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5월 광주에선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결혼식이 열렸다

맺힌 한을 풀어주는 가장 좋은 길은 5·18의 진상을 온전하게 규명하는 것

사흘 동안 저승 혼사굿을 했다. 허수아비로 만든 두 ‘영혼’에 고운 한복을 입혔다. 무녀는 못다 피우고 간 젊은 남녀를 위한 무가를 올렸다. 딸과 아들의 결혼을 지켜보던 어머니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세상을 뜬 두 남녀의 결혼식은 다른 축하객 없이 조용히 치러졌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결혼식이었다.

“그땐 챙피한 일이라고 생각해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살째기 결혼식을 올렸지요.” 5·18 유족 박현옥(58·광주시 북구)씨는 결혼도 못하고 세상을 뜬 여동생의 영혼 결혼식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리다. 영혼 결혼식은 결혼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남녀를 부부로 맺어주는 의례다. 동생 박현숙(당시 16살·여고3)씨는 1980년 5월23일 소형버스를 타고 가다가 광주 지원동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떴다. “노래도 잘하고 작가를 꿈꾸던 문학소녀였어요. 책임감도 있고 성실하고….”

 

 

 

박씨는 시민군 거점인 옛 전남도청 지하실의 주검들을 모시기 위한 관을 구하려고 화순으로 가다가 참변을 당했다. 탑승자 18명 중 17명이 계엄군의 총에 사망한 이 사건은 ‘주남마을 학살사건’으로 불린다.

신부 박씨는 1985년 신랑을 만났다. 신랑도 5·18 시민군이었다. 숙박업소 종업원으로 일하던 서종덕(18)씨는 총을 들고 시위에 가세했다가 5월22일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두 사람의 인연은 망월동 옛 5·18묘지를 찾아오던 두 어머니의 중매로 맺어졌다. 신랑의 어머니가 “우리 아들하고 여시다” 하고 제안해 혼인이 이뤄졌다. 언니 박씨는 “엄마 아빠는 현숙이를 영혼 결혼시키고 나서 굉장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좋아하셨다”고 회고했다.

여성 노동자 고영자(1954년생)씨도 박씨와 함께 그 소형버스를 탔다. 일신방직 노동자였던 고씨는 고향 화순으로 가려고 소형버스에 올랐다. 고씨는 “고생만 하시는 부모님, 아른거리는 어린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라 월급을 받으면 고스란히 부모님께 보내던 속 깊은 딸”이었다. 계엄군은 소형버스가 벌집이 되도록 총을 쏘았다. 고씨의 가족들은 5·18 유족들이 낸 책 <광주민중항쟁 비망록>에서 “당시 겨우겨우 찾은 영자의 시신은 차마 사람의 형상이라 말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고씨는 1983년 영혼 결혼식을 통해 신랑을 맞았다. 신랑은 살아서는 몰랐지만, 죽기 직전 스쳐가듯 만났던 이였다. 화순으로 가던 소형버스를 운전했던 김윤수(27)씨였다. 김씨도 당시 화순 가는 버스가 없어서 소형버스를 직접 몰고 가다가 변을 당했다. 생전에 겨우 옷깃만 스쳤던 두 사람은 지금은 국립5·18민주묘지에 나란히 누워 있다. 영혼 부부의 가족들은 대부분 망월동 옛 5·18묘지를 오가면서 만났다. 그 인연을 매개로 다시 영혼의 부부들이 맺어졌다.

옛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며 계엄군에 맞서다 죽음을 맞았던 박병규(당시 20살·동국대1)씨는 1996년에 영혼 결혼식을 올렸다. 1980년 5월 시국이 어지러워지자 서울에서 혼자 지내는 아들을 염려하던 어머니는 박씨를 광주로 불렀다. 그러나 아들을 광주로 부른 것이 오히려 비극의 씨앗이 됐다. 광주에 온 박씨는 5월19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가 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박씨는 교통사고로 숨진 한 여성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양동시장 주변 사람들이 주선해 이뤄진 결혼이었다. 박병규씨의 형 박계남(61)씨는 “어머니가 둘째를 결혼시킨 뒤 마음이 편하다고 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4년 있다가 돌아가셨응께…”라고 말했다.

박씨 기억에 동생은 과묵하고 의젓했다. 그는 지난해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최후의 도청 항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을 만났다. “동생이 5월27일 마지막 새벽에 여성들을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고 도청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 가슴이 먹먹해 혼자 울었어요.”

 영혼 결혼식을 올린 또 한 사람은 민병대(1960년생)씨다. 당시 양계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그는 5월23일 동생에게 “바깥 사태가 심각하니 나오지 말라”는 전화를 한 뒤 소식이 끊겼다. 그해 6월4일 광주시청으로부터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민씨는 결혼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젊은 처자와 영혼 결혼식을 통해 부부가 됐다.

 

ⓒ뉴스1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영혼 결혼식은 계엄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숨진 윤상원(1950~80)씨와 노동운동을 하다가 광주항쟁 전 숨진 박기순(1957~78)씨가 1982년 2월 부부가 된 것이 시작이었다. 박기순씨는 1978년 7월 광주 광천동에서 노동자 야학인 ‘들불야학’ 창립을 주도하다가 그해 12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

생전에 윤상원씨는 ‘노동자의 누이’로 불리던 박기순씨의 영전에 바치는 추모시를 남겼다.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여/ 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 두 볼에 흐르던 장미빛/ 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 그대의 죽음은 내게 무엇을 말하는가…”(1978년 12월27일) 윤씨가 이 시를 일기장에 남겼을 때만 해도 박씨와 저승에서 맞절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윤상원-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은 이들의 넋풀이를 위해 작가 황석영이 가사를 쓴 <임을 위한 행진곡>(김종률 작곡)이 민중가요로 널리 불리면서 주위에 알려졌다. 하지만 다른 영혼 부부들의 사연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가족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영혼 결혼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한겨레>는 주남마을 학살사건을 취재하다 5·18 관계자로부터 4쌍의 영혼 부부가 더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5·18 영혼 부부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가장 좋은 길은 5·18의 진상을 온전하게 규명하는 것이다. 5·18 연구자 정수만씨는 “주남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은 계엄사령부 발표대로 1건(17명 사망)이 아니라 2건으로, 사망자가 최소 28명 정도고 17명의 주검은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5·18 때 사라져 주검조차 찾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76명이나 된다. 이들의 영혼은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광주 #혼사굿 #민주화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