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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전설 '우탱 클랜'의 데뷔를 도운 한국계 캐나다 여성을 만나보라

52세 소피아 장은 힙합계의 거대한 이름 중 하나가 됐다.

  • 김도훈
  • 입력 2018.05.16 13:39
  • 수정 2018.05.16 14:10
ⓒSOPHIA CHANG

힙합은 배타적 문화 현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가장 왕성한, 역사상 가장 널리 퍼진 음악 장르로 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브롱스 공공 주택 단지에서 드럼 루프가 울려퍼지기 시작한 이래, 용인되는 미국 사회의 모습을 전복한 초기 힙합의 공은 주로 유명한 남성들에게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힙합이 진화해가는 과정에서 뒤에서 고생한 사람들, 직접 자신의 가사로 표현하기보다는 가사를 쓰는 사람들에게 준 영향으로 문화적 기여를 한 사람들의 노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소피아 장은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캐나다 뱅쿠버의 한국계 여성 소피아 장은 52세다. 힙합의 황금기로 불리는 90년대에 인기를 누렸던 여러 클라이언트들을 매니지먼트한다. 유명 그룹 우탱 클랜의 RZA, GZA, 올 더티 바스타드 등이다.

소피아 장이 힙합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지만, 그녀는 대학을 다니던 중 진로를 바꿔 뉴욕 음악 신(scene)에 등장했다.

“내게 있어 힙합은 더욱 심오한 방식으로 여러 이야기를 다루었다.” 힙합을 처음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 대한 그녀의 말이다.

“백인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1세대 한국 이민자로 자란 나는 분노가 충만했다. 이 음악이 오직 분노만 가득한 게 아니라 절박함도 깔려 있음을 깨닫자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가사와 스토리텔링은 내게 아주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자이브 레코드에서 잠시 일하는 동안 RZA를 알게 되었다. 그의 재능에 놀랐다고 회고한다.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똑똑한 사람 중 하나군.’ 이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똑똑한 사람들을 아주 많이 아는데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 우탱 클랜에 매료되었다. 멤버들과 친해졌고, 일 관계도 맺게 되었다. 보통 강력한 비즈니스 우먼을 꺼려하는 업계에서 그녀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허프포스트는 소피아 장을 인터뷰하며 힙합 문화와 그녀의 관계, 매체에서의 아시아인 등장, ‘가장 멋진 독한 여자’라는 위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SOPHIA CHANG

 

힙합 문화와 R&B를 어떻게 접하고 또한 사랑하게 되었는가?

-나는 뱅쿠버에서 프랑스어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한국계 이민자이며 학구파이다. 대학에 갈 예정이었던 고등학교 졸업반 때,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의 ‘The Message’를 들었다. 그 한 곡이 문자 그대로 내 인생을 바꾸었다.

어떻게 바뀌었는가?

-내게 있어 힙합은 더욱 심오한 방식으로 여러 이야기를 다루었다.

백인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1세대 한국 이민자로 자란 나는 분노가 충만했다. 나는 성질도 더러웠다. 이 음악이 오직 분노만 가득한 게 아니라 절박함도 깔려 있음을 깨닫자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가사와 스토리텔링은 내게 아주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신의 개인적 경험에서 온 분노였는가, 뉴욕과 일부 뉴욕 시민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관찰에서 온 분노였는가? 공감에 의한 분노였나?

-물론 공감을 느꼈다. 그 노래를 듣고 “오, 멋지군.”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분노에 있어 내가 개인적으로 어떤 공감을 느꼈는가 하면, 철저히 내 정체성 정치학에 대한 것이었다. ‘칭크(chink)’, ‘잽(jap)’. ‘국(gook)’ 등으로 불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타자(他者)라는 말만 들었다. 내 생물적 표현형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드러낸다. 그건 결코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내가 타자라고 느꼈다. 실제로 타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음악을 듣자 강력하게 느껴졌다. 분개에 차 있다고 느꼈다.

이 곡은 문자 그대로 행동을 촉구하는 곡은 아니지만, 분명 주의를 환기시키기는 했다.

어떤 시점에 학계를 벗어나 음악 업계로 들어가게 되었나?

-나는 이미 라이브 음악 신에 친숙했고, 아주 좋아했다. 나는 밴드를 보러 가는 것, 공연장, 콘서트, 뮤지션들, 창의적인 사람들을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음악 비즈니스 전반에 이미 익숙했다. 뉴욕으로 옮기기로 결심했을 때는 너무나 오고 싶었기 때문에 대학 졸업도 포기했다. 나는 뉴욕을 여행하던 중 조이 라몬을 만났다. 뉴욕 음악 신에 대한 소개로 조이 라몬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까? 그는 나를 음악 저널리스트인 자기 친구, 그 친구의 여자친구와 함께 묵게 해주었다. 당시 그 여자친구는 폴 사이먼의 투어 매니저였고, 나를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해주었다. 그게 음악 업계에서 내가 처음으로 가진 공식 일자리였다.

