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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03일 09시 53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4월 03일 11시 19분 KST

'제주 4.3사건'이 아직 낯선 당신이 알아야 할 7가지

비극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
제주도 제주시 4·3평화공원에 설치된 행방불명인 표석의 전경. 4·3 희생자 가운데 주검을 찾지 못한 3806명을 위해 개인 표석을 놓았다. 

″제주4.3사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2003년, 당시 고건 국무총리는 정부의 진상조사 활동을 총정리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서문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4.3사건으로 인한 희생자는 2만5000~3만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제주도민의 10%에 달하는 규모다.  

4.3사건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비극이기도 하다. 진상규명은 ”반세기가 넘도록” 지연됐고, 진상이 완전히 드러났다고도 할 수 없다. 늦게라도 정부 차원의 사과는 이뤄졌지만, 수십년 동안 온 몸으로 고통을 겪은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아직 제대로 된 배상이나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제대로 된 이름도 아직 없다. ‘4.3사건‘으로 불릴 뿐이다. 4·19혁명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헌법 전문)으로 규정되고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법적인 지위를 인정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는다. 7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도, 최근 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3명은 4.3사건에 대해 ‘모른다’고 답했다. 4.3희생자 추념일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된 건 겨우 2014년의 일이다. 사건 발발 66년 만이었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주 4.3사건은 낯설게 다가온다. 허프포스트는 정부 진상조사결과 등을 바탕으로 당신이 제주 4.3사건에 대해 알아야 할 7가지를 정리했다. 

 

1. 제주 4.3사건은 3·1절에 벌어진 작은 사건에서 시작됐다 

한겨레
제주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힌 귀순 제주도민들이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4.3사건은 7년7개월 동안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한다. 2000년 1월에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2조)’은 이 사건을 이렇게 규정한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발단이 된 사건은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던 1947년 3·1절에 벌어졌다.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끝난 뒤, 주민들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군중의 규모는 2만5000~3만명으로 추산됐다. 단순한 시위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이날의 집회는 우연히 벌어진 하나의 사건으로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오후 2시45분경, 기마경찰이 타고 있던 말의 발굽에 한 어린이가 채이는 일이 벌어졌다. 기마경찰이 그냥 가려고 하자 시위를 지켜보던 군중들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기마경관은 당황한 채 동료들이 있는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그 때 총성이 울렸다.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발포한 것이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6명 중 5명은 등뒤에 총탄을 맞았다. 과잉 진압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경찰당국은 발포가 불가피했다며 정당방위였다는 주장을 폈고, 나중에는 아예 이를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했다. 분노한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다.

 

2. 그들은 제주도에 ‘빨갱이섬’ 딱지를 붙였다 

한겨레/국사편찬위원회
경비대원 3명이 1948년 8월3일 오후 제주시의 한 근교에서 내란죄와 탈영죄 등을 이유로 총살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옆에는 미군 장교 2명이 보인다.

 

해방 이후 제주도에서는 좌익 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날의 3·1절 기념행사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위원회가 주도했다. 당시 남로당은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 및 임시정부 수립 같은 정치적 문제 뿐만 아니라, 경제문제, 사회문제 등을 포괄하는 구호를 전면에 내걸었다.

당시 제주 주민들 사이에서는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본군 철수 이후 그동안 제주도를 떠나 있던 6만명이 한꺼번에 돌아왔지만 일자리는 부족했다. 1946년에는 콜레라가 발병해 제주도에서만 수백명의 사망자를 냈고, 극심한 흉년에 따른 식량난이 이어졌다.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수집체제’는 농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렀다. 밀수선 단속에 나선 경찰 고위간부와 미군정 장교들은 뒷거래를 했다는 의혹에 휘말렸다. 민심은 흉흉했다. 남로당은 조직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이날의 3·1절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했다. 그런 상황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은 1일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좌익진영은 3월10일 제주 직장의 95%가 참여한 민·관 총파업으로 맞섰다. 도청 직원, 현직 경찰관까지 동참했을 정도로 파업은 전면적이었다. 파업에는 우익 진영도 가담했다. 이들은 발포 책임자 처벌, 경찰의 무장 해제 및 고문 폐지, 희생자에 대한 보상 등을 요구했다.

