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43년째 자리를 지키는 평양냉면집, 을밀대의 역사

평양냉면집 을밀대 since1976

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평양냉면집 을밀대 since1976

한겨레/류우종 기자
[을밀대 주방을 맡은 윤민정 주방부장이 면을 뽑고 있다. 을밀대 면발은 쫄깃한 식감과 은근히 구수한 맛이 뛰어나다. 메밀과 전분을 상황에 따라 적절한 비율로 섞는다고 한다.]

10여 년 전 평양 출장을 갔을 때다. 저녁을 대접받는 자리에서 북쪽 대표에게 말했다. “서울에 오시면 꼭 연락 달라. 옥류관 못지않은 냉면집을 알고 있다. 그 이름도 을밀대(乙密臺)다.” 북쪽 대표는 그저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우리 일행이 평양을 떠나기 전날 일정에 없던 을밀대 관광을 시켜주었다. 모란봉 을밀대 오르는 길은 자작나무 숲길이었다. 평양 체류 동안 우리를 안내했던 김일성대학 출신의 ‘김 동무’는 비로소 여유가 생겼는지 톨스토이와 모파상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며 수줍어했다.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 원작의 미국영화 '닥터 지바고'의 명장면들을 과장스레 전해주었을 때는 자작나무 등걸을 쓰다듬으며 귀를 기울여주었다. 을밀대에서 바라본 대동강은 유유히 아름다웠다. “이 선생님, 이래서 남남북녀라고들 하는 건가요? 호호.” “왜 아니겠습니까? 하하.” 평양의 김 동무는 잘 있을까?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여 앞둔 주말, 김 동무에게 냉면 한 그릇 대접하는 마음으로 평양냉면집 을밀대에 들어선다.

# 마포구 염리동 을밀대는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평양냉면집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집이다. 봄여름으로 점심때면 골목길을 따라 긴 줄이 늘어서는 진풍경을 매일같이 연출한다. 한여름 기준으로 하루 1300여 그릇의 냉면이 팔리고, 하루 매출이 2천만원을 웃돈다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한겨레/류우종 기자
성공한 음식점이 대개 그렇듯 을밀대의 성공 비결도 ‘맛’이다. 냉면은 만들기 까다롭고 일정하게 맛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민감한 음식. 그래서 정통 냉면집으로 성공하려면 특단의 각오와 정성이 필요하다. 40여 년 역사의 을밀대는 그것을 해냈다고 볼 수 있다. 단골들의 ‘을밀대 입문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처음 먹을 때는 밍밍해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다가 몇 번을 거듭 먹고서야 서서히 맛을 알게 되고, 급기야는 중독의 기미마저 느끼게 된다.”

1976년 변두리 동네 분식집으로 시작한 을밀대는 당연히 널리 알려진 집이 아니었다. 1980~90년대 식도락 문화가 유행하면서 점차 소수의 미식가 문인, 언론인, 교수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고 매스컴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을 전후로 남북관계가 호전된 것이 결정적 전기였다. 많은 평양냉면집이 호황을 누렸고 탈북자 출신들이 차린 북한 음식점이 인기를 끌었지만, 평양을 떠올리기 안성맞춤인 옥호에다 뛰어난 맛을 갖춘 을밀대만큼은 아니었다. 창업 후 연매출 2억원대에 도달하는 데는 20여 년이 걸렸으나, 이 무렵부터 연매출 30억원대를 이루는 데는 불과 7~8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공덕동로터리에서 서강대 쪽으로 가다가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인근 골목 안 염리동주민센터 부근에 있는 을밀대는 외관도 오래된 맛집의 풍모를 이루고 있다. 낡은 3층짜리 벽돌건물을 중심으로 왼쪽 2층 타일 건물, 오른쪽 건너편 단층집, 그리고 뒷골목 한옥까지 별개의 4채 건물이 한 몸을 이뤄 한꺼번에 220~250명이 식사를 할 수 있는 큰 식당이 되었다. 개념 없는 증·개축 대신 이웃한 옛 건물들을 이어붙이는 확장 전략을 택함으로써 커진 가게 덩치를 감당하는 동시에 ‘오래된 냉면집’이라는 시간의 축적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한겨레/류우종 기자
# 을밀대 냉면 맛을 만든 사람은 평안남도 안주 태생의 대구 사람 김인주(1936~2005)다. 현재 을밀대의 주인은 그의 맏아들 영길(55)이다. 김인주는 냉면의 장인이라 일러도 손색 없을 만큼 평생을 냉면에 바친 사람이다. 10대 후반부터 냉면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폐암으로 타계한 69살 때까지 오로지 냉면으로 삶을 일관했다. 김인주는 말기 암 환자임에도 사망 당일에도 여느 때와 똑같이 김포의 육수 공장에서 냉면 육수를 뽑아 손수 봉고차를 몰아 가게에 실어다놓고 병원에 갔을 정도다.