그 일로 시작해 어떻게 해서 힙합 아티스트 전문 매니지먼트를 하게 되었는가?

-나는 꽤나 용감무쌍하다. 좀 무모한지도 모른다. [웃음] 나는 힙합 클럽들에 다니기 시작했고, 갈 수 있을 때면 늘 가서 놀았다. 친구들과 나는 일주일에 4~5일 정도는 힙합 클럽에 갔던 것 같다. 당시는 신이 아주 작았다. 80년대에는 나이트클럽에서 힙합 업계의 모든 면을 다 볼 수 있었다. 4대 요소인 MC, DJ, 그래픽 아티스트, B-보이들이 다 있었다. 그건 크리에이티브 쪽 측면이다. 하지만 프로듀서, 변호사, 홍보 담당자, 제작자, 계약 담당자, 매니저, 레이블 측 사람들, 신인 발굴팀, 홍보 임원 등,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클럽에 있었다.

ⓒSOPHIA CHANG

힙합이 아직 신비로운, 새로운 현상이었던 때가 그리운가?

-신이 작고 배타적이며 서로 다 아는 시절이 그립지는 않다. 힙합은 해야 할 일을 했다. 세계적 문화 현상이 되었다. 이 세상 전체가 걷고, 말하고, 춤추고, 옷입는 방식 전부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나는 이토록 깊고 넓은 문화적 영향을 준 음악 장르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록큰롤이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동의한다.

-우탱의 ‘W’는 역사상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음악 로고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아마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심지어 롤링 스톤스보다도 더. 세상을 돌아다녀 보면 사람들이 하는 말, 사람들의 인스타그램 페이지에서 보이는 것들, 어떤 대륙의 어떤 나라의 어떤 작은 마을에 가도 사람들은 우탱 태투나 우탱 로고를 본다.

지금으로선 분명 보편적 브랜드이다.

-그렇다. 그게 힙합이다. 힙합은 전세계적으로 민감한 곳을 건드렸다. 다른 장르가 그런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과 우탱 클랜 사이에 문화적 주고받음이 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당신이 그들에게서 배우고 가져왔듯, 그들도 당신에게서 배우고 가져간 것이 있나?

-처음에는 교환이랄 게 별로 없었다. 내가 내 유산을 포용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1세대 이민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한국어가 내 모국어였고, 나는 나는 동화되고 싶은 욕구 때문에 한국어를 잃었다.

나는 적응하고 동화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내 정체성을 부인하는 셈이었기 때문에 그건 제로섬 게임이었다. 동화되기 위해, ‘백인의 이상’에 부합하기 위해, 나는 아시아의 유산을 버렸다. 그래서 우탱을 만났을 무렵 나는 결코 아시아 남성과 사귀지 않았다. 아시아 남성에게 끌리지도 않았다. 쿵푸 영화도 보지 않았다. 내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의 일종이었다. 수치를 느꼈다고 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지금처럼 포용하고 소중히 하지는 않았다. 흥미롭게도, 나를 내 뿌리로 돌아가게 도와준 사람들이 우탱이었다. 그들의 렌즈를 통해 내 문화의 아름다움을 보도록 해주었다.

우탱이 무술 영화에 관심을 갖는 게 얄팍한 흥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얄팍한 흥미를 품은 사람들이 많긴 하다. “맙소사, 저 놀라운 싸움을 봐! 코리오그래피! 와이어!” 하지만 무술 영화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훨씬 더 깊었다. 우탱이 처음에는 얄팍한 면들에 끌렸을지 몰라도, 그들은 형재애, 충성, 소수 대 다수 등의 테마[를 좋아한다].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느낀 점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것 같다.

당시 힙합은 급진적 예술 형태였다. 가족들이 정해놓은 진로를 따르라는 압력을 받지는 않았나? 당신의 가족들은 이 업계에 진출해 흑인 문화의 복잡성을 관찰하겠다는 당신의 목표를 순순히 받아들였는가?

-생각해 보면 내 부모님은 굉장히 자애로웠다. 힙합이 전부는 아니었다. 대학원에 가지 않고 뉴욕으로 이사한다는 게 더 큰 일이었다. 내가 빠져든 문화가 아니라, 내가 살기로 한 도시, 학위를 따지 않기로 한 결정이 더 큰 일이었다. 나는 내 부모님의 자식이다. 부모님은 내가 힙합에 공감하는 것을 전적으로 이해했다. 나는 모든 형태의 사회 정의를 이해하라고 배웠다. 미국의 사회 정의만이 아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다채로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일본과도 관련이 있다. 내 부모님은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서는 정의감이 아주, 아주 강했다. 사회적 이슈, 인종 이슈를 다루는 음악에 내가 공감한다는 건 부모님으로선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SOPHIA CHANG

당신의 개인적 교차성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다. 아주 가부장적인 음악 업계에서 여성 매니저의 경험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당신이 여성이라는 점이 당신을 공격하는 무기로 돌아온 경험이 있는가?

