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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4·3 취재한 기자의 뒷얘기

이젠 ‘치유’를 얘기할 때

  • 김종민
  • 입력 2018.04.03 10:48
  • 수정 2018.04.03 11:25

제주4·3은 탐라 개벽 이래 제주도에 유례를 찾기 힘든 희생을 몰고 왔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건이 전개되는 7년7개월 동안 제주도민들은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다.

 

고립무원의 40년

군경 토벌대는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넉 달 동안 젖먹이부터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저질렀다. 정부 기구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는 2003년 12월 진상조사 보고서에서 희생자 수를 2만5천 명에서 3만 명가량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한다. 4·3의 비극은 엄청난 희생자 숫자에만 있지 않다. “총에 맞은 죽음은 고통의 시간이 짧으니 다행스러운 경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마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참혹한 일들이 잇달아 벌어졌다.

이승만 정권과 뒤이은 군부독재 정권은 이같은 엄청난 피해를 논의조차 못하게 막았다. 제주도민의 입을 틀어막은 결과, 국민 대다수는 4·3을 알지 못했고 유족들은 수십 년 동안 억울하다는 호소 한마디 하지 못했다. 1987년 벌어진 ‘6월항쟁’ 이후에야 비로소 말문을 틀 수 있었고, 40주년인 1988년부터 조금이나마 전국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한 작가는 광주항쟁을 다룬 소설집에서 외롭게 고립돼 있던 그때를 ‘끝내 아무도 달려와주지 않았던 열흘’이라며 섭섭한 마음을 토로한 바 있는데, 그 표현을 빌린다면 고립무원의 제주도민들에게 그간의 세월은 ‘끝내 아무도 달려와주지 않았던 40년’이었다.

1987년 신문사에 입사한 필자는 4·3 40주년인 1988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줄곧 4·3을 취재했다. 필자가 처음부터 증언 채록에 힘쓴 까닭은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실하고 관변 자료가 너무 왜곡돼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제주에서 일어났던 여러 민란처럼 그날의 사연들이 풍문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생생한 증언들을 신문에서 널리 알리고 독자들의 검증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증언들이 훗날 사료로 기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과연 그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진실의 바닥을 알고 싶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1950)은 함께 겪었던 사건이라도 사람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해 보여준다. 그러나 여러 증언을 사료와 비교해 분석하고 검증한다면 진실에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뉴스1

 

어르신들은 필자의 집요한 질문에 기억조차 하기 싫은 옛일을 마지못해 말씀하시지만, 자신의 사연이 신문에 소개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증언 채록에 몰두했다. 그렇게 제주도 모든 마을을 취재하다보니 7천 명가량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게 됐다.

 

숨이 막혀오는데 아무 병이 없다니

처음엔 증언 채록이 힘들었지만, 점차 이력이 붙으니 요령이 생겼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 앞에서도 허벅지 한번 꼬집으면 감정을 억누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제정신으로는 듣고 글로 옮기기 힘든 이야기도 많았다. 부모가 총살을 당할 때 맨 앞줄에 서서 박수를 치고 만세 부를 것을 강요당한 사람들, 굴속에 숨었던 가족들이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들켜 몰살당하는 모습을 요행히 밖에 나왔다가 흐느끼며 바라봤던 사람들, 토벌대가 인근을 지날 때 들킬까 두려워 우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가 자기 자식을 숨지게 한 어머니. 이들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마 소개하기 어려운 참혹하고 엽기적인 별의별 사연을 많이 들었어도 그럭저럭 견뎌왔지만, 어떤 증언들은 허벅지를 꼬집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언가가 가슴에서 울컥 쏟아져나오는 듯해 서로 말을 못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방바닥 또는 천장만 바라본 적도 있다. 10대 초반에 4·3을 겪었던 분들의 증언을 들을 때가 주로 그랬다. 당시 성인이던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하는 ‘소년’의 증언을 듣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당시 11살이던 한 증언자는 숨어 있던 굴이 군인들에게 발각되자 급히 도망쳤지만, 어린 동생은 붙잡혀 총살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 군인들을 대한민국 국군이라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현충일에 절대로 태극기를 달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또 휴가 나온 아들의 군복 입은 뒷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던 씁쓸한 기억도 털어놨다. 가족 대부분을 잃고 어머니와 둘이서 살아남은 12살이던 한 증언자는, 군인들이 현무암과 흙으로 지은 집에 불을 질러 돌이 빨갛게 변하던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붉은 벽돌집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8살 어린 나이였던 한 증언자는 뒤뜰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경찰이 정문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을 보고 무서워 뒷문 뒤에 숨었다. 그곳에서 경찰이 집에 불을 지른 뒤 방 안에 있던 할아버지(당시 54), 아버지(28), 어머니(29), 큰동생(7), 작은동생(5)을 총으로 쏴 죽이는 모습을 넋 나간 채 숨죽이며 지켜봤다. 경찰이 돌아간 뒤 불길 속에 뛰어들어 애기구덕 안에 있던 막내동생(1)을 꺼냈으나 곧 굶어죽었다. 그는 가족들을 총으로 쏘고 집에 불을 지르던 경찰관 3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눈물을 흘리거나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은 채 마치 남의 일 말하듯 담담하게 증언했다. “난 지금도 그 경찰들이 우리 가족을 눈을 뜨고 쐈는지, 감고 쐈는지 궁금합니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도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그의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남편의 입버릇은 ‘열다섯 살만 됐어도…’입니다. 남편은 ‘내가 열다섯 살만 됐어도, 그 정도의 힘만 있었더라면 주검을 마당으로 끌어내 불에 타는 것을 막았을 텐데…’라고 수시로 중얼거립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울컥 올라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런 ‘소년’들의 증언을 듣는 날엔 밤에 몸살을 앓았다. 유족들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숨이 막혀오는데 의사는 아무런 병이 없다고 하니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이 상처를 어찌할 것인가.

 

너무나도 먼 ‘4·3 치유’

‘치유’를 뜻하는 ‘힐링’(healing)이라는 영어 단어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제목이 될 정도로 보편화되었고,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트라우마’(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낯선 단어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치유 또는 트라우마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다.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만들어 4·3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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