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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5월 02일 14시 24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5월 02일 14시 24분 KST

어느 '평화협정'과 노벨평화상 이야기

huffpost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 특보가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을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라 기고했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다. 야권에서는 주한 미군 철수를 시사한 것으로 읽힐 수 있는 문정인 대통령 특보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강력한 반발이 나왔고, 다행히 청와대에서 오늘 아침 즉각 ”주한미군은 한미동맹의 문제”라며 ”평화협정 체결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전함으로써 문정인 대통령 특보의 발언의 파장은 수습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도대체 평화협정과 미군 철수, 그리고 최근에 거론 중인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노벨평화상 수상 가능성은 어떤 관계에 있길래 이렇게 민감한 반응들을 불러 오는 것일까? 필자는 여기에는 40여년 전 동남아시아의 베트남에서 종결되었던 베트남 전쟁의 망령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 번 써 볼까 한다.

Carlos Barria / Reuters

며칠 전인 지난 4월 30일은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의 총공세로 수도 사이공을 빼앗기고 패망한지 4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이제 이름도 호치민시로 바뀌었는데, 북한이 남한을 병합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는데 성공한 후 서울의 이름을 김일성시로 바꾼 격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이 이렇게 망하기(당대 우리나라에서 이 사건은 ‘월남(越南) 패망’이라고 불리워졌었다) 2년여 전에, 미국과 북베트남, 남베트남 그리고 남베트남 임시 혁명정부 사이에서는 파리 평화협정(정식 명칭은 베트남에서 종전(終戰)하고 평화를 회복하는 합의)이 체결되었다. 종전되고 평화가 회복되었다는 엄숙한 합의가 무려 프랑스하고도 파리에서 미국과 북베트남, 남베트남, 그리고 소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의 정치 조직인 남베트남 임시 혁명정부 사이에 체결되었는데(우리로 치면 해방 후 남한에 암약하던 빨치산들이 일정 지역을 점거하고 휴전협상의 당사자가 되겠다고 나선 셈) 어처구니가 없게도 그 평화협정문의 잉크가 제대로 마르기도 전에 남베트남의 정세는 악화되었고, 결국 북베트남군은 그깟 평화협정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세를 취하였고, 43년 전 4월 30일 남베트남은 참담하게도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종전”이 되고 ”평화가 회복되었다”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으니, 한때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침략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남베트남에 50만명이나 주둔했던 주월(駐越) 미군이 더 이상 남베트남에 남아 있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베트남 문제는 “베트남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한지라 베트남에 있는 외국 군대는 60일 이내에 모두 철군해야 했고, 그래서 1973년 3월 29일에 남베트남에 있던 마지막 미군까지 떠났고, 미군과 함께 참전했던 우리 국군도 베트남에서 철군한다.

