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회담 취소' 위협하며 미국에 보낸 북한의 요구사항은 꽤 구체적이다

'우리만 양보할 수는 없다'

  • 허완
  • 입력 2018.05.16 18:48
ⓒKCNA KCNA / Reuters

″만일 트럼프대통령이 전임자들의 전철을 답습한다면 이전 대통령들이 이룩하지 못한 최상의 성과물을 내려던 초심과는 정반대로 력대 대통령들보다 더 무참하게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게 될것이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16일 낸 담화에서 북미정상회담 취소 가능성을 언급하며 꺼낸 말이다.

앞서 이날 새벽 북한은 한미연합군사훈련 ‘맥스썬더’를 이유로 남북고위급회담을 연기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예정되어 있던 회담을 불과 10시간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한국과 미국 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든 북한의 이런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이날 김 부상의 담화에는 북한의 요구사항이 꽤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Jason Lee / Reuters

 

담화의 성격

우선 북한의 입장이 김계관 부상 이름으로 나온 것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이나 단체 또는 외무성 대변인 명의가 아니라 고위 당국자의 이름으로 담화를 낸 건 꽤 이례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김 부상은 북핵협상의 산증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6자회담 북한 수석대표(2004~2008년)를 비롯해 여러 차례의 북미 대화에 관여해 ‘북미 협상의 역사를 꿰고 있는 인물’로도 평가 받는다. 9.19 공동성명(2005년), 2.13합의, 10.3합의(2007년), 2.29합의(2012년) 등을 이뤄낸 주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날짜와 장소까지 확정된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무게감 있는 고위 관료를 직접 내세워 북한의 요구사항을 강하게 밝히려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의 요구사항은 크게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Leah Millis / Reuters

 

‘우리만 양보할 수는 없다’

김 부상은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가 일방적인 핵포기만을 강요하려든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 김 부상은 ”우리는 이미 조선반도비핵화용의를 표명하였고 이를 위하여서는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과 핵위협공갈을 끝장내는것이 그 선결조건으로 된다는데 대하여 수차에 걸쳐 천명하였다”고 강조했다.

남북정상회담이나 두 차례의 북중정상회담 등에서 나타난 것처럼, 북한은 핵포기 대가로 미국의 체제보장을 요구해왔다. 구체적으로는 군사위협 중단, 평화협정 전환, 북미수교 등을 미국에 원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방식이나 순서에 있어서는 미국과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요구사항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동의할지 여부를 떠나서, 북한은 자신들이 이미 상당한 양보를 했다고 여긴다.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핵무기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던 것에 비춰보면, 북한이 올해 초 처음으로 비핵화를 협상 의제로 제시한 건 분명 의미있는 변화였다. (물론, 북한의 ‘동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고 있다고 북한은 보는 듯 하다. 연합뉴스는 ”미 행정부가 북핵폐기에 대해 요란히 떠들면서도 정작 그 대가로 북한에 해줘야 할 체제보장 문제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은 주로 북한에 대한 제재 완화나 미국 민간기업들의 투자 허용 같은 경제적 조치를 언급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이 폭스뉴스에 출연해 ”분명 안전보장(security assurances)을 제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또 북한은 미국이 논의 분위기를 ‘굴욕적 핵폐기 협상’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김 부상의 담화에 나온 구절을 살펴보자.

″백악관과 국무성의 고위관리들은 ‘선 핵포기, 후 보상’ 방식을 내돌리면서 그 무슨 리비아 핵포기방식이니,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수 없는 비핵화‘니, ‘핵, 미싸일, 생화학무기의 완전폐기’니 하는 주장들을 꺼리낌없이 쏟아내고있다.”

폼페이오 장관의 2차 평양방문 전에도 북한은 비핵화 범위를 대량살상무기나 생화학무기로 넓히려는 듯한 미국의 움직임에 반발한 적이 있다. 이후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 ”만족한 합의”를 이뤘다고 밝히면서 이 문제는 가라앉는 듯 했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고 판단하고 미국의 태도 변화를 다시 한 번 촉구하고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김 부상은 ”세계는 우리 나라가 처참한 말로를 걸은 리비아나 이라크가 아니라는데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있다”고 강조했다. ”핵개발의 초기단계에 있었던 리비아를 핵보유국인 우리 국가와 대비하는것 자체가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도 했다. 자신들을 대등한 지위의 협상 파트너로 인정할 것을 미국에 요구한 것이다. 

