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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식은 "국민들의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한겨레'와 인터뷰를 했다

  • 백승호
  • 입력 2018.04.22 10:38
  • 수정 2018.04.22 12:31

김기식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장에 내정됐을 때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금융개혁의 최적임자” “여의도의 저승사자”라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임명된 지 보름도 안 돼 ‘내로남불’ 정치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한 끝에 결국 사퇴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검찰에서는 피감기관의 돈으로 국외출장을 간 데 대해 수사까지 하고 있습니다. 자칫 법정에 서야 할지도 모릅니다. 정치인 김기식이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그런 처지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금융계의 저승사자가 왔다’는 소리를 들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불과 14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 김기식(52) 전 금융감독원장(이하 호칭 생략)에게 직접 여러 논란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었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지난 19일 간신히 통화가 됐으나, 그는 힘없고 갈라진 목소리로 “무척 힘들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들 사람들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겠느냐”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질문하는 직업이라 몇가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뉴스1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국민들로부터 주목받는 정치인이었다. 도덕성 면에서는 누구보다 깨끗하리라고 믿었는데 피감기관의 돈으로 국외출장을 간 것이 드러났다. 국민들이 실망하는 이유인데.

“국민들의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사실 나는 2012년과 13년 국회의원 임기 첫 두해에는 한번도 외국에 나가지 않았다. 아마 아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외동인 중학생 아들은 2013년 4월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의원직을 관두려고 했다. 주변 동료들이 간곡히 만류하면서 외국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권해서 2014년 1월 처음으로 이른바 의원외교차 국외출장을 갔다. 그 후부터 자기 경계심이 느슨해진 것 같다. 또 나는 로비에 흔들릴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자기 확신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도 피감기관의 초청을 수용하게 한 요인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국민 눈높이와는 달랐다. 그런 점은 참으로 죄송하다.”

국회 임기가 끝나기 직전에 ‘더미래연구소’에 5천만원을 후원금으로 낸 것은 정치자금법 위반이라는 선관위의 유권해석이 나왔다.

“이건 정말 억울하다. 더미래연구소는 김기식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진보 개혁적인 의원들의 모임인 ‘더좋은미래’가 정책 개발을 위해서 만든 연구소다. 참여 의원들이 자기 돈을 1천만원씩 내서 만든 자발적인 싱크탱크다. 운영자금이 부족해서 내부 회의를 통해 1천만원 이상씩 추가 출자를 하기로 결의한 데 따라서 5천만원을 냈다. 1천만~2천만원씩 더 낸 의원들도 있다. 그게 어떻게 통상의 범위를 벗어난 후원이냐. 법원의 판단을 정식으로 받아보고 싶은데 공소시효가 끝난 것이라서 검찰에서 기소하지도 않을 거니까 답답하다. 또 셀프후원 운운하는데 월급은 많지도 않지만 정당하게 노동을 한 대가다. 아주 모욕적인 주장으로 사람을 매도한 것을 보면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불순한 의도가 무슨 뜻인지 등을 더 물었으나 그는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닌 것 같다”며 입을 닫았다.

어떻게 할 건가?

“아무 계획이 없다. 다만 지난 30년간의 내 삶이 이렇게 매도되는 것이 솔직히 마음 아프고, 치욕적이다. 그러나 그런 빌미를 내가 준 것이니 운명이라고 본다. 몇년 전부터 공적인 삶을 그만하고픈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 일이 그런 부담을 덜어낸 측면도 있다.”

 

ⓒ뉴스1

 

‘최단명 금융감독원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물러났지만, 정치인으로서 김기식의 족적은 뚜렷하다. 19대 국회 비례대표로 여의도에 입성한 그는 4년 동안 금융 분야를 관장하는 정무위원회에서 일했으며, 후반 2년은 초선임에도 야당 간사를 맡아 활약했다.

2013년 4월 통과된 ‘자본시장법’ 심의를 위한 정무위 법안심사 소위가 열렸을 때였다. 두번째 회의에서 금융위원회는 자기들이 제출한 이 법안을 원안대로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했고, 여야 의원들도 대충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김기식이 나서 “이 법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의원들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저도 이 법안 통과에 협조하겠다”고 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결국 법안 하나하나에 대한 심사를 벌여서 대폭 수정됐다. 또 민주당 의원이 제출한 법안에 대해 상대당인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 의원들조차 찬성했는데 김기식 혼자서 제동을 걸어서 안 된 적도 있다.

그는 매년 가을 국정감사 때마다 시민단체 모니터단이나 언론사가 선정하는 ‘국감 우수의원’에 뽑혔다. 19대 국회 정무위에서 일한 한 야당의원 보좌관은 “상임위가 열릴 때마다 정부 쪽이나 산하기관 직원들은 김기식 의원의 날카로운 지적에 쩔쩔맸다”며 “오죽하면 김 의원이 당내 경선(서울 강북갑)에서 떨어져 20대 국회 진출이 좌절됐을 때 피감기관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소리가 나왔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원칙적이고 비타협적인 그의 태도는 상대당 의원들뿐 아니라 같은 당 동료들도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수도권의 민주당 한 중진의원은 “김 전 의원이 일은 정말 똑 부러지게 했다”며 “그러나 의원총회나 당 회의 때 면전에서 선배 의원들에게도 잘못을 지적하는 등 직설적이어서 인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도 “그는 남을 비판할 때는 정말 모질게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너그러웠으니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번 사태 때 적극적으로 김기식을 엄호하거나 두둔하는 의원이 없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김기식의 뿌리는 참여연대다. 1994년 9월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1999년에 참여연대로 변경)가 출범했을 때 그는 정책위원회 소속 간사에 불과했으나, 실제로는 참여연대의 산파역이자 기둥이었다. 김기식은 1992년 말 인천에서의 노동운동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사회과학자들에게도 생소한 용어였던 ‘참여민주주의’가 그때 그가 잡은 화두였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각 계층과 세력이 ‘연대’하는 시민운동 단체를 만들어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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