가까이는 1965년의 통킹만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멀리 잡으면 1945년 일본이 베트남에서 물러나고 다시 돌아 온 식민지 지배세력 프랑스와 베트민과의 전쟁에서부터 시작된 30년 가까운 베트남에서의 전쟁 상태를 끝낸 평화협정이니 파리 평화협정에 쏟아진 찬사는 대단했었다. 협상의 대표였던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대표 레둑토에게는 1973년도 노벨평화상이 주어졌다. 평화 따위에는 개뿔도 관심이 없었을 북베트남 협상 대표 레둑토는 ”진정한 평화가 확립될 때까지” 노벨평화상 수상을 거부한다며 상을 받지 않았다. 레둑토가 말했었던 ”진정한 평화가 확립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1975년 4월 30일에야 밝혀진다. 베트남전을 ”종전”시키고, ”평화를 회복”시키는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고 이렇게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에게 주어졌던 1973년도 노벨 평화상은 아마도 노벨 평화상 역사상 가장 격렬한 논란에 휩싸인 노벨 평화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도대체 키신저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닉슨은 도대체 뭘 믿고 덜컥 베트남에서 미군을 빼내고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에 먹잇감으로 던져 주고 만 것일까?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는 이렇게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평화협정”에 왜 동의했을까?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과 국무장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남베트남의 대통령 구엔 반 티우에게, 북베트남 및 남베트남의 반란 집단(우리로 치면 반국가단체) 베트콩과의 평화협정에 서명하라고 하면서, 비록 주월 미군은 이 ”평화협정”에 따라 베트남에서 철군하지만, 만약 북베트남 군부가 이 파리 평화협정을 어기고 남베트남을 공격할 경우, 미국이 우선은 압도적 공군력으로 북베트남을 폭격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는 미국 대통령의 그 약속을 굳게 믿고 평화협정에 서명한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을 ”종전”시키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던 이 파리 ”평화협정”은 주월 미군의 철수를 정하면서도 미군이 애당초 베트남전에 개입하게 되었던 명분인 공산주의의 확산 방지에 걸맞지 않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으니 바로 남베트남에 침투해 있던 14만명이나 되는 북베트남군의 존재였다. 즉 북베트남군과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쌍철군하는 것이 아니라 희한하게도 미군이 물러남에도 불구하고 14만명(!)이나 되는 (미국과 남베트남이 주장해온 바에 의하면) 침략군인 북베트남군은 고스란히 남베트남에 남았고 이들의 철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파리 평화협정에서는 규정하지 않았다. 우리 상황에 견주어 보자면, 북한 핵과 미사일을 폐기하지 않고 동결시키는 방식만 취하여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만 제거하고 남한과 일본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구조의 타협을 한 것이 파리 ”평화협정”이었던 셈이라고나 할까? 즉 베트남 전쟁이 격렬한 반전운동으로 미국 내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으니 미군은 일단 철수시키기로 하고 어처구니 없게도 미군 참전의 명분이었던 북베트남 공산군의 남베트남에 대한 실제적 위협(14만 대군의 남베트남 내에서의 활동)은 외면해 버린 것이었다.

그럼 도대체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은 뭘 믿고 그런 합의를 해준 걸까? 이들은 북베트남이 파리 평화협정을 깨고 남베트남에 침투한 14만 대군을 동원하거나 달리 남베트남을 공격할 경우 닉슨이 티우에게 약속했듯이 미국의 압도적 공군력을 동원해 북베트남을 두들길 수 있을 터이니 북베트남이 감히 남베트남을 공격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실은 북베트남이 오랜 미국과의 적대 관계에도 불구하고 파리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장에 나오게 된 것은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이 이른바 미치광이 전략을 택하며 툭하면 북베트남을 폭격하며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닉슨판 최대의 압박작전이 먹혀 결국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여 평화협정을 맺고 그 전의 미국 대통령들이 하지 못했던 베트남전 종식과 미군 철군이란 위업을 대통령 닉슨은 달성했고, 국무장관 키신저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닉슨은 재선에 성공하는 과정에서 반대당인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있던 워터게이트 호텔에 괴한들을 침입시키려고 했다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휘말려 탄핵 위기에 몰리고 끝내 1974년에 사임하고 만다. 닉슨은 자신의 정치적 자본이 충분히 남아 있어 남베트남이 혹시라도 위기에 빠지면 북베트남을 처음 협상장에 끌어냈듯이 북폭을 감행해 남베트남을 구출해 줄 심산이었겠지만 남베트남을 구출하기는커녕 본인의 정치적 생명조차 구출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듬해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에 총공세를 취하였을 때 닉슨의 후임자인 포드 미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군사원조를 해주자고 미 의회에 요청했으나 미 의회는 압도적 다수로 이를 거부한다. 이 때 이미 남베트남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민족이 드디어 통일되었다고 남베트남의 반정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환영하는 움직임마저 있었으나 이른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인사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멸망시킨 후 강제 노동수용소에 끌려가서 ”재교육”받았으며, 숱한 남베트남인들이 보트 피플이란 이름으로 망망대해 일엽편주에 몸을 맡겼다 물귀신이 되거나 해적들에게 약탈당하는 신산스런 처지가 된다. 베트남전쟁을 ”종전”시키고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된지 불과 2년여만의 일이었다.

끝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파리 ”평화협정”이 된 이유는 회담 장소를 두고서 미국과 북베트남이 세계의 여러 도시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최종적으로 프랑스 파리로 낙착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반복되는 것일까? 역시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서문에서 인용했듯이 이 남베트남 망국사도 어쩌면 ”이름만 바꾸면 당신 이야기”일지도 모를 일이라 오늘 청와대에서는 국민들이 안심하라는 취지로 강하게 부인했지만 “한반도의 봄”을 바라보는 마음은 여전히 무겁고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