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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털어놓은 70년

"긴 세월 죽지 않으니 살았어."

  • 허완
  • 입력 2018.04.03 11:14
  • 수정 2018.04.03 11:18

잃어버린 세월

한라산 동남쪽 중산간의 이름도 고운 가시리 마을. 4월이면 노란 유채꽃이 천지를 물들이고, 가을이면 억새가 흐드러지게 들판과 오름을 뒤덮는다. 70년 전 이 아름다운 들판에서 밭 갈고 말 치던 어멍아방들이 무수히 개죽음을 당했다. 영문도 모른 채 참변을 당하고,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왔다. 98살 한신화 할머니는 4살 아들을 가슴에 묻었고, 86살 오국만 할아버지는 부모님과 세 형님을 한꺼번에 잃었다. 제주의 슬픈 보석, 가시리를 기록한다. 유골 발굴 등 여러 4·3 치유 사업도 소개한다. 

70년 전 한신화 할머니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감옥에서 1년을 살았고, 고아원에 보내졌다는 4살 아들 양봉선을 영영 잃었다.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한라산을 바라보며 애끓는 노래를 부른다.
70년 전 한신화 할머니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감옥에서 1년을 살았고, 고아원에 보내졌다는 4살 아들 양봉선을 영영 잃었다.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한라산을 바라보며 애끓는 노래를 부른다.

“우리 양봉선아 양봉선아, 날 찾아오라. 한라산에 눈이 내렸구나, 날 찾아오라.”

3월 초, 제주 중산간 시골마을을 찾았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북서쪽으로 올려다보이는 한라산은 허연 눈으로 덮여 있다. 손을 뻗치면 바로 잡힐 듯 가깝다. 빼꼼히 열린 시골 농가의 창문을 두들겼다. “할머니, 4·3 이야기 나누려고요.” 한신화(98) 할머니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70년 동안 얼마나 사무치게 아들 양봉선을 그리워했을까. 이야기 마디마디가 애끓는 가락으로 살아났다.

 

4살 아들 잃어버린 한신화 할머니

“밤에 (경찰이) 와서 다 불질렀어. 다 탔어. 내 남편, 어망아방, 어디 간지 몰라. 사방팔방 도망갔어.” 할머니는 4살 아들을 안고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받았다. “가시리 여자 6명, 함께 붙잡혀갔어. 팔을 뒤로 포승줄 묶었어. 책상 위에 올라갔어. 책상을 탁 쳐서 미니까 대롱대롱 매달렸어. ‘살려줍소, 살려줍소.’ 아홉 번을 달아맸어. 바지가 벗겨지고 겨드랑이가 찢어졌어.”

할머니의 한 손가락은 기역(ㄱ) 자로 꺾여 있었다. 다른 손가락은 굽혀지지 않았다.

“꾀부린다고 장작으로 후려쳤어, 뒤로 묶인 손을. 손가락 병신 됐어. 그렇게 매 맞고 1년형 받았어. 말소 끄는 배 타고 육지 형무소 갔어. 전주에서 6개월, 대구형무소에서 4개월 살았어.”

“죄명이 뭔가요?”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것도 몰라.”

한 사람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6살 딸을 데리고 있었어. 그 사람은 무조건 ‘예, 예’ 했는데, 5년이나 받았어. 가시리 마을로 영영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직 죽었나 살았나, 아무도 몰라.”

“할머니 아들은요?”

“우리 양봉선이? 4살이었어. 내가 형무소 갈 때 고아원에 보냈대.”

할머니는 그 뒤로 아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아들이 생각나면, 애절한 가락을 읊는다. “양봉선아 양봉선아, 날 찾아오라.”

무거운 응어리를 안고 할머니 댁을 나왔다. 백 걸음이나 걸었을까. 마을 농협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서니, 오국만(86) 할아버지의 돌담집이다. 할아버지는 70년 전, 피붙이 다섯과 형수님, 여섯 식구를 한꺼번에 잃었다.

