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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수영'을 가르치는 파렴치한 어른들

교육이 필요한 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huffpost

오랜만에 애 가방을 챙기다 수영 수업을 예고하는 가정통신문을 뒤늦게 발견했다. 학교에서 받아온 가정통신문은 가방을 팽개치기 전에 미리 꺼내 놓으라니까 이 녀석이 또 깜빡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허둥댈 일은 아니다. 애 학교는 매 학기마다 학교 옆 스포츠센터 수영장에서 반별로 수영 수업이 있는데, 수영 수업에 필요한 준비물만큼은 용케 빠뜨린 적이 없다.

애 학교뿐만 아니다. 애 학교처럼 여건이 되는 학교들은 예전에 없던 수영 수업이 새로 생기거나 예전보다 활발해졌다고 한다. 수영장이 있거나 수영장을 빌릴 수 있는 학교가 얼마나 된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수영 수업의 비중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덕분에 아이들은 신났다. 따분한 학과 수업에 비하면 수영 수업은 물장구를 치며 놀아도 되는 수업일 테니까.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수영 수업이 초등학교 학사일정에 포함되기 시작한 걸까. 박태환 선수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자유형 400m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이후부터? 자기 아이가 제 2의 박태환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학부모들의 요구가 빗발쳐서? 아니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에서 수영은 기본이라서? 모두 아닌 것 같다. 여건이 되는 학교마다 수영 수업의 비중이 높아진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세월호 참사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세월호 참사를 통해 가까스로 얻은 교훈이 고작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야 한다’ 정도라면, 우리는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 셈이다.

ⓒPOOL New / Reuters

마침 지난 수요일에는 세월호 참사 당시 행방이 묘연했던 박근혜의 7시간이 드디어 밝혀졌다. 박근혜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안 침실에 머물렀고,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에도 최순실부터 만났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물론 박근혜가 그 7시간 동안 아무리 깨어 있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일은 아니다. 박근혜 주변에는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이 없었고, 애초에 컨트롤타워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문책을 당하지 않으려고 구조 활동에 동원됐어야 할 해경에게 끈질기게 상황 보고를 요구하며 여러 혼선을 빚었다. 정부 부처 관계자들은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서로 책임을 미뤘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선동 세력의 볼멘소리쯤으로 여겼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여론을 이간질하기 바빴다. 세월호 실소유주로 알려진 유병언을 때려잡으려던 시도는 지금도 웃지 못할 코미디다.

게다가 이들은 파렴치한 장삿속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최순실이 장악했던 K스포츠재단은 세월호 참사 이후 ‘생존 수영’이라는 명목으로 관련 자격증 운영사업을 독점하려 했고, 당시 정부에서는 그 ‘생존 수영’을 2018년부터 일선 학교마다 의무화하려 했다. 지금은 시설 부족 같은 현실적 한계로 흐지부지됐지만, 이미 학부모들 머릿속에는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야 한다’는 엉뚱한 교훈이 단단히 자리 잡았다. 세월호 참사는 수영을 못하는 승객들만 희생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박근혜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월호 참사는 한국형 ‘적폐’를 총망라한 상징적 사건이다. 그리고 그건 안타깝게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씨랜드 화재 사건,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경주 마우나리조트 지붕 붕괴 사건, 판교 환풍기 붕괴 사건, 의정부 아파트 화재 사건, 지난 연말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건까지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차다. 정권이 어느 쪽 차지가 되든 크고 작은 참사는 끊임없이 잇따랐고, 그 참사들은 속속들이 모두 인재였다.

그러면서 어른들은 참사가 하나씩 터질 때마다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화재 예방법을 가르치고, 안전사고 예방법을 가르친다. 자기들은 바뀐 적이 없으면서, 탐욕에 눈이 멀었으면서, 심지어 어린이 보호 구역에서도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으면서, 아이들에게 무려 ‘교육’이란 걸 하고 자빠졌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박근혜나 세월호 참사를 돈벌이에 이용하려 했던 최순실만 파렴치한 게 아닌 것 같다. 목청껏 박근혜와 최순실을 비난하는 어른들부터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PeopleImages via Getty Images

 다시 말해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법도 아니고, 화재를 예방하는 법도 아니고, 자기 혼자 살아남는 법은 더더욱 아니다. 다 같이 살아남는 법부터 가르쳐야 했고, 어른들은 진작 아이들의 모범이 됐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어른들은 과연 어떤가. 모범은커녕 ‘적폐’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교육’이 필요한 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란 얘기다.

다행히 애는 수영 수업을 무척 좋아한다. 한번은 애가 수영을 왜 배워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수영이 재미없냐고 되물었다. 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수영이 재밌다고 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생존 수영’도 재미없으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수영을 못한다고 목숨을 위협받는 세상이라면, 틀림없이 세상이 잘못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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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수영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