미군정은 탄압으로 대응했다. 미군정은 당시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서울에서 급파된 경무부장 조경옥은 3·1절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며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3. 누구도 이 거대한 비극을 예상하지 못했다 

한겨레/국사편찬위원회
제주경찰감찰청 정문에서 캘리버 자동소총(30구경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관이 경계를 서고 있다. 

 

곧 제주도에는 ‘육지’ 경찰들이 들어와 제주 경찰관들을 밀어냈다. 경무부는 파업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수백명에 달하는 연행자들에 대한 취조는 육지에서 온 경찰들이 맡았다. 이 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해 3월과 6월, 8월에는 주민들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미군정은 고위 관리들을 우익 인사들로 교체했다. 제주경찰감찰청장은 서울 출신, 제주도지사는 전북 출신이 왔고, 군 수뇌부도 교체됐다. 제주 출신은 완전히 배제됐다. 미군마저 ‘극우파’로 표현한 유해진 도지사는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육지 경찰’과 반공극우단체 서북청년회는 파업 주동자 검거에 동원됐다.

1948년 1월이 되자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놓고 전국적으로 격렬한 갈등이 빚어졌다. 반대하는 이들은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영구 분단되는 것이라고 봤다. 좌파 진영 뿐만 아니라 우파 진영에서도 반대 대열에 가세했다. 이런 흐름 속에 남로당은 단독선거 저지를 위한 2·7 총파업을 전국적으로 조직했다.    

제주 곳곳에서도 이에 따라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은 또다시 대규모 검거에 나섰다. 경찰의 탄압으로 궁지에 몰린 남로당은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며 무장투쟁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중앙당의 지시 없이 자체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이들은 남한 단독선거로 치러질 5·10 총선거 반대 등을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남로당은 상황을 오판했다. 이들은 제주도에서의 봉기가 전국으로 퍼져 진압병력이 제주도에 추가 투입되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 경찰과 서북청년회만을 무력투쟁 대상으로 삼았을 뿐, 경비대나 미군이 나설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렇게 300여명의 무장대가 총과 칼, 죽창 등을 들었다. 거대한 비극의 씨앗이었다. 

미군정도 사태 초기 이 사건을 ‘치안 상황’으로 간주했다. 5·10 총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빈발했던 무력 충돌 중 하나로 본 것이다. 경비대 역시 이 사건을 도민과 경찰·서북청년회 사이의 충돌로 여겼을 뿐, 군이 개입할 사건은 아니라고 봤다. 그러나 사태는 점점 격렬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4. 미군정은 4.3 무장봉기를 대대적으로 진압했다  

한겨레/국사편찬위원회
4·3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역사적인 인물들이 1948년 5월5일 제주를 찾았다. 윌리엄 딘 주한미군정장관이 제임스 맨스필드 59군정중대 중령과 대화하고 있다. 그 옆으로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 연대장의 모습이 보인다. 맨스필드 중령 뒤에 가려진 인물은 안재홍 민정장관이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350명의 무장대는 경찰서와 우익단체 등을 습격했다. 이날 하루 동안에만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6년 6개월 동안 이어진 비극적 유혈사태의 시발점이었다. 경찰은 ‘육지 불량배들이 도민을 선동했다‘고 했고, 미군은 ‘북한군 유입설’을 제기했다.

