐요. 현수(임시완), 병갑(김희원), 천 팀장(전혜진)까지. 무엇보다 설경구가 남자로 다가왔달까? 하하하.”(정아) 두 남자의 우정을 넘어선 사랑의 감정이 덕질의 원천이라는 고백도 나왔다. 극 중 감정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재호와 현수의 감정은 사랑이었다는 것. “음향과 조명 등 하나하나가 오롯이 둘의 감정(사랑)에 집중해요. 여러번 볼수록 감정의 실체가 분명해지는 거죠. 그러다 ‘개미지옥’으로 빠져드는 거예요.”(정희)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스타일리시한 연출도 한몫했다. “한국 영화 중 이렇게 때깔이 좋은 영화가 또 있을까요? 색감, 음악, 조명, 리드미컬한 편집까지 다 너무 감각적이잖아요?”(성연)

씨지브이(CGV) 서울 왕십리 극장에 있는 설경구 네이밍관.
씨지브이(CGV) 서울 왕십리 극장에 있는 설경구 네이밍관. ⓒ씨제스 제공

■ 설경구 덕질, 어디까지 해봤니? 릴레이 대관 상영회, 지하철 광고, 카페 진동벨 광고 등 팬들의 덕질은 이미 정평이 나 있지만, 궁금했다. 과연 이들은 어느 정도까지 해봤을까?

모든 참석자가 성연을 먼저 지목했다. “제가 ‘씨지브이 왕십리 설경구 네이밍관’ 총대(를 멘 사람)예요. 배우에겐 영화관에 자신의 이름을 걸어주는 게 가장 의미있는 선물이 아닐까 싶어 추진했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지난해 12월부터 준비했으니까요. 고생은 했지만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설경구 배우가 ‘지천명 아이돌’임을 만방에 알렸죠. 하하하.”

망설이던 인영도 다른 참석자의 부추김에 말문을 열었다. “맥스무비가 설경구 주제로 잡지를 발행한 때였어요. 빨리 받아보고 싶은데 배포일이 추석 연휴 직전인 거예요. 연휴가 일주일인데, 판매 물량이 달리고 판매처도 별로 없어 다들 패닉 상태였죠. 제가 200부를 한꺼번에 결제한 뒤 직접 배포했어요. 200부가 당일 완판됐죠. 음, 크리스마스 때 83건이 넘는 선물 택배와 카드를 설경구 배우에게 전달한 ‘산타 프로젝트’도 했고요. 하하.”

가장 일반적이지만 체력 부담이 크다는 ‘무대 인사 전회 출석’도 빼놓을 수 없다. “‘살인자의 기억법’ 무대 인사 때 다 참여했어요. 한 곳에서 다른 곳까지 배우보다 빨리 이동하려면 택시를 타야 했는데, 배우들이 탄 행사 버스와 나란히 달리곤 했어요. 하하하. 하루 최대 9번까지 참여해봤어요.”(정희) 이토록 엄청난 ‘덕질의 경험담’을 늘어놓으면서도 이들은 한껏 겸손했다. “우리 덕질은 조족지혈(새 발의 피) 중 헤모글로빈 68만9654번을 담당하는 정도일걸요?”(인영)

■ 비조직적 행사 준비, 무조건적 쉴드는 노(NO)! 불한당원이 마주하는 익숙한 질문 중 하나는 “누가 불한당원을 이끄느냐”는 것이다. 불한당원은 행사 준비 때마다 ‘총대’가 각각 다르다. 함께 모이는 공식 온·오프 공간도 없다. 대관이나 굿즈 제작을 주도하고 싶으면 개인이 트위터 계정을 파고 글을 올린다. 참여자가 일정 수준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면, 계좌를 열고 입금을 받는다. 주로 닉네임으로 통하고, 서로를 존중해 ‘쌤’(선생님)이라 부른다.