“1948년 음력 10월 보름(양력 11월15일)이었어요. 가시리로 토벌대가 들이닥쳤어요. 며칠 뒤 부모님과 열일곱이던 나와 두 동생은 표선의 해안부락으로 내려갔어요. 산으로 피한 세 형님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가족이 영영 헤어졌어요. 큰형님 국림은 26살, 국남 형님 24살, 국효 형님 20살이었어요. 형수님은 호적에 아직 올리지도 않았고요.”

토벌대가 초토화 작전을 시작한 그날 11월15일 하루에만 30명의 마을 주민이 죽임을 당했다. 10살 미만 아이가 9명, 60살 이상 노인이 10명, 21살 청년 1명을 빼고는 나머지 10명이 모두 부녀자였다. 발 빠른 장정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여섯 식구 희생당한 오국만 할아버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4·3추모공원의 비석에 희생자 이름이 새겨 있다. 왼쪽 3개에 빼곡히 적힌 가시리의 희생자는 420명으로, 표선·성읍·세화·토산 등 다른 4개 리의 전체 희생자(330명)보다 훨씬 많다.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4·3추모공원의 비석에 희생자 이름이 새겨 있다. 왼쪽 3개에 빼곡히 적힌 가시리의 희생자는 420명으로, 표선·성읍·세화·토산 등 다른 4개 리의 전체 희생자(330명)보다 훨씬 많다.

 

한 달 남짓 지난 12월22일, 수용소 생활을 하던 표선국민학교에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표선 청년들로 조직된 민보단 단원들이 대창을 들고 우리 주위를 둘러쌌어요. 가족이 모두 내려온 식구들만 옆으로 나가 따로 모이라고 하더군요.”

“70년 전 일인데, 그때 기억이 뚜렷한가요?”

“기억이라고요? 오늘 일처럼 생생해요!”

“양쪽으로 무리를 갈라놓고 마주 보도록 세웠어요. 우리는 도피자 가족이었지요. ‘저쪽 무리 중에서 도피자 가족이 없느냐’고 물었어요. 누군가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저기 강덕근이도 아들이 안 내려왔어요.’ 장애인이던 그분, 강덕근도 우리 쪽 도피자 무리로 끌려왔지요.”

할아버지는 그 ‘누군가’를 알지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순진한 분이어서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던 것뿐이거든요. 죽으러 가는 사람이 무슨 감정이 있어서 일부러 남까지 끌고 가려 했겠어요.”

할아버지는 호적 나이가 어리게 기재된 덕에 다 죽은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15살 아래와 젖먹이 엄마는 옆으로 나오라고 하더군요. 실제 내 나이가 17살이었는데, 호적엔 14살로 돼 있거든요. 나와 동생들만 살았어요. 부모님은 그날 돌아가셨고요.” 그렇게 도피자 가족으로 찍혀 표선의 버들못 근처에서 한날한시에 총살당한 이들만 76명에 이른다. 가시리에서 그날(12월22일, 음력 11월22일) 제사를 지내는 집이 유독 많은 까닭이다. 할아버지가 강덕근 가족의 슬픈 사연을 더 보탰다. “아버지가 끌려가니까 강덕근의 맏딸이 주저앉아 통곡했어요. 열다섯이 안 된 아이였어요. 그러자, (경찰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버지 따라 같이 가라’고 도피자 대열에 집어넣었어요. 누군가의 고자질 때문에 아버지와 큰딸이 다 죽은 거예요. 지금은 작은딸 하나만 이웃 신흥리 마을에 살고 있어요.”

그날 헤어졌던 세 형님의 이야기를 물었다. “셋째 형님은 제주 비행장에서 죽었느니, 수장됐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어요. 숨진 게 1949년 8월12일이라는 말이 있어, 그날 제사를 모셔요. 큰형님은 붙잡혀 경인 지역에서, 둘째 형님은 호남에서 희생됐다는 소문만 있어요. 사형 언도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거든요. 그래서 두 분은 생일날 제사를 모십니다. 아버지가 해안으로 내려갈 때 들고 간 궤짝이 있어요. 그 궤짝 문에 아버지가 아들들 생일을 적어놓으셨더군요. 그게 없었다면 형님들 생일도 모를 뻔했어요.”

