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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소화하기

조합원들의 돈으로 만들어진 방송국이니 조합원들의 요구에 따라 조합원들의 입맛에 맞는 방송만을 제작한다고?

  • 최황
  • 입력 2018.03.23 14:22

1977년에 지구를 떠난 보이저호에는 레코드판과 재생기기 그리고 116장의 사진이 들어있다.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에게 지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쏘아 올려진 이 탐사선은 미항공우주국, 그러니까 ‘나사’가 기획해 실행에 옮겼다. 당연히도 ‘나사’는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다. 그러니 기실, 미국인들의 돈으로 미국인들이 만든 이 우주 탐사선에 미국 위주의 정보들만 싣는다고 별문제가 될 건 없었다. 누구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서 만들어진 프로젝트냐를 따지면 당연하지 않은가?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 외계로 나갈 탐사선을 발사하는데, 거기 들어간 돈이 미국의 세금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성조기, 미국 국가, 역대 미국 대통령의 사진, 각 주지사의 인사말, 미국인들의 인사말, 금광 채굴 역사와 서부 개척시대의 사진,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사진, 행운의 2달러, 제임스 딘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사진,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곡 메들리를 넣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돈으로 만든 탐사선이니까.

ⓒJULIAN BAUM/SCIENCE PHOTO LIBRARY via Getty Images

여기에 반론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을 거다. “그건 멍청한 짓이야”라며, 굳이 미국을 알리기 위해 우주에 우편물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거다. 그런데 이를 기획한 사람들이 선을 그으며 “이건 미국인의 세금으로 만들어낸 사업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 집어넣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말한다. 그렇게 논란은 일단락됐고, 이 우주 탐사선은 약 4만 270여 년 후에 작은곰자리 근처를 지난다. 물론 외계의 지적 생명체는 만나지도 못했고, 지구는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이저호는 깜깜한 우주를 떠돌며 “Hello, I am American”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물론 이 우스꽝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보이저호에는 미국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보편적 정보들이 실렸다. 레코드판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녹음된 지구인들의 인사말 그리고 천둥과 빗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와 함께 바흐나 베토벤, 루이 암스트롱이나 로렌소 바르셀라타의 음악, 다양한 문화권의 대표적 전통음악이 수록되어 있다. 임신한 인간의 모습, 나일강의 악어, 태국의 장인, 용암을 분출하는 화산, 인도의 교통체증 사진 등 인류와 지구의 모습을 담은 116장의 사진들도 아주 신중하게 선택됐다.

그렇기에 이 탐사선이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끝내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프로젝트로 남게 될 것이 분명하다. 1977년에 신중하게 고른 ‘인류의 메시지’는 시간을 초월해 현재와 미래의 인류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라는 아주 중요한 질문 말이다.

 

ⓒ까고있네

지난 3월 16일, 미디어협동조합-국민TV는 <까고있네>라는 팟캐스트 라디오 프로그램을 일방적으로 삭제했다. <까고있네>는 ‘세상에 까지 못할 것은 없다’는 슬로건으로 최근에 편성된 새로운 팟캐스트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기존의 방송들이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기존의 진행자들이 접근하지 않았던 각도로 사회를 이야기하는 시사 비평 방송이었다. 첫 방송에서 ‘적폐’를 주제로 ‘386세대’를 비판했는데, 주 청취 층은 물론 미디어협동조합의 조합원 대부분이 386세대였고 방송은 2회 만에 잘려버렸다.

7 명의 이사진이 ‘단톡방’에서 논의한 끝에 상임이사가 삭제를 지시했다고 한다. 방송을 삭제한 이사진 측은 조합원들의 ‘들끓는 여론’이 이유였다고 전해왔다. 제작진이 정식으로 기획서를 만들어 제작 의도나 성격을 충분히 알려 만들어낸 방송을 삭제하는 과정에 어떠한 정상적 절차나 상식적 근거가 없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 초유의 방송 삭제 사태의 중심에 ‘돈을 댄 당사자들’의 그릇된 언론관이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그들이 방송 삭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리는 “조합원 돈으로 만든 방송에서 조합원들이 듣고 싶은 방송을 만들겠다는데 왜 문제냐”라는 식이다.

협동조합의 형태로 사업을 하고 본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든지, 또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언론’이라면 이야기가 사뭇 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언론사’를 표방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방송’은 공공재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디어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조합비로 만들어낸 것이 국민TV라는 언론사라면, 게다가 사회의 공익과 정의를 위해 자본과 권력에 굴하지 않는 언론사를 만들었다면, 그곳에서 만들어 방송하는 콘텐츠는 사유재가 아니라 공공재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조합원들의 돈으로 만들어진 방송국이니 조합원들의 요구에 따라 조합원들의 입맛에 맞는 방송만을 제작한다면 ‘국민TV’라는 탐사선은 언젠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안녕하세요, 우리는 미디어협동조합입니다”라고 중얼거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앞서 보이저호에 미국인의 메시지만 실었을 경우를 상상했을 때, 그게 끔찍하게도 형편없다는 생각을 했다면 지금 미디어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방송국에 담을 프로그램을 선별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을 테다.

언론을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정밀하고 치밀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일이다. 자본금의 출처와 관계없는 목소리를 내면서 수익도 창출해야 하고, 수익을 추구하면서도 공공재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아야 한다. 기실, 언론이라는 것을 사업으로 만들어 경영한다는 것은 굉장한 균형감각을 요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인터넷의 보편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언론사들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라졌던 것 아닌가.

<까고있네>라는 프로그램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디어협동조합의 조합원들과 경영진이 언론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소화하기 위해서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혹시 지금 그걸 소화하지 못해 본인들의 가치관 속에서 탈이 난 상태인 것은 아닌지, 구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번 기회에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자. 언론이란 무엇이며, 지금 여러분이 만든 언론의 모습은 어떠한가?

물론 아직 그들에게 언론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소화할 기회는 있다. <까고있네>라는 방송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으면 된다. 공정한 뉴스를 만들면서 한편에서 문제적 발언을 일삼는 이가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을 소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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