“설경구 배우는 소속사가 관리하는 공식 팬카페조차 없어요. 물론 배우도 가입한 오래된 카페가 있긴 하죠. 포털 다음 ‘설경구의 또 다른 이름’이나 디시인사이드 ‘설경구 마이너 갤러리’ 등인데 다들 자유롭게 중복 활동을 해요.”(인영) 마이너 갤러리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설탕)가루’다. 세례명 마티아를 따서 설경구를 ‘설마티아’로 부르던 것이 ‘설탕’으로 진화하자 스스로를 ‘(설탕)가루’라 칭하기 시작했다. “흔히 쓰이는 ‘설구나라’(설레는 경구 나라)나 ‘9979’(설경구의 ‘꾸꾸(99)’+친구를 뜻하는 ‘79’) 등도 팬들을 아우르는 말일 뿐이에요. 우리는 관리자 없이 자유롭게 ‘암약’하는 팬입니다. 정해진 규율도 규칙도 없어요.”(승연)

배우가 출연한 영화라고 무조건 ‘쉴드’(방어막)를 치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비판적 지지’를 한달까? “‘불한당‘이든 ‘살인자의 기억법‘이든 완벽하다고 보지 않아요. ‘불한당‘이 여성(나타샤)을 그려내는 방식이나 ‘살인자의 기억법‘의 과도한 액션신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의견을 제작사나 소속사에 전달해요. 배우 오달수에 대한 미투 여파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개봉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한 여성으로서 재촬영 없는 개봉에 반대해요. 배우가 더 나은 작품을 통해 관객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죠.”(정아)

 

씨지브이(CGV) 서울 왕십리 극장에 있는 설경구 네이밍관 입구.
씨지브이(CGV) 서울 왕십리 극장에 있는 설경구 네이밍관 입구. ⓒ씨제스 제공

■ 배우 설경구의 팬에서 인간 설경구의 친구로 2~3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덕질’은 어느새 1년을 넘어섰다. “일시적인 현상일 뿐 과분하다”며 겸손해하던 설경구도 “오랫동안 함께할 친구들”이라며 팬들의 존재를 인정하게 됐다. 설경구는 에스엔에스와 팬카페 등을 통해 팬들의 선물과 편지 등을 일일이 ‘인증’하며 감사를 표하고 있다. 배우의 진심 어린 ‘소통 노력’에 팬들은 감동했고, 팬심은 깊어져만 갔다.

“팬들이 건넨 솜사탕 하나까지 인증샷을 올릴 정도예요. ‘인증 요정’이라니까요. ‘내가 보낸 선물이, 편지가 배우에게 전달되는 걸까?’라는 의문 따윈 품지 않아도 돼요.”(정아) “선착순 행사를 위해 첫차 타고 올라온 팬들에게 행사 시작 전 항상 ‘고맙다’고 인사를 해줘요. 영화제 시상식에서도 카메라가 아닌 불한당원을 바라보며 소감을 밝히고요. 이런 배려 때문에 우리는 배우 설경구의 팬에서 인간 설경구의 친구가 돼가는 거예요.”(정희)

이들의 팬심은 스크린 배정 방식 등 영화산업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까지 확장됐다. “70번이 넘는 상영회를 열었지만 ‘불한당’ 누적 관객수는 95만명이에요. 개봉 첫 주에 관객이 일정 수준 이상 들지 않으면 개봉관 수가 확 줄고, 2주 안에 스크린에서 내려가요. 과연 올바른 일인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인영)

개개인의 힘은 미미하지만 함께 모이면 관람 문화와 팬덤 문화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특정 영화의 팬덤이 형성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현상이 1년 동안 꾸준히 이어진 건 처음일 거예요. 50대 배우에게 20~30대 여성 팬들이 환호하는 것도 드문 일이죠. 언론이 앞다퉈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이유들 때문이고요. 우리가 하나의 모델이 되지 않을까요?”(승연)

이들의 목표는 “배우들·감독·스태프가 함께하는 ‘불한당’ 10주년 기념행사를 여는 것”이다. 목표 달성 때까지 ‘완덕’(덕질의 끝)은 없다고 했다. 누적 관객수 100만도 채 되지 않은 영화 ‘불한당’이지만, 팬들의 애정만큼은 끓는점 100℃를 이미 넘긴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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