할아버지는 그날 버들못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했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내가 5살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와 함께 총살당한 분은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니였어요. 무슨 죄를 지어 총살을 당하셨나요. 죽을 죄명을 붙이라면, 우리 어머니였다는 것밖에 없잖아요. 어머니 성함이 고운기인데, 가슴이 찢어져요.” 

제주도 제주시 4·3평화공원에 설치된 행방불명인 표석의 전경. 4·3 희생자 가운데 주검을 찾지 못한 3806명을 위해 개인 표석을 놓았다. 
제주도 제주시 4·3평화공원에 설치된 행방불명인 표석의 전경. 4·3 희생자 가운데 주검을 찾지 못한 3806명을 위해 개인 표석을 놓았다.  ⓒ한겨레

 

남편·시아버지 총살당한 안정생 할머니

4·3이 일어나던 해, 가시리의 안정생(93) 할머니는 둘째 아이를 가진 23살 만삭의 몸이었다. 할머니의 한 서린 이야기도 그해 음력 10월 보름, 토벌대가 들이닥치던 날로 시작한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도망갈 데가 없었어. 우리 하르방(남편)은 28살이었는데, 그날 표선으로 끌려갔어. 음력 12월4일인가 5일, 표선에서 성읍으로 가는 길가에서 총살당했다고 해. 시아버지는 76명이 총살당한 버들못에서 함께 당했지. 그 얼마 뒤 둘째 아들을 낳았어. 유복자야.” 할머니는 “총살당해 죽었으니 혼이 달아났는지, 70년 되도록 하르방이 한 번도 꿈에 안 나타난다”고 말했다. “긴 세월 죽지 않으니 살았어. 명이 기니까 산 거야. 이제 죽어서 만나도 하르방이 내 얼굴 못 알아보겠지. 죽은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데. 하르방 사진 한 장 있던 것도 잃어버렸어. 큰아들이 아방 많이 닮았어. 슬퍼.”

오문평(78) 할아버지 가족은 4·3 때 희생을 당하지 않았다. 가시리에서 보기 드문 경우다.

“아버지가 8형제를 모두 데리고 표선 해안으로 내려갔어요. 사돈의 팔촌까지 한 명이라도 산에 올라간 사람 있으면 다 죽었는데, 아버지 덕분에 형제가 모두 산 거지요.”

“사촌도 다 내려갔나요?”

“어, 우리는 사촌이 없었어요.”

할아버지의 아내인 김순애(76) 할머니도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사촌까지 다 내려갔어요. 그래서 살았던 거예요. 우리 형제는 그때 나 혼자였는데, 그 뒤로 8남매가 태어났어요.”

4·3 때 세상을 떠난 표선면의 전체 희생자 수는 공식 집계로 750명, 그중 절반이 넘는 422명이 가시리 출신이다. 행방불명자까지 합치면 가시리 전체 주민 3분의 1가량인 450명 이상이 참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국만 할아버지에게 왜 가시리에서 희생이 많았는지 물었다.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치안이 미치지 못하는 벽지였기 때문이지요. 우리 마을에 경찰지서가 있었다면 그렇게 안 당했을 거예요. 지서가 있던 근처 성읍리는 희생자가 별로 없었거든요. 늘 얼굴 대하는 이웃 사람을 어떻게 참살할 수 있겠어요. 여기는 경찰이 지키러 온다면서 괴롭히기만 했어요. 산에 숨은 이들한테 식량을 줬다느니 하면서 마구 두들겨패니, 경찰이 온다 하면 젊은이들이 무조건 산으로 도망갔어요. 누가 경찰을 좋아했겠어요. 우리 세 형님도 전혀 무학이에요. 좌익사상, 그런 것 몰라요. 국민학교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영문도 모른 채 빨갱이라 구박받고”

이유 없는 개죽음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집안에서 국민학교 입학한 것도 할아버지가 처음이었다. “학교에 늦게 들어갔어요. 4·3 때 17살이었는데 6학년에 다니고 있었어요. 국민학교도 졸업 못했지요. 4·3 때문에….” 할아버지는 지난 70년 세월이 너무나 시리고 아프다고 했다. “10여 년 전까지도 4·3 이야기를 마음 놓고 나누지 못했어요. 이웃 부락에서도 우리 가시리 마을을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아무 영문도 모르고, 빨갱이라고 한없이 구박받으며 평생을 살았어요.”