ⓒJonathan Ernst / Reuters

 

반면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섣불리 체제 보장을 거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이 성사된 직후부터 미국 내에서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지도자를 만나기로 한 것부터가 북한 체제를 승인해주는 효과를 낳았다는 이유에서다. ‘김정은이 이미 이겼다’고 규정하는 의견도 있다.  

그 배경에는 역대 미국 정부가 북한 정권의 인권침해 실상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판해왔다는 사실이 깔려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올해 초 국정연설에서 ”북한의 잔인한 독재정권 만큼이나 자국민을 완전히, 혹은 잔혹하게 압제한 정권은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설령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낸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북한의 압제 정권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에 대한 문제는 없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미국을 겨냥한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위험을 막는 게 ”미국의 이익”이자 ”우리의 목표”라고 답했다.

미국 내에서 여전히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것도 부담이다. 과거 여러차례 비핵화 협상을 파기했던 북한의 전력을 볼 때, 여전히 북한을 믿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트럼프 정부 입장에서도 운신의 폭이 제한적인 편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을 언급하면서도 ‘미국 국민들의 세금이 북한에 직접 전달되는 건 아니고, 민간기업들의 투자금이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해야만 했다. 그만큼 미국 내 여론이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이다.

 

ⓒKevin Lamarque / Reuters

 

‘강경파’는 빠져라

김 부상의 담화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또 있었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을 콕 집어 비난한 것. 김 부상은 ”우리는 이미 볼튼이 어떤자인가를 명백히 밝힌바 있으며 지금도 그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미국의 북한 관련 정책을 이끄는 두 축은 폼페이오 장관과 볼턴 보좌관이다.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미국 정부 내에서 사뭇 다른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거칠게 구분하면 볼턴이 ‘강경파‘, 폼페이오가 ‘대화파’라고 할 수 있다.

볼턴 보좌관은 미국 외교가에서도 ‘슈퍼 매파’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지난 3월 임명되기 전 여러차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했다. 이라크 점령을 주장했고, 무력으로 이란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믿는다. 논란 가득한 전력 때문에 트럼프 정부 초기 그가 국무장관 후보로 거론됐을 때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현재 미국의 대북 협상을 이끌고 있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역시 ‘강경파‘로 알려져 있으며, CIA국장 재직 당시 북한 정권교체를 우회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폼페이오는 본인의 이념이나 신념에 따르는 인물이라기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뜻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충신’에 가깝다는 평가다.

경력을 보더라도 차이가 있다. 볼턴은 조지 W.부시 정부에서 국무부 국제안보담당 차관, 군축담당 차관, 유엔주재 미국대사 등을 지냈다. 레이건 정부에서도 국무부와 법무부 내 여러 직책을 맡아 외교에 관여했다.

반면 폼페이오는 사업가로 활동하다가 2010년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의회에서는 정보위원회와 에너지상무위원회 등에서 의정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약 1년2개월 동안 CIA 국장을 지냈다. 정통 외교관출신은 아니라는 얘기다. 

ⓒKCNA KCNA / Reuters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북한과의 대화를 주도하는 건 폼페이오 장관이다. 그는 두 차례나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고, 한국 정부와도 긴밀한 소통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볼턴 보좌관은 언론 등을 통해 북한 비핵화 협상 관련 발언을 내놓으며 비핵화 협상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모습이다. 폼페이오 장관에 비해 훨씬 강경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북한이 볼턴 보좌관을 지목해 경고 메시지를 내놓은 건 앞으로 계속될 협상에서 볼턴 같은 강경파를 배제하라는 뜻으로 읽힌다. 

볼턴 보좌관을 ”사이비 ‘우국지사‘”로 묘사한 김 부상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볼튼과 같은 자들 때문에 (과거 북미대화가)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 과거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에서 ‘자랑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싶다면, 볼턴을 멀리하라는 충고인 셈이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 #도널드 트럼프 #북미 정상회담 #마이크 폼페이오 #존 볼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