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2018년 03월 28일 18시 1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3월 28일 20시 00분 KST

기자들이 직접 겪었던 ‘MB의 추억’을 털어놓았다

초선의원·서울시장·대통령 때 그를 취재했던 기자들이다.

취재 현장에서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지켜봤던 한겨레 기자들이 MB를 추억했다. 여현호 한겨레 선임기자는 정치 초년병이던 MB, 김규원 기자는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한참 주가를 올리던 MB, 길윤형 편집장은 서울시장 MB, 이명박 정부 첫 청와대 출입기자인 황준범 기자는 대통령 MB를 회상했다. 네 기자가 내린 공통된 결론은 ‘그는 절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_편집자

Chung Sung-Jun via Getty Images

늘 뭔가를 속에 품은 초선의원

초선의원 이명박은 여의도 정치판과 잘 맞지 않아 보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꿀 즈음인 1995년의 어느 날이다. 여의도에서 행사를 마친 민자당 의원들이 다음 행사를 위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으로 이동해야 했다. 의원들은 자기 차를 부르느라, 혹은 동료 의원 차에 함께 타느라 부산했다. 기자들도 교통편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의원 두 사람이 탄 승합차에 편승했다. 서로 막역했던 현대가 정몽준 의원과 인권변호사 출신 강신옥 의원이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 초선이던 이명박 의원이 멀뚱히 혼자 서 있었다. 호들갑스럽게 동료의 손을 끌던 다른 의원들이 그를 못 본 듯 스쳐 지나간 뒤였다. 누군가 ‘태워주자’고 했다. “저 사람은 친하게 지내려는 이도 없는 딱한 사람이니, 우리라도 챙겨줘야지”라는 말도 있었다. 차 안에서 그는 잠시 넉살 좋게 얘기를 나눴지만, 그보다 더 오래 의자 속에 웅숭그린 채 말이 없었다.

스냅사진 같은 그날의 기억처럼, 그는 동료 의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재선인 이상득 의원의 친동생이라는 인상만 강했다. 현대그룹 출신인데도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 창당에 합류하지 않았고, 되레 민자당 의원으로 정 회장의 대통령 출마를 비난했다. 현대가로선 배신자라고 생각할 만했다.

초선의원 이명박은 정계 입문 때부터 재산을 숨긴 일로 입길에 올랐다. 1993년 첫 국회의원 재산공개에서 그는 재산 총액을 62억3240만원으로 신고했다. 하지만 재산공개 엿새 전 압구정동의 80평대 현대아파트를 다른 사람 명의로 돌리고, 몇몇 땅은 아예 누락한 사실이 금세 드러났다. 양재동 건물을 불과 5억9천만원으로, 서초동 땅은 공시지가의 절반 이하로 신고하기도 했다.

 

약속 시간 넘기고도 태연자약

부실한 재산공개로 조사 대상에 오르자 이 의원은 급히 재산 줄이기에 나섰다. 서초동 검찰청사 앞 1554m²(470평) 땅을 반값인 60억원에 대한변호사협회에 ‘급매물’로 넘겼고, 경기도 화성시 임야 1만 평은 고려대 교우장학회에 기증했다. 그런데도 지금의 영포빌딩 터 등 서초동 땅 184억9천만원을 추가해 수정 신고한 재산은 1차 신고액의 4배인 247억2천만원이나 됐다. 

‘도곡동 땅’은 그때도 큰 문제가 됐다. 한 신문은 1993년 3월 청와대와 민자당 재산공개 진상파악특별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인용해, “이 의원이 시가 150억원대 도곡동 땅을 처남 명의로 은닉해 재산공개에서 고의로 누락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의원은 이 땅을 수정 신고에서도 빼놓았다.

