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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을 처벌할 법률은 있다. 다만

권력을 처벌할 시스템이 없을 뿐이다

“진압 중이라 하더라도 경찰에게는 여전히 고유의 일반직무가 있어. 검찰의 주장대로 박재호의 아들을 죽인 게 용역 깡패들이라고 치자. 그럼 경찰은 불법적 폭력을 방치한 게 되지”, “그럼 불법적 폭력을 방지해야 할 작위 의무를 위반한 거죠. 즉 부작위의 위법으로 국가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부작위에 대해 법원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엄격하면서도 또 모호한 판단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무원의 부작위 행위가 ‘현저하게 불합리한 경우’라고 하죠.”, “그게 어떤 경우인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영화 소수의견

 

소설 <소수의견>의 장면이다. 경찰의 공무 중 과실치사 혐의가 입증의 벽에 부딪히자 변호사들은 ‘부작위 살인’ 논변으로 방향을 틀기로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부작위 살인이 성립하는지는 변호사들도 알지 못한다. 작가인 나도 알지 못했고, 내가 자문을 구했던 법조인들도 알지 못했다. 법원에서 부작위 살인이 인정된 경우가 단 한 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발표하던 때까지는.

영화화된 <소수의견>은 박근혜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창고에서 잠을 잤고 소설이 나온 5년 뒤인 2015년에 개봉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사법부 역사상 최초의 ‘부작위 살인’ 판결이 나왔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 뒤 세월호를 혼자 탈출한 이준석 선장에게 대법원이 ‘부작위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이다.
마침내 어떤 경우에 부작위 살인이 성립하는지 명확해졌다. 대법원 판결의 표현을 빌리자면, “법익 침해의 결과 발생을 방지할 법적 작위 의무를 가지고 있는 자가 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그 결과 발생을 쉽게 방지할 수 있었음을 예견하고도 결과 발생을 용인하고 이를 방관한 채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다는 인식을 하면 족하다.”

 

ⓒChung Sung-Jun via Getty Images

 

이준석 선장을 부작위 살인으로 기소했고 무기징역을 받아낸 검찰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세월호 침몰 당시의 ‘부작위’를 감추기 위해 대통령의 지시 시각을 조작한 혐의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각각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이병기 전 비서실장, 그리고 조윤선 전 정무수석 등의 청와대 보좌진만이 기소되었을 뿐이다. 지난주 <문화방송>(MBC) ‘스트레이트’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세월호 유족들에게 ‘무능을 처벌할 법률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방송을 지켜봤다면 이준석 선장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죄인이 된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세월’이 바뀌었다. 작년에 나는 경찰청에서 인권 강연을 의뢰받았다. 2시간 동안 경찰 공무 집행 중에 발생한 폭력의 역사를 줄줄이 나열하는 강연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박근혜 퇴진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조준한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백남기 농민의 사진을 골랐다. 강연이 끝난 뒤 고위직 간부들이 목이 마른 표정으로 나를 술자리로 이끌었다. 그들은 정치를 탓했고 시스템을 탓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을 자꾸 덧붙이면서.

왜 공무 집행 중 사고가 일어나는가? 처벌의 비대칭 때문이다.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부작위는 즉각적으로 처벌받지만, 시민의 안전을 침해하는 부작위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상 공무 집행의 방향을 강요받고 있다. 그 하소연은 잔을 채운 술보다 썼다.

결과 발생을 용인하고 이를 방관한 채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다는 인식. 대법원의 표현에는 난해한 구절이 없다. 무능을 처벌할 법률이 없는 것이 아니다. 법률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권력을 처벌할 시스템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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