-나는 남성 업계 속의 여성이었을 뿐 아니라, 초남성적 환경 속의 작은 아시아 여성이었다. 초남성적이었다. 힙합이 얼마나 남성 우위인지 생각해 보라. 힙합의 에토스 자체가 허세, 남자다움 과시, 남성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중엔 지극히 유독한 것이 많다.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여성의 힘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나는 백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듯, 남성이 되고 싶다는 욕구도 없다. 나는 백인 가부장의 힘을 전적으로 이해한다. 매일 그에 맞서 싸운다. 하지만 백인 남성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없다. 내 성격의 상당 부분이 나의 투쟁과 정체성 문제에서 나왔다는 걸 이해한다. 나는 우세한 문화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 내 문화가 보다 우세해지길 원하지만, 백인 우월주의와 가부장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우세한 문화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남들이 나를 좋아하고, 존중하고,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나는 경기장이 평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방 안에 들어가고 내 사람들을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도구를 사용할 것이다. 그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내가 아름다워서, 내가 매력적이어서, 내가 섹시하다고 생각해서 나를 욕망한다면, 나는 그건 상관없다.

그걸 편안하게 느끼는가?

-아무 상관없다. 그게 내 무기이기 때문이다. 내 무기를 워낙 많이 빼앗겼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걸 사용해야 한다. 나는 여성들에게 늘 말한다. 아름다움과 섹스 어필을 사용하되, 그걸 뒷받침할 실력을 갖추라고. 섹스 어필로 살얼음을 걷지는 말고, 협상을 원활하게 만드는데 사용하라고.

그런 논의는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일하는 곳에서 자신감 없는 남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여성들이 외모나 처신을 바꾸지 말라고 하는 것 말이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페미니스트 작가 조앤 모건은 “미는 자본이다.”라고 썼다. 나는 아름다움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도록 딸을 키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헛소리다. 빌어먹을, 텔레비전을 봐라. 잡지를 펼쳐봐라. 영화를 봐라. 사람들이 우리가 인종 차별을 벗어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는 말이 개소리라는 건 모든 유색인종이 안다. 힘을 갖기 위해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름다워지는 방법은 이 세상의 여성의 숫자 만큼이나 많다. 그걸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SOPHIA CHANG

당신은 매체에서 소수 집단이 잘 보이지 않는 것, 섹스 어필의 악마화에 큰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물론이다. 나는 여성들이 힘을 발굴해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길 바라며 회고록을 쓰고 있다. 내가 내 자신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내 딸이 자기 자신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서 나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를 좋아한다. 그들은 아름답다. 남성들은 섹시하고, 그들은 섹스를 한다. [웃음] 그들은 요란하게 살며, 영화에는 우리들만 등장한다. 백인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데, 아시아에서 만든 영화 말고는 난 그런 걸 본 적이 없다. 우리에겐 그런 게 필요하다. 모든 유색인종에겐 그런 게 필요하다.

당신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를 언급해서 기쁘다. 미리 나온 관련 기사들을 몇 개 읽어봤는데, 사람들은 이 작품이 영화계의 아시아인들에게 있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기를 꺼리고 있지만, 우리가 익숙해져 있을지 모를 진정성없는 형식주의가 아닌, 캐릭터들의 인간성과 평범함을 꾸준히 테마로 다루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우리에 대한 영화다. 우리에겐 백인 주연은 필요없다. 모든 캐릭터가 유라시안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백인 주인공이 없으면 개봉을 못하는 게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영화를 엄청나게 팔아치우고 돈을 아주… 많이… 벌 것이다. 재교육과 재프로그램을 매일같이 해나가는 것이다. 내가 배운 것, 우리 사회가 배운 것을 해체하고 재건해 나가는 것이다.

당신이 과거에 임원들을 상대할 때 이런 과정을 내면화한 것이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나?

-난 52세다. 난 제일 멋진 독한 여자다. 마음 속 깊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가슴이 납작하고 엉덩이가 작은 52세 아시아 여성이고, 헤어스타일은 사무라이 같다. 난 내가 제일 멋진 독한 여자라는 걸 인식하고 이 세상을 활보한다.

멋지다!

-이건 반항적 행동이다. 내 삶의 매일매일은 반항이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모범적 소수집단’이라는 생각은 엿이나 먹으라 해라. 아시아 여성이 이러이러하다고 당신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든 간에, 나는 그걸 다 지워버릴 것이다.

*허프포스트US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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