 

가시리 마을의 4·3 순례

발길 닿는 곳마다 참혹한 학살 흔적이…

가시리 마을의 4·3길 순례는 특별하다. 참변을 겪은 오태경(87) 할아버지와 정덕재(82) 할아버지가 직접 해설사를 맡는다. 두 할아버지는 외사촌 간이다.

오태경 할아버지는 “4·3 때 집이 한 채도 남김없이 다 타고, 마을이 완전히 파괴됐다”고 말했다. “가족 중엔 형님이 행방불명이고, 형수님이 1년형을 살았어요. 이웃 신흥리로 피신 가 있던 사촌형수님이 식량 가지러 마을에 왔다가 들판에서 사살당했고, 사촌 형님과 두 아들은 형수님 주검에 흙이라도 덮어주려고 마을로 들어왔다가 붙잡혔어요. 지금 해비치호텔이 있는 표선 백사장에서 총살당했어요.”

두 할아버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

마을 고지대인 고야동산과 마두릿동산을 먼저 찾았다. 경찰이 오는지, 주민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경찰을 ‘검은개’, 군인을 ‘노란개’라고 했어요. 괴롭히니까 미워했던 거예요. 이곳 동산에 대나무를 세웠다가, 멀리 경찰이 들어오는 게 보이면 보초가 대나무를 눕혔어요. 그때는 나무가 많지 않아, 아래쪽 마을에서 동산이 훤히 보였거든요. 대나무가 누우면, 들판에서 일하거나 집에 있던 주민들이 모두 산으로 도망갔어요.”

‘흙 붉은 동산’이란 뜻의 달랭이모루로 발을 옮겼다. 안흥규씨 가족 12명이 끔찍하게 몰살됐던 곳이다.

“큰각시 고신춘과 작은각시 강매춘, 그리고 21살부터 갓난아이까지 자식 6명, 모두 8명이 성읍지서로 끌려가던 중 총살당했어요.”

“왜 여기서 죽였나요?”

“모르지요. 사람 죽이는 것을 버러지 죽이는 것보다 쉽게 생각했으니까요. 안씨의 누님 부부와 두 자식 등 4명도 함께 당했어요.”

지금 가시리 사무소 앞마당에는 안씨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1949년 5월인가 복구령이 내렸어요.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리사무소 근처에 작은 성을 쌓았고, 그 안에 이엉을 이어 비를 피했어요. 나중에 바깥으로 더 크게 성을 두르고 그렇게 수년 동안 집단생활을 했어요. 안씨가 그때 이장을 맡아 마을 복구에 헌신했어요.”

가시리에서 발원해 세화리로 흘러가는 가시천에도 슬픈 사연이 묻어 있다. “토벌대가 들어오던 날, 60대인 안만규 할아버지와 김인하 할머니가 3살 손자와 1살 손녀를 데리고 가시천 아래에 숨어 있었어요. 아이들이 소리를 냈던 거예요. 토벌대가 수류탄을 던졌고, 그 자리에서 네 식구가 즉사했어요. 아들 부부는 먼저 피신해서 살아남았어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새가름과 종서물을 찾았다. 4·3 이전까지 각각 20여 가구, 10여 가구가 정답게 살던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 대다수가 참변을 당한 겁니다. 돌아올 사람이 없으니, 마을이 사라진 거지요. 새가름에는 고대효씨 부친과 문사봉씨 2가구가 다시 들어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떠나고 말았어요. 외로움과 상처를 못 이겼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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