속인 것은 더 있다. 이 의원이 자신의 차를 몰고 가다 같은 민자당 소속 다른 의원의 비서관 차와 부딪치는 교통사고를 낸 뒤, 자신의 운전기사가 차를 몬 것으로 조작해 보험 처리를 했다는 의혹이 1995년 제기됐다. 가끔 마주치던 그는 항상 뭔가를 속에 품고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초선의원 이명박은 1995년 첫 민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다. 경선을 앞두고 그가 기자 여럿을 점심에 초대했다. 포부를 밝히고 속내를 털어놓는 자리였는데, 약속 시각 30분을 훌쩍 넘겨 도착했다. 늦을 만한 이유도 대지 않았지만, 미안한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여현호 한겨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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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악한 장사꾼의 청계천 거짓말

내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2월25일이었다.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던 그는 서울시 출입기자들과 함께 광통교 네거리쯤에서 복개된 청계천으로 들어갔다. 말이 청계천이지 당시엔 하수도였다.

그는 허리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더러운 하수 속에 들어가 광통교 기둥 앞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광교다, 광교! 여러분, 광교를 찾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여기 묻혀 있던 광교를 처음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내게 한 첫 거짓말이었다. 옛 광통교가 청계천1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것이었다.

그날 그는 내게 두 번째 거짓말도 했다. “이렇게 고통받는 광통교를 복원하고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를 제자리에 옮기는 것이 청계천 복원 사업의 중요한 부분입니다”라고. 2년7개월 뒤 청계천 복원이 ‘완공’됐을 때 광통교는 원래 자리에서 150m 상류로 강제 이전됐고, 1958년 장충단공원으로 강제로 옮겨진 수표교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서울시장이 된 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주변 노점상들이 강하게 반대할 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장사꾼들은 판단이 빠릅니다. 청계천 복원이 확실하면 장사꾼들은 태도를 바꿀 겁니다.” 드물게도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말한 장사꾼은 청계천 노점상들이 아니라, 그 자신처럼 느껴졌다. 청계천 복원이라는 친환경 사업에 도전한 영악한 장사꾼.

2005년 9월 청계천 복원 사업이 끝난 뒤 그의 거짓말 시리즈는 계속됐다. 그는 많은 인터뷰에서 1999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지낼 때 보스턴의 ‘빅딕’ 사업을 보고 청계천 복원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의제를 한국에서 처음 제기했고, 그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한 노수홍 연세대 교수(청계천살리기연구회장)는 “이명박 캠프에서 청계천 복원에 대해 처음 문의해온 것은 2001년 8월이었다”고 했다.

 

비판하자 <한겨레> 구독 끊어

청계천 복원이 착공되기 전인 2002~2003년 사이 잠깐 동안, 그는 시민단체나 한겨레와 우호적 관계였다. 그는 선거 기간에 한겨레의 청계천 복원 시리즈 기사를 홍보물로 사용했고, 당선된 뒤에는 많은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경찰이 반대하던 청계천 고가도로 폐쇄를 노무현 대통령의 도움으로 풀자마자 그는 폭주족으로 돌변했다.

2003년 7월 청계천 복원 사업 착공 뒤, 그는 친환경 복원, 역사 복원을 요구하던 시민위원회와 계속 충돌했다. 시민위원회가 역사 공간의 복원을 요구하자, 그는 역사 유적들을 뜯어내 중랑하수처리장 공터로 옮겨버렸다. 청계천을 상류의 백운동천, 삼청동천과 연결하는 방안도 완전히 배제됐다. 모두 시간과 비용, 정성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청계천 복원을 사회적 이슈로 만든 한겨레와도 적이 됐다. 한겨레에서 그의 일 추진 방식을 계속 비판하자 그는 서울시청에서 한겨레 구독을 끊고, 광고도 끊었다. 한겨레신문사가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새 사옥 부지를 신청하자 그는 1년 넘게 결정을 미루다 탈락시켰다.