해방 전, 가족이 대구로 이주한 김인주는 어릴 때부터 냉면을 좋아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과 대구 등지의 냉면집에 들어가 냉면 기술을 배웠다. 1971년 아내와 자식들을 대구에 남겨놓고 혼자 상경한 김인주는 은평구 응암동 대림시장 안에 분식점을 차리고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김인주는 1976년 현재의 자리에 있던 가정집을 개조해 ‘염리분식’을 차린다. 냉면집이지만 분식점으로 신고한 것은 일반식당보다 세금을 덜 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염리분식이 ‘을밀대분식’으로 옥호가 바뀐 것은 몇 해 뒤였다.
을밀대 제공
김인주에게 냉면은 ‘일(一) 육수 이(二) 면발’이다. 그는 생전에 냉면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평양냉면 맛은 육수가 결정한다. 양념 맛이 겉으로 드러나선 안 된다. 고깃국물 안에 은근히 깊게 배어 있어야 제맛이 나고 뒷맛도 깔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한때 냉면 기술 전수를 전제로 분점을 모집할 만큼 자신의 냉면에 확신을 가졌다. 사골과 사태 등 국물을 내는 뼈와 고기는 반드시 수놈 한우를 쓴다는 것도 그의 오래된 철칙이다. 을밀대 육수는 특유의 살얼음이 낀 것으로 유명한데 이것도 육수의 성분 탓이라 한다. “아버지는 육수 안의 밀도 높은 지방 성분이 쉽게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육수를 뽑은 즉시 얼렸다. 당시 가게가 좁아 냉장 시설을 제대로 갖출 수 없었던 한계 때문도 있었지만, 그런 과정에서 비결을 알게 된 것 같다. 손님에게 냉면을 내놓을 때 신선한 육수를 부으려면 언 육수를 잘게 부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육수에는 살얼음이 끼는 것이다.”
한겨레/류우종 기자
을밀대 사람들은 을밀대 냉면을 두고 정통이냐, 퓨전이냐 논란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본고장 평양에도 유명 가게들은 저마다의 맛을 내는 비법이 있었다. 우리 집도 우리만의 비결이 있는 거지, 무슨 변형이 아니다. 이북 출신 손님들은 ‘당시 평양냉면 맛과 가장 가깝다’고들 하셨다.”

그러나 분명한 변화도 있다. “2002년 육수 공장 설립 이전과 이후로 맛이 나뉜다는 지적을 인정한다. 증가하는 손님을 받기 위해서는 육수 생산량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맛의 미세한 변화가 불가피했다. 전문가들도 화학적으로는 똑같은 비율을 유지해도 용량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날 수 있다고 한다. 라면 한 개 끓일 때와 5개 끓일 때 차이처럼.”
한겨레/류우종 기자
[마늘과 파채가 잘 어울리는 을밀대 수육과 가벼운 반주에 안성맞춤인 녹두빈대떡.]

김영길은 광고디자이너였다가 20년째 냉면 가게를 지키고 있다. 가게 규모가 커지던 1990년대 후반 김인주는 자기의 분신과도 같은 을밀대를 “오래도록 지키기 위해” 장남에게 냉면일을 가르치기로 한다. 미대를 나와 10년째 대형 광고회사(대홍기획)에서 “광고에 미쳐 있던” 장남이 한사코 거부하자, 김인주는 봉고차를 몰고 집을 나가버렸다. 가출 6개월 만에 장남이 항복을 선언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반년쯤 더 지나서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아마도 혼자 배우고 깨닫는 시간을 주려 한 것 같다.” 그 뒤부터 가출하고 싶은 쪽은 내내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냉면일에 관한 한 완벽주의자였다. 고생 좀 했다.”

아들이 가게 일에 참여하면서 달라진 점은 운영 체계였다. “아버지는 모든 걸 옛날 방식으로 하기를 원했다. 돈을 벌겠다는 욕심도 없으셨다. 그러다보니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손님을 수용하는 데 한계가 드러났다.” 영길은 은행 대출을 받아 이웃집을 하나둘씩 사들여 미로 같은 형태로 가게를 늘였다. 주방 운영도 현대식 기자재를 들이고, 당시 대형 음식점에서나 볼 수 있던 ‘포스’(컴퓨터 판매관리시스템)를 엄청난 고가에 사들였다. 훗날 매출의 기하급수적 성장을 생각하면 이 ‘과투자’는 미래를 대비한 혜안이었다.
한겨레/김경래 기자
잘나가던 을밀대에도 환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인주 사망 후 을밀대가 겪은 가장 큰 시련은 형제간의 육수 분쟁과 ‘분열’이다. 김인주는 생전에 자식들이 분가하더라도 육수 공장을 똑같이 사용하도록 조처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형제들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채 분쟁으로 치달았다. 당시 언론에서도 흥미 위주로 보도했던 ‘형제간 육수 전쟁’은 결국 소송 끝에 정리되고, 김인주의 을밀대는 여러 자식의 을밀대로 나뉘었다. 장남과 일산의 여동생이 한 육수를 쓰고, 나머지 형제들은 강남 지역과 백화점 등에서 독자적인 을밀대 냉면집을 경영하고 있다.

‘을밀상춘 부벽완월’(乙密賞春 浮碧翫月·을밀대 봄구경 부벽루 달맞이)이라는 말이 있듯 을밀대는 부벽루와 더불어 평양의 대표적 명승지다. 따라서 을밀대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업적으로 쓸 수 있는 이름이다. ‘평양냉면집 을밀대’는 김인주가 동업한 평안도 고향 친구와 고심 끝에 지은 옥호다. ‘부벽루’는 1920년대 서울 최초의 전문 평양냉면집 이름이었다. 김인주가 이런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김인주의 을밀대에 연원을 둔 가게만큼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40년 전 어느 날, 서울 마포구 변두리 동네 골목에 조용히 내걸린 ‘평양냉면 을밀대’라는 분식점 간판엔 서울에 진짜 평양냉면집을 세워보겠다는, 가난했지만 자부심 높은 한 냉면 기술자의 포부가 서렸다는 것을.
한겨레/류우종 기자
글 = 이인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