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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03일 10시 39분 KST

미국은 제주 4.3의 또다른 가해자였다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

70년 전, 그날들

제주4·3 70주년이다. 그해 죽음을 피해 태어나 살아남은 이들이 칠순을 맞았다. 70년. 희생자들의 주검이 흙으로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극우 반공국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여전히 그날의 상처에 괴로워하며 몸서리치는 유족들에게 대한민국은 얼마나 떳떳한 나라일까. <한겨레21>이 다시 4·3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이유다. 

한겨레
제주도 제주시 4·3평화공원에 설치된 행방불명인 표석의 전경. 4·3 희생자 가운데 주검을 찾지 못한 3806명을 위해 개인 표석을 놓았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해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6만5천여 명의 병력과 각종 중화기를 제주도에 배치해 미군과 전투에 대비했다. 공출에 시달려온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군사기지 건설에 강제 동원됐다. 미군기는 제주도 상공에 나타나 소이탄을 투하하고, 미잠수함은 제주도 주변 해역에 출현해 선박들을 격침해 수백 명이 숨지고, 제주도의 산업시설이 파괴됐다.

해방은 ‘죽음으로부터의 탈출구’였다. 해방 직후 제주 지역에서는 청장년들을 중심으로 자치기구 건설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중앙의 움직임에 발맞춰 제주 지역에서도 1945년 9월 들어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이어 이 조직은 제주도 인민위원회로 재편됐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주도한 인민위원회는 치안 활동은 물론 자치 교육에 힘썼다. 미군정(제59군정중대)이 제주도에 들어온 것은 한반도가 해방되고 3개월 가까이 지난 11월9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해방이 되자 일본 등지로 떠났던 제주도민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주도 인구는 해방 전해인 1944년 21만9천여 명에서 1946년 27만6천여 명으로 2년 새 5만6천 명 이상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은 전국적인 대흉년과 맞물려 사회경제적으로 제주 사회를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1946년 제주도의 보리 수확량은 해방 이전인 1943과 1944년에 견줘 각각 41%, 31%에 그쳤다. 제조업체의 가동 중단과 높은 실업률, 미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제주 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기근이 심했던 1946년 여름 제주섬을 휩쓴 콜레라는 2개월여 동안 최소 369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군정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때 제주도민들을 압박하고 수탈하는 데 앞장섰던 경찰과 관리들을 해방 후에도 기용했다. 이들은 후술할 ‘3·1사건’ 이전 각종 불법적 이권에 개입해 미군정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낳았다.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보루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제주4·3특별법)은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대로 3·1사건은 4·3의 도화선이었다.

1947년 3월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는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가 열렸다. 행사는 2만5천~3만여 도민이 대회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렸다.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도한 기념대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벌이던 중 관덕정 광장에서 이를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채여 넘어지는 사고가 터졌다. 경찰은 이를 그냥 지나쳤다. 항의하는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가는 순간, 다른 지방에서 온 경찰이 그들에게 총을 쏘았다. 6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다. 광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이들 가운데는 초등학생과 젖먹이를 안은 20대 젊은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경찰은 책임자 처벌은커녕 그날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미군정 경무부는 경찰을 추가 파견해 참가자 검거에 들어갔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3월10일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관 총파업을 벌였다. 발포 책임자와 발포 경찰의 즉각 처벌 등 6개항의 요구 조건을 내건 총파업에 제주도청을 비롯한 학교, 은행, 우체국 등 166개 기관 단체, 제주 직장인의 95%에 이르는 4만여 명이 참여했다. 현직 경찰관들도 파업 대열에 참여했다.

경찰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3월14일 제주도 방문에 맞춰 파업 참가자 대량 검거에 나서 닷새 만에 200여 명을 검거했다. 조 경무부장은 3월20일 담화문을 발표해 경찰 발포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이날 총성이 4·3이라는 커다란 비극으로 가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3·1사건과 3·10 민관 총파업의 영향은 컸다. 마침 1947년 3월12일 미국은 냉전 체제 시작을 공식화하는 선언이라 할 수 있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리스 내전으로 촉발된 이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임했다. 이 독트린은 미군이 제주도 사태에 개입할 논리적 근거가 됐다. 한반도 남쪽 끝 제주섬에서 3·1사건 발포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민관 총파업이 벌어지던 때, 미군정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했다.