그는 외국 출장을 나갈 때 우호적인 매체에만 몰래 비용 전액을 지원했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다. 이 일로 서울시청 기자실이 발칵 뒤집히자, 그는 항의하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언론사를 똑같이 대우할 이유가 있느냐?” 그는 ‘공공성’이나 ‘공정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상습적으로 거짓말하는 사람을 중요 공직자로 뽑아서는 안 된다. 시민들과 매체가 그의 거짓말을 제대로 검증했다면 그는 서울시장도, 대통령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선출직 공직자에 대한 엄격한 사후 통제가 필요하다. 그가 서울시장과 대통령이 돼서 폭주할 때 아무도 그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것은 주권자의 실패이며, 정부의 실패다. 셋째, 횡재를 바라면서 지도자를 선출해서는 안 된다. 그런 허황된 욕심이 가져오는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와 같은 재앙뿐이다.

물론 그에게도 배울 점이 없지는 않다. 그것은 결단과 행동력이다. 서울시장 시절,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청계천 복원’과 ‘버스 개혁’을 꼽는다. 또 그는 시청광장과 숭례문광장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김규원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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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하게 휘두르는 서울시장의 악수

이명박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특유의 악수법이다. 2~3년차 기자 초년생이던 나는 2003년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 1년 동안 서울시청을 출입했다. 당시 서울시 기자실은 지금은 서울도서관으로 변한 옛 서울시청 1층에 있었다. 월요일치 신문을 만들기 위해 일요일에 기자실에 나와 있으면 이따금 이명박 시장이 내려와 기사 쓰고 있던 기자들과 인사했다.

대통령이 된 뒤 변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악수법은 특이했다. 일단 성큼성큼 상대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굉장히 경박하게) 두 손으로 짧게 박수를 친 뒤, (‘이거 뭐지’ 당황해하는) 상대의 손을 덥석 잡고 45도 각도로 강하게 휘둘러댄다. 20대 후반의 젊은 기자였던 나는, 이것이 바로 건설업계 ‘쌈마이 악수’인가 싶어 살짝 감동하기도 했다.

대담하고 경박했던 악수답게 이 전 대통령은 말도 시원시원하게 해댔다. 건설업체 사장으로서는 호탕한 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1천만 시민을 대표하는 시장으로서는 대부분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대표작 몇 개를 꼽아본다. 그는 고교평준화 정책을 유지하려는 당시(2003년) 윤덕홍 교육부총리를 향해 “윤덕홍 교육부총리는 시골 출신으로 진정한 서울의 교육을 모른다”고 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향해서는 “우리끼리 평준화해서 뭐하나. 전교조를 극복해야 교육이 산다”고 주장했다. 또 서울시 산하 지하철 기관사들을 향해서는 “(지하철) 기관사가 얼마나 쉬운 자리인지 모른다. 이 점이 드러날까봐 (노조가) 파업도 못할 것”이라고 비아냥댔고, 청계천 복원 공사가 본격 시작된 뒤 쏟아져나오던 문화재에 대해선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감식안을 뽐냈다. 그중 최고 명언은, 2004년 5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 기도회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다.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수도 봉헌’ 발언이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런 ‘히트작’들 외에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전자는 자신이 남 일에 간섭하며 훈수를 둘 때 쓰는 말이고, 후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누가 비판할 때 내놓던 말이었다. 자기가 비판할 땐 ‘해봐서 안다’, 남이 비판할 땐 ’반대를 위한 반대’! 일찌감치 ‘내로남불’을 체현한 이 전 대통령의 양수겸장에 기자들은 할 말을 잃어갔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이 전 대통령의 최고 발언은 한겨레 비하 발언이었다. 2003년 서울시 송년회가 있던 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기자(필자다) 하나가 이 시장에게 쓴소리를 내뱉었다. 이 시장의 윤덕홍 총리 관련 발언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지방 사람들이 상처받는다”고 했다. 돌아온 답변은 “한겨레, 사람들이 만 명이나 보는가?”