잠시 평화협상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곧 무산됐다. 미군정이 무력진압을 결정한 것. 미군정은 더 많은 육지경찰과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제주도에 내려보냈고, 군에 진압을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우익 청년들이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질렀고, 미군정과 경찰은 이를 ‘폭도들의 행위’로 조작해 강경 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  

평화협상이 깨진 뒤, 무장대는 5·10 총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한 투쟁을 재개했다. 다수 주민들도 이에 동조하며 선거를 거부했다.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받거나 관련자들이 피살됐다. 결국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에서 선거가 무산된 선거구(2곳)이 나왔다. 미군정은 6월23일 재선거를 추진됐지만 이마저도 무산됐다.

미군정은 이를 중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광주에 주둔하던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이 제주에 파견돼 군·경의 진압작전을 총지휘하기 시작했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천명했다. 실제로 그는 “2주일이면 평정될 것”이라며 강력한 진압 작전을 개시했다. 

이어 브라운은 경찰, 경비대, 해안경비대에게 각각 역할을 분담시켜 펼치고 있는 자신의 작전 방침을 밝혔다. 즉 △경찰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도로로부터 4㎞까지 사이에서 치안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고 △국방경비대는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으며 △해안경비대는 하루에 두 번씩 제주도 일대 해안을 순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라운 대령이 밝힌 바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이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부작용만을 낳았다는 것은 이후의 전개과정이 말해주고 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16쪽)

그렇게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11연대장에 새로 취임한 박진경은 취임일성으로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무고한 민간인이 총살되는 일이 빈번했다. 토벌대는 그해 6월 중순까지 6000여명을 체포했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다. 

토벌 작전의 대상은 이념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민간인과 ‘폭도‘를 구별하기 곤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무차별적으로 연행됐다. 브라운 대령이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으로 표현했던 토벌 작전에 공을 세운 박진경은 선임자를 앞질러 대령으로 진급한다.

 

5. 수많은 민간인들은 무차별적으로 살해됐다 

한겨레/국사편찬위원회
처참하게 살해된 여성의 주검. 옆에 가족인 듯 보이는 노인이 멍한 눈으로 정면을 보고 있다. 미군은 “공산군 빨치산에 의해 살해된 주검과 그들의 친지 및 친구들”이란 설명을 달았다. 

 

이 와중에 서울에서는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됐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11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때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은 4.3사건에서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당시 토벌대는 산으로 숨어든 무장대를 주민들과 분리하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시켰다. 그러나 노인과 어린이 등 마을을 떠나지 않은 주민도 많았다. 이들은 무차별 학살의 대상이 됐다. 해안으로 내려온 주민들 중에서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다가 발각되면 사살되거나 형무소로 보내졌다.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이뤄졌다. 무장대는 일부 마을을 ‘토벌대 편’으로 지목한 뒤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심문도, 재판도 없었다.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희생자는 1만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진압이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는 1949년 1월17일 ‘북촌사건’이다. 육군 2연대 3대대 병력은 북촌리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전사하자 보복을 감행했다. 북촌마을 주민 350여명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집단 총살한 것.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1949년 3월 설립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작전을 폈다. 이에 따라 산에 숨어 있던 많은 주민들이 내려왔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죄명도 모른 채 군법회의에 회부돼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이송됐다. 훗날 이들은 끝내 즉결처형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 숫자가 2500여명에 달한다. 

무장대 총책(이덕구)이 사살되고 무장대 세력이 사실상 궤멸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듬해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제주도에는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이승만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시행하며 만든 반공단체인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되어 대거 처형된 것이다.

학살은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을 당했다. 예비검속에 의한 희생자와 재소자 희생자는 3000명으로 추산된다. 제주도 내에서도 1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서귀포, 제주항 앞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등지에서 집단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됐다. 

 

6. 비극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국사편찬위원회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가고 있다. 1948년 5월15일 촬영됐다. 