먼저 제주도지사가 교체됐다. 그때까지 제주도지사는 제주 출신 박경훈이었지만, 1947년 4월 극우파로 평가받는 외지 출신 유해진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단체나 인사들을 ‘좌파’라 몰아붙이며 우익 강화 정책을 폈다. 그의 행정은 제주도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서청)이 제주도에 들어와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고, 자금 모금 명분으로 테러를 일삼았다. 심지어 서청 제주도단부 간부는 1947년 11월, 미군정에 제주도를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며 이를 입증해 보이겠다고 할 정도였다. 미군 방첩대가 1947년 12월 입수한 정보를 보면, 경찰이 이른 시일 안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하면 모든 단체가 제주 경찰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견할 만큼 제주 사회는 혼돈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

한겨레/국사편찬위원회
윌리엄 하지 미 군정장관이 1948년 5·10 총선거구성된 제헌의회 개원식(5월31일)에서 연설하고 있다. 

 

대량 검거 바람으로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1948년 2월 현재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사람은 365명으로, 3.4평 크기의 방에 35명이 수감될 정도였다. 1947년 3·1사건 이후 1948년 4·3이 터지기 직전까지 2500여 명이 검거됐다.

주한미군정청 특별감찰실은 유해진을 특별감찰해 1948년 3월 유해진의 경질을 건의했지만, 5·10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기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1948년 2월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제주 지역에서도 검거 바람이 불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와해 위기에 몰렸다.

이 와중에 3월6일 조천면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원생 김용철(21)이 경찰 고문으로 숨졌다. 중학원생들과 주민들은 지서 앞에 몰려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분노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3월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대정면 영락리 양은하(27)가 숨졌다. 경찰의 잇단 고문치사 사건은 3·1사건 이후 도지사의 독단적 행정, 대량 검거 등으로 부글부글 끓던 민심에 불을 지폈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5·10 단독선거 반대’를 기치로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350여 명으로 추정되는 무장대는 단독선거 반대를 내걸고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 등을 공격했다. 이들이 보유한 무기는 일본군이 쓰던 99식 소총 등 30정 안팎과 죽창이었다. 경찰과 서청의 제주도민에 대한 폭압적 행동은 봉기의 촉매제 구실을 했다. 당시 이인 미군정 검찰총장은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 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다”라고 진단했다. 언론은 ‘경찰의 민심 이반’을 지적하며, 서청을 해산하고, 사법·행정·경찰 수뇌부의 인적 재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딘 군정장관이 도지사 유해진을 경질한 것은 4·3무장봉기가 일어나고, 5·10선거가 끝난 뒤인 1948년 6월이었다.

딘 군정장관은 4월16일 경비대의 합동작전을 명령하는 등 제주도 사태 진압을 지휘했다. 제주도 주둔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과 제주도 인민유격대(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이 4월 말 평화협상을 벌여 사태 해결에 합의했으나, 미군정의 무력 진압 방침으로 합의가 깨졌다. 이즈음 미군정은 4월27~28일 주한미군사령부 작전참모의 제주도 현지 시찰과 지도, 29일 딘 군정장관과 광주 주둔 미국 제6사단장 워드 소장의 제주도 동시 시찰 등의 활동에 나서며 긴박하게 움직였다. 딘 군정장관은 선거를 닷새 앞둔 5월5일에도 안재홍 민정장관 등 미군정의 한국인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도 현지에서 대책회의를 열 정도로 제주도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반면 무장대는 선거일이 다가오자 선거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선거 방해에 총력을 기울였다. 선거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 가운데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 등 2개 선거구가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선거의 성공이 미사절단의 ‘핵심 임무’라며 독려하고, 딘 군정장관이 제주도를 2차례나 방문하는 등 선거 성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선거는 실패로 끝났다.

