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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인 것이 부끄러웠다

[마부작침①]

ⓒhuffpost

‘TV동물농장’ ‘무릎팍도사’ 등 5000여 편의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성우 안지환이 최근 자전적 에세이 ‘마부작침‘을 펴냈다. 솔직담백하게 풀어낸 인생 이야기, 베테랑 성우로 성장할 수 있던 비결을 ‘막걸리 한잔 주고받으며 얘기하듯’ 편안하고 진솔한 입담으로 풀어낸다. 매주 목요일 오후에 업데이트된다. 

TV 동물농장

25년간의 성우생활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 SBS의 〈TV 동물농장〉이다. 1998년부터 20년째 방송되고 있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이은, 국내 2위 장수 프로그램이다. 2001년 5월 첫 방송을 내보낸 이래, 지금도 매주 일요일 아침 9시 30분에 방송된다.

동물은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소재다. 그동안 동물을 다룬 프로그램도 적지 않았다. MBC에 〈와우! 동물천하〉가 있었고, KBS에 〈주주클럽〉이 있었다. 〈와우! 동물천하〉는 2003년 10월에 종영됐고, 〈주주클럽〉은 2009년 4월 방송이 끝났다. 3대 공중파에서 동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유일한 버라이어티프로그램이 〈TV 동물농장〉이다. 교육전문 채널인 EBS는 2015년부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방송하고 있다.

동물프로그램 하면 대부분 〈동물의 왕국〉과 〈TV 동물농장〉을 떠올린다. 동물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동물의 왕국〉은〈TV 동물농장〉과 성격이 다르다. 〈동물의 왕국〉은 국내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일본 NHK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KBS가 수입하여 방송하고 있다. 반면 〈TV 동물농장〉은 국내 제작진이 우리나라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이다.

대부분의 동물 다큐멘터리들은 사람의 시선으로 동물을 보지만, 〈TV 동물농장〉은 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동물의 입장에서 보는 세상은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동물은 사랑, 의리, 모정, 배려, 충직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프로그램을 하면서‘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 것도 여러 번이다. 주인을 구하기 위해 멧돼지와 사투를 벌이다 죽어간 충견, 몸이 불편한 새끼를 먹이기 위해 사료를 물어 나르던 어미 고양이, 죽은 친구의 새끼를 보살피던 유기견 같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인간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TV 동물농장〉에는 여러 장르가 녹아 있다. 드라마인가 하면 시트콤 같기도 하고, 뉴스인가 하면 시사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자연 다큐멘터리, 리얼리티쇼, 스포츠의 색깔까지 버무려져 있으니 잘 차려진 뷔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남녀노소가 어울려 같이 보기에 모자람이 없다.

2001년 〈TV 동물농장〉이 시작되던 해부터 내레이션을 맡았다. 동물 연기도 내 몫이다. 올해로 18년째이니, 〈TV 동물농장〉은 내 분신과 같다. 더러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강연회에 가면 사회자가 나를 ‘동물농장 성우 아저씨’로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그 표현이 싫지 않다.

그동안 출연한 동물의 종류도 셀 수 없이 많다. 개와 고양이는 단골손님이고, 곰, 호랑이, 코끼리, 얼룩말, 영양, 백로, 올빼미, 뱀, 나비, 피라냐, 왕도마뱀 등도 얼굴을 비쳤다.

18년이나 동물 연기를 하다 보니 화면을 보면 동물의 행동이나 표정을 통해 마음을 어지간히 읽을 수 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내가 읽은 그 녀석들의 마음과 대본이 어긋나기도 한다. 그럴 땐 과감하게 내 의견을 제시한다. 제작진 모두가 동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TV 동물농장〉에서 수많은 동물의 연기를 했다. 사고뭉치이면서도 사랑스러운 강아지부터 사람의 손길이 무서운 고양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파충류와 새에 이르기까지. 동물의 성격이나 나이에 맞게 각각 다른 톤으로 연기를 해왔다.

〈위기탈출 넘버원〉이나 〈무릎팍도사〉에서 내레이션 할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TV 동물농장〉 녹음을 하면서 여러 번 울었다. 특히 서너 번은 펑펑 울어서 당일 녹음을 못할 정도였다. 한번은 암으로 죽음이 임박한 개가 실명 위기의 개에게 각막을 이식하는 대목에서 어찌나 슬픈지, 도무지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즐거운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나 내레이터의 웃음이 터지면 시청자들도 재밌게 느낄 수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눈물은 다르다. 내레이터가 울면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우는 것은 관객의 몫이지 내레이터의 몫이 아니다.