 

사건이 종식된 건 1954년 9월21이었다. 그해 4월 최후의 무장대원이 생포된 것을 끝으로, 4.3사건은 공식 마무리됐다. 그러나 4.3사건이 그렇게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족들은 연좌제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감시를 당했고, 공무원 임용이나 사관학교 입시 등 각종 시험은 물론, 출입국 등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사건 진상규명은 그 후로도 50년 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면서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시작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논의는 중단됐다. 진상규명에 나섰던 이들은 구속됐고, 경찰은 유족들이 세운 위령비를 부숴 땅속에 파묻어버렸다. 

그렇게 강요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20년 동안 이어진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4.3사건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유족들을 옭아매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4.3사건을 소재로 소설 ‘순이삼촌’을 쓴 소설가 현기영은 정보기관에 연행되기도 했다.

4.3사건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비로소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1987년 제주대 총학생회가 첫 위령제를 치렀고, 1989년에는 시민사회단체 주관으로 첫 공개 추모제가 열렸다. 제주지역 신문과 방송을 중심으로 언론에서도 4.3사건이 다시 다뤄지기 시작했다.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건 10여년이 더 흐른 1999년 12월의 일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유족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법안에 서명했다. 이 특별법에 따라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활동이 시작됐고,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사업과 기념사업이 추진됐다. 벌써 5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2003년 10월에는 2년여의 조사 끝에 진상조사보고서가 공식 확정됐다. 보름 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해 공식 사과했다.

″저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 수립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7. 이것은 국가 권력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한겨레
‘제주 4·3’ 70주년을 이틀 앞둔 1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 제1관에 누워 있는 ‘백비’를 추모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 백비 앞 안내문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다. 

 

정부 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 희생자중 78.1%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고 결론 지었다. 가해자가 불분명한 숫자를 제외하고 계산하면 86.1%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할 때 무장대에 의한 희생은 각각 12.6%%와 13.9%로 집계됐다. 희생자 중 압도적 다수가 정부(군·경) 진압 작전에 희생된 것이다.

희생자 중 어린이(5.8%)와 노인(6.1%)을 합하면 전체 희생자의 11.9%에 달했다. 여성 희생자는 21.3%로 조사됐다. 진상조사위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군이 작성한 보고서도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전체의 80%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진상조사위는 군 당국의 책임을 거론하면서도 ”최종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또 ”미군정과 주한미군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 미군 대령이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수립 이후에도 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당시 진상조사위는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 보고서가) 4.3사건의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없다”고 적었다. ”경찰 등 주요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 거부, 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로 미처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가 진상규명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4.3위령제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추모사업 예산도 집행하지 않았고, 국방부는 4.3사건을 ‘남로당의 지시에 의한 좌익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교과서 내용을 수정할 것을 교육부에 요구해 파문을 일으켰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4.3 희생자 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정작 한 번도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희생자 재심사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남로당 핵심간부와 무장대 수괴급’이 희생자에 포함되어 있으니 ”철저한 재조사 및 검증, 재심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2000년대 이후 극우단체들은 4.3사건을 ‘좌파 폭동’으로 묘사하며 4.3사건을 흔들었다. 4.3특별법이 위헌이라거나 희생자 인정은 무효라는 등의 헌법소원과 행정소송을 냈다. 제주 지역언론 ‘제주의소리’는 “9년간 보수정권이 최소한 ‘4.3흔들기’를 방조했거나, 사실상 조장했을 것이란 합리적 의심이 충분했다”고 지적한다.

유족들은 특별법 개정을 통한 국가적 차원의 배·보상, 상시 희생자 신고 접수, 유해발굴 등을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4.3문제의 완전한 종결은 배보상까지 가야 한다. 배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추념식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다. 12년만이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 양윤경씨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제주도를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기억한다’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안타깝다. 제주는 천혜의 자연을 지닌 아름다운 섬이지만 그 풍광 뒤에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곳은 여지없이 학살터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서귀포의 정방폭포, 송악산 섯알오름도 마찬가지다. 가는 곳마다 4·3 유적지다. 제주의 풍광과 함께 4·3의 아픔도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한겨레21 제1204호, 3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