당시 5·10선거 반대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까지도 가세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은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단독정부 반대 남북협상 추진을 내걸고 통일운동을 주창한 김구·김규식 등의 노선, 다른 하나는 미군정과 보조를 맞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노선이었다.

미군정의 강경 진압 강도는 더 세졌다. 5월12일, 미 극동사령부는 제주도 소요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구축함을 급파했다. 또 미군정은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5월 중순께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외국의 ‘전투 현장’에 현지 군대가 아닌 미군 지휘관을 진압작전 책임자로 파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5·10선거 이전 하지 장군이 미군 개입 금지를 지시했던 것과 달리 선거가 끝난 뒤에는 야전군 지휘관 출신인 브라운 대령을 파견한 것이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 

제주4·3연구소 조사반이 1992년 2월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중산간 ‘다랑쉬오름’ 주변 동굴에서 발견한 4·3 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들.

 

“상공에는 미군 정찰기가 날고, 제1선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미군 지프가 질주하고 있으며, 해양에는 근해를 경계하는 미 군함의 검은 연기가 끊일 사이 없이 작전을 벌였다”는 언론 보도(<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6일치)가 나올 정도로 미국은 제주도 사태에 깊숙이 개입했다.

브라운 대령은 “(무장 대립의)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내 임무는 진압뿐이다”라며 2주면 이 사태를 평정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작전 아래 진행된 경비대 11연대의 ‘비민분리’ 정책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6월 중순까지 붙잡힌 제주도민은 6천여 명에 이르렀다. 6월18일 강경진압 작전을 벌이던 11연대장 박진경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브라운 대령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제주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6월23일 재선거도 무기한 연기됐다. 두 차례에 걸친 선거 실패는 향후 벌어질 강력한 토벌 작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11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 병력을 증원했다. 제주도 주둔 9연대장 송요찬은 10월17일 해안선에서 5km 이상 내륙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사실상 고립무원의 섬이 된 제주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와 주민들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하고, 방화와 학살을 일삼았다. 해안마을로 소개된 주민들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4·3 시기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5개월여 동안 방화와 학살이 제주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1948년 12월 말 진압 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이 이끄는 2연대도 토벌 작전을 계속했다. 1949년 1월17일 하루에만 300여 명을 학살한, 4·3 시기 대표 학살 사건인 ‘북촌 사건’은 2연대가 저질렀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북촌 사건 나흘 뒤인 1월21일 국무회의에서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하라”고 지시했다. 제주섬은 ‘죽음의 섬’으로 변해갔다.

미국은 4·3 전개 과정에서 직간접으로 개입했다. 정부 수립 이전에는 직접 최고 지휘관으로 진압작전을 주도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이 초토화 시기인 1948년 11월 제주도 토벌을 격려했다. 송요찬 9연대장은 미군 조종사의 정보 제공에 감사를 표할 정도였다. 초토화 시기 소련 잠수함의 제주도 연근해 출현설이 떠돌았다. 그때마다 외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모두 가짜뉴스였다.

 

이승만 정부 집단처형 승인

4·3 진압 과정에서 서청은 군인으로, 경찰로 변신해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4·3을 체험한 이들은 서청을 가리켜 “인간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청은 1948년 11월9일 김두현 제주도청 총무국장을 고문치사했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무장대의 공격으로 인명 피해도 많았다. 1948년 11월 이후 무장대는 토벌대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구좌면 세화리, 남원면 남원리와 위미리 등 일부 마을을 습격해 학살과 방화를 하는 등 큰 피해를 줬다.