내가 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과는 소통하지만, 비판하는 말엔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는 인물이었다. 청계천 공사로 영업이 어려워진 한 시장 상인이 “우리를 도우소서”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는데, 그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한 적이 없다. 이 전 대통령은 이기적이고, 자기객관화가 안 되며, 남의 고통에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뤄낸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기린아이자,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야 할 흉물이기도 했다. (길윤형 한겨레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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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돈 먹는다는 얘기냐” 버럭 

“어떻게 대통령 재임 중에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나. 이명박 정권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치졸한 일이 될 거다.”

MB가 대통령 재임 중에 다스가 BBK에 떼인 투자금 140억원을 돌려받은 일을 두고 정두언 전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최근 수개월 사이 검찰 수사 국면에서 한 얘기가 아니라 2011년 봄, MB가 김경준 전 BBK투자자문 대표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투자금을 회수해 다스로 집어넣었다는 <한겨레21>의 보도가 나왔을 때 사석에서 한 얘기다. 지금 보듯 다스는 MB를 통째로 무너뜨려 구치소로 보내는 결정타가 됐다. MB는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다스는 내 것이 아니다”라면서도, 대통령 자리에 앉은 뒤에도 끔찍이 다스를 챙겼다. 자신의 행위에는 전혀 죄의식을 보이지 않으면서, 주변에는 “행동 잘하라”고 큰소리친 일이 있다. 2011년 가을의 일이다.

그해 9월,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의 한 의원이 MB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그 의원이 말했다. “이○○, 박△△ 이러다 감방 갈 겁니다. 조심하십쇼.” MB 주변에서 측근 비리가 터져나오던 때다. MB는 “나도 돈 먹는다는 얘기냐”며 버럭댔다.

“아뇨, 각하는 돈 많잖습니까. 그래서 돈 먹는다고 생각 안 해요.”

“나는 재산도 다 기부했다.”

“에이~, 사람들이 그걸 믿습니까. 돈 많잖아요.”

그 직후 청와대에서 MB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한 회의에서 ‘컵이 날아다녔다’고, 한 인사가 말했다. 임태희 대통령실장 주재로 열린 확대비서관회의 말미에 MB가 예정도 없이 들러 “냉철”과 “고통”을 강조하며 군기를 바짝 잡은 것이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공개된 MB의 정제된 발언은 이렇다.

“이번 정권은 돈 안 받는 선거를 통해 탄생한 점을 생각해야 한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인 만큼 조그마한 흑점도 남기면 안 된다.”

그 유명한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 발언은, 자부심의 표현이 아니라 사고 위험성이 있는 주변 인사들에게 한 공개적 경고였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그 경고는 실패했다.

 
‘일머리’가 박근혜 비교우위

2007년 치열했던 한나라당 경선과 대선을 거쳐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부터 중반까지 3년6개월가량 청와대를 출입하며 지켜본 MB의 모습은 막대한 사명과 책임을 지닌 지위에 걸맞지 않았다. MB는 ‘자신에 대한 무딘 도덕감각’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래서 주변을 단속해도 영이 서지 않았다. ‘일만 잘하면 과정은 괜찮다’는 결과지상주의가 몸에 깊이 밴 개발독재 시절 건설사 최고경영자(CEO)의 행동 유형을 그는 끝내 버리지 못했다.

물론 MB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경쟁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견줘, 실물경제를 다뤄본 경험이 있었다. ‘일머리’를 알았고, 이념 기반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비교적 합리적·개혁적 인사들이 주변에 포진했다.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먼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검찰 수사로 드러난 MB의 삶은 알량한 ‘박근혜 비교우위’마저 무너뜨렸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던 BBK·다스 의혹, 사회 환원이라던 청계재단 설립, 경제 활성화와 평창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것이라던 ‘이건희 사면’, 서민과 함께하겠다던 중도실용 정책…. 도대체 MB가 진심과 선의를 갖고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황준범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