ⓒSBS

2011년 1월, ‘당신이 입는 모피의 불편한 진실’ 편을 녹음할 때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화가 나 울었다. 그때 내가 본 영상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살아 있는 너구리를 거꾸로 매단 채 가죽을 벗기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나중에 모자이크 처리된 화면을 접한 시청자들조차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라고 했다.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도망친 동물들을 보살피던 중국 할머니가 한말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실로 짠 옷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하다.” 이 방송 뒤 나와 아내는 모피 옷을 산 적도, 입은 적도 없다.

ⓒSBS

2016년 5월, ‘강아지 공장의 불편한 진실’을 내보낼 때는 나뿐 아니라 모든 제작진이 눈시울을 붉혔다. 6개월간의 취재 끝에 모습을 드러낸 강아지 공장은 말이 ‘공장’이지 동물학대의 현장이었다. 철창 안에 갇힌 개들의 역할은 평생 새끼를 낳는 모견으로 사는 것이다. 환경이 비위생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개들은 뜬장 안에 갇힌 채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늙고 병들어 더 이상 새끼를 낳을 수 없게 되면 가차 없이 식육견으로 팔려나간다.

강제 교미와 인공수정, 불법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1년에 세 차례나 새끼를 받아내는 ‘강아지 공장’을 보면서 ‘인간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함께 출연했던 김생민과 현아도 분노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프로그램은 연예계 안에서 제법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향력 있는 연기자와 가수들이 모피 거부운동에 동참했다. 나 자신이 반려견을 오래 키웠기에 동물들에게 더 애틋한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깨모’에 이어 지금은 ‘마루’와 ‘아라’를 키우고 있다. 우리 가족과 19년을 함께 보낸 ‘깨모’는 안타깝게도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개의 평균수명이 15년 안팎인 점을 감안한다면 살 만큼 살다 갔는데도 ‘깨모’가 떠나간 이후 나는 한동안 마음이 시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녀석이 그립다.

내게 보신탕을 먹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먹지 않는다. 〈TV 동물농장〉의 내레이션을 맡은 사람이 어찌 그 사랑스런 존재들을 음식으로 대하겠는가. 한 번은 지인이 식당을 냈다고 연락을 해왔다. 화환을 보내주려고 가게 이름을 물었더니 ‘○○영양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대략 난감……. 어물어물 둘러대며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보신탕을 파는 곳에 ‘동물농장 성우 안지환’이라고 화환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출연 거부

봄, 가을로 프로그램이 개편되는 방송 특성상 성우들이 한 프로그램에 장기 출연하기란 쉽지 않다. 2년 정도만 해도 길게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사랑의 스튜디오〉를 5년, 〈무릎팍도사〉를 3년 반, 〈위기탈출 넘버원〉을 11년 동안 했다. MBC〈뉴스데스크〉의 〈헤드라인 뉴스〉도 40개월 동안 했다.

〈TV 동물농장〉은 나의 대표작인 동시에 가장 오래 출연한 프로그램이지만 도중에 두 번 쉰 일이 있다. 두 번 다 기간이 길지 않아서, 시청자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다. 첫 번째는 작가와 의견 차이 때문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프로그램 중의 ‘애드리브’와 관련된 것이었다. 애드리브Adlib란 ‘하고 싶은 대로’라는 뜻의 라틴어다. 돌발 상황에 맞춰 출연자들이 하는 즉흥대사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녹화장 분위기가 어수선할 경우 출연자가 “아이구, 또 산으로 갔구나~” 하는 애드리브를 넣어주면 어색했던 장면이 재미난 장면으로 살아난다.

적절한 애드리브는 양념과 같다. 밋밋할 수도 있는 프로그램을 맛깔스럽게 한다. 그런데 실제 요리에서도 양념을 지나치게 쓰면 원재료의 맛을 해치듯, 드라마나 프로그램에서도 애드리브를 과하게 사용하면 역효과가 난다.

〈TV 동물농장〉은 동물들의 심리를 재미있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종종 애드리브를 사용했다. 그런데 시청자들 반응이 좋게 나타나자, 어느 순간부터 아예 대본에 애드리브를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애드리브의 생명은 즉흥성에 있는데, 미리 계산된 애드리브로 감동을 전달하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자연스런 흐름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작가와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못 하겠다’고 선언했다. 출연을 거부하는 동안 시청자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매일같이 시청자 게시판에 들어가 봤다. “전에 그 아저씨가 안 하니 재미 없네”라는 글이 가뭄에 콩 나듯 올라올뿐, 대다수 시청자들은 내가 방송에 출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얼마 뒤 다시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못 이기는 체 복귀했다.

이 과정에서 방송에 ‘대체 불가’란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깨우쳤다. 방송은 생리적으로 모험을 싫어한다. 지금 하고 있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굳이 새로운 사람을 물색하지 않는다. 그걸 자신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끄럽지만, 〈TV 동물농장〉 출연을 거부하던 때의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 더 많은 내용은 책 ‘마부작침’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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