1949년 6월7일 이덕구 무장대 사령관이 사살됐다. 중학원 교사 출신인 이덕구는 1948년 8월 김달삼이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 참석을 위해 제주를 빠져나간 뒤 무장대 사령관이 된 인물이다. 그의 죽음은 사실상 4·3의 종식을 뜻했다. 그러나 ‘붉은 섬’으로 규정된 제주도민에게 정부의 탄압은 가혹했다. 1949년 10월2일에는 이승만의 승인에 따라 249명이 정뜨르비행장(제주국제공항)에서 집단처형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와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됐다. 1950년 7월16일과 8월20일 두 차례에 걸쳐 대정면 섯알오름 옛 일본군 탄약고 터에서 계엄군이 예비검속한 250여 명이 집단학살됐다. 또 한국전쟁 시기 제주에서 다른 지방 형무소(교도소)로 이송된 4·3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가운데 만기 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 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전쟁이 난 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행방불명됐다. 제주4·3은 제주도경찰국이 1954년 9월21일 한라산 입산통제 지역인 ‘금족 지역’을 전면 개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다.

4·3이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것은 인명 피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4·3 희생자로 결정한 인원을 보면, 2017년 7월25일 현재 희생자 수는 1만4232명이다. 희생자에는 사망자(1만245명), 행방불명자(3575명), 후유장애인(164명), 수형인(248명)이 포함된다. 그러나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희생자 수를 2만5천~3만 명으로 추정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이르는 수치다. 정신적·물적 피해는 마을 공동체의 파괴, 공공시설과 산업부문의 파괴 등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영원히 사라진 ‘잃어버린 마을’도 100여 곳에 이른다. 연좌제는 제주도민들에게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군경 토벌대에 희생됐거나 수형 생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감시당하고, 공무원 임용이나 사관학교 입시 등 각종 시험, 공기업 입사, 국내외 여행과 출입국 과정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다.

 

4·3 추념식 참여한 유일한 대통령

이제 4·3 70주년을 맞았다. 4·3 추가 진상조사를 통해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역사적 정명(正名·올바른 이름을 찾음)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약속했던 4·3 희생자들 보상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결돼야 할 과제다. 화해와 상생은 지역사회 발전의 정신적 토대다. 비극적 역사를 통해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되새기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키우는 여정이 제주도민들에게 남아 있다.

 

왼쪽부터 송요찬, 함병선, 이승만.

4·3의 가해자들

송요찬, 함병선, 이승만… 그리고 미국 


7년7개월 동안 이어진 제주4·3으로 제주도민 10명 가운데 1명이 희생됐다. 수많은 죽음과 엄청난 재산 피해 등을 가져온 4·3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2003년 12월 발표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집단 인명 피해 지휘 체계를 볼 때, 중산간 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 작전을 폈던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보고서가 언급한 9연대장과 2연대장은 송요찬과 함병선이다. 실제 초토화 시기 이들이 제주 토벌 작전을 진두지휘했고, 이 와중에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미군 정보보고서(1949년 4월1일)조차 “제9연대는 모든 주민이 게릴라에 도움과 편의를 주고 있다는 가정 아래 민간인 대량학살 계획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또 9연대에 이어 들어온 2연대의 작전 시기인 1949년 1월17일에는 하루 300여 명이 학살된 이른바 ‘북촌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2연대 3대대다.

그러나 인명 피해의 최종 책임자는 보고서에서도 밝히듯 이승만 대통령이다. 보고서는 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전남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다.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강경 작전을 지시했음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책임도 거론된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1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4·3은 미군정 시기에 시작돼 한국전쟁이 끝난 뒤 막을 내렸다. 보고서는 “4·3사건의 발발과 진압 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며 미군 대령이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되고, 진압 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는 한편 로버츠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은 초토화 시기 9연대장의 지휘를 높게 평가했다고 밝혔다. 주한미대사 무초와 참사관 드럼라이트 등도 지속해서 4·3의 전개에 관심을 가지고 이 대통령 등을 만나 주의를 환기시켰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2016년 제주4·3평화포럼과 지난해 제2회 제주4·3평화상 시상식 참석차 제주를 찾았을 때 “이 사건은 미국이 자신의 명령으로 발생한 행위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지고 있을 때 발생했다. 4·3 당시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던 미국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말했다. 이들 외에도 제주도민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던 당시 경찰과 서북청년단도 가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