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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오래 참기 달인, 그 불쾌한 찬사

그건 성실함도 책임감도 아니었다

  • 유정아
  • 입력 2018.05.01 17:15
  • 수정 2018.05.02 13:24
ⓒhuffpost

화장실을 자주 가지 않는 편이다. 일부러 참는 건 아니고, 요의를 잘 느끼지 않는다. 맥주를 잔뜩 마신 사람들이 한 시간 동안 두세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술자리에서도 나는 자리를 비우는 일이 거의 없다. 몸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요즘은 의식적으로 한두 시간에 한 번씩 가려고 하지만, 아직도 바쁜 날이면 저녁이 다 되어서야 종일 화장실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걸 깨닫곤 한다.

화장실에 가는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한 건 스무 살 겨울,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혼자 카운터를 봐야 했기에 화장실에 가려면 손님이 없을 때 가게문을 잠그고 다녀와야 했다. 가끔은 잠긴 문 앞에서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중 몇 명은 왜 이렇게 늦게 오냐며 짜증을 냈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 손님 몇은 간혹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오줌 싸는 줄 알았더니 큰 거였냐느니, 시원하냐느니 하는 말을 건넸다. 집에서도 수시로 CCTV를 틀어 놓고 보던 사장은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 손님 많을 시간에는 가게 비우지 말라는 이야기로 못마땅함을 표했다.

몇 번 그런 일이 생긴 후부터 일하는 동안에는 거의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냥 내가 화장실에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일이었다.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나 혼자 일하는 시간이니까, 사장이 늘 입에 달고 살던 책임감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아르바이트를 했던 대형 서점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사 시간 이외의 휴식 시간이 없는 상황에, 하루에도 수만 명의 손님이 드나드는 매장에서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직원 화장실까지 갈 짬을 내는 건 쉽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던 길에 책 위치를 문의하는 손님에게 붙잡혀 다시 돌아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화장실에 가지 말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또 물을 적게 마시는 걸 택했다.

대충 열 가지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대부분 사정은 비슷했다. 병원, 카페, 마트, 호텔, 드럭스토어……. 화장실을 덜 가면 일하는 게 훨씬 수월했다. 고문당하듯 괴롭게 참지는 않았지만 나는 차츰차츰 화장실 가는 빈도를 줄였고 곧 그것에 적응했다. 물만 안 마시면 열 시간이 넘도록 요의를 느끼지 않았다. 자주 방광염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 언론사에서 잠시 인턴을 했다. 광역버스 기사들의 열악한 근무 실태를 취재하겠다는 기획을 내고 버스 차고지로 취재를 나갔다. 예상대로 회사는 악질이었다. 한여름의 햇빛을 그대로 흡수하는 컨테이너 휴게실이 보여 주듯, 기사들의 근무환경은 형편없었다. 열심히 묻고 받아 적는 내 앞에서 회사의 만행을 성토하던 중년의 기사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Brian Snyder / Reuters

 

“노선 한 바퀴 돌면 대여섯 시간이 되는데, 가끔은 배차 간격 늦어졌다고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게 하고 두 바퀴를 돌려요. 열 시간을 화장실도 못 가고 차 안에 갇혀 있는거야. 가끔 과속하는 기사들 있죠? 그거 아마 화장실이 급해서 그럴 거예요.”

세상에 너무하네요,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그들의 분노에 공감하다가 문득 기시감인지 위화감인지 모를 감정이 들었다. 나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이제껏 화장실에 가는걸 참아 오며 지켜진 건 정말 내 책임감이었을까. 아니, 애초에 그게 책임감의 영역이 맞는 건가. 머릿속의 어느 부분에 균열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TV 프로그램 하나를 봤다. 한 분야에 뛰어난 숙련도를 보이는 이들을 ‘달인’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날 나온 사람은 고속도로 요금 정산소 직원이었다. 동전을 쥐기만 해도 액수를 맞히고 돈을 셀 필요도 없이 정확하게 정리하는 모습은 ‘달인’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제작진이 별안간 ‘화장실 오래 참기’를 그의 숨겨진 장기 중 하나로 소개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용변을 참는 시간도 남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다는 거였다. 이윽고 사실 검증을 위한 영상이 나왔다. 빨리감기로 돌아가는 화면 속에서 비교군에 속한 사람들은 수시로 화장실에 드나들었지만 ‘달인’은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TV애서는 그의 흔들림 없는 모습에 감탄하는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방송은 그가 꽃다발과 ‘달인’임을 인증하는 무슨 증표를 받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끝났다. 거기에 성실, 책임감 같은 것을 칭찬하는 자막이 덧입혀졌던 것 같다.

 

ⓒTokism via Getty Images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 속에서, 버스 기사들과 이야기하며 어렴풋이 들었던 생각이 좀 더 명확해졌다. 이건 착취였다. 그 착취에 성실함이나 책임 따위의 이름을 붙이는 건 특히 질 나쁜 기만이었다. 똥오줌을 열 시간씩 참는 것에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다행히도 이제는 화장실에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아직 그때의 습관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여전히 하루종일 물을 마시지 않고 화장실에 가지 않으며 일하고 있을 ‘성실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에 화를 낼까, 아니면 예전의 나처럼 적응해가고 있을까.

그나마 ‘똥오줌을 참으며 일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던 건 그것이 똥오줌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인 이상 영원히는 참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영원히 참아도 죽지 않는 것들, 참다 보면 그것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리게 되는 의지와 욕구들은 어떨까.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는 일터에서 소리없이 삭제되는 인간성은 얼마나 될까. 생각이 거기에 이를 때마다 눈앞이 아찔해진다. 나는,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얼마만큼 잃었을까

 

* 유정아의 에세이집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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