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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고발 → 무고죄 피소 ‘지옥의 10개월’

"내가 만취한 상태였단 걸 어떻게 입증하나요?"

  • 백승호
  • 입력 2018.03.22 18:47
  • 수정 2018.03.22 18:51

유난히 볕이 좋은 날이었다. 더구나 첫 월급을 받는 날이었다. 그 밤의 악몽은 낮 시간의 기쁨을 모두 집어삼키고도 남았다.

지난 9일 <한겨레>와 만난 이아무개씨(27)는 “그날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시간 지나면 잊혀진다, 없었던 일로 생각해라’ 남들은 쉽게 이야기해요.” 이씨는 울먹였다. 이씨는 지난해 11월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을 달궜던 ‘ㅎ카드 위촉계약직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다.

ⓒ한겨레

지난해 5월15일이었다. 팀원들과 3차까지 회식을 했다. 어느덧 보니 팀장 김아무개씨와 다른 남자 동료 ㄱ씨와 함께 집 앞에 와 있었다. 집에서 ㄱ씨와 소주를 더 마셨다. 팀장은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제가 방으로 들어갔다는데 소파에 누운 것만 기억나요. 취해서 어떻게 방에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팀장이 술에 취해내 침대에 누워있었다고 해요.”

소주를 약 3병 정도 마셔 움직이면 토할 것 같았다. 누군가 이씨 자신을 만진 느낌은 있는데 그저 전 남자친구였겠거니 했다. 반응할 힘도 없이 아침이 밝았다. 옆에 누워 있었던 사람은 남자친구가 아니라 팀장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센터장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지만 두차례 반려됐다. 센터를 옮겨달라는 이씨의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하고 한달여가 지나 고민끝에 ‘1366’(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상담소)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소에서 ‘성폭행’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제서야 이씨는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상담소는 이씨 대신 팀장을 준강간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팀장은 이씨가 술에 취해 있지 않았고, 자신의 옆에 누웠던 만큼 묵시적으로 성관계를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애인으로 착각하고 반항하지 않은 경우를 준강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이씨가 심실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팀장은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받았다. 이씨는 “집에 시시티브이(CCTV)를 달아둔 것도 아니고 만취한 상태였단 걸 어떻게 입증하나요”라고 되물었다. 이씨의 변호를 맡았던 고가영 변호사는 “준강간은 심신상실을 증명할 명확한 기준이 있는게 아니라서 수사기관이 주관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며 “피해자가 기억을 짜맞춰 겨우 진술한 게 되레 ‘기억하고 있으니 심신상실이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돼 버렸다”고 말했다. 성폭력 범죄 불기소 비율은 2016년 기준 36.1%로 전체 평균인 25.5%보다 높다.

“사실은 제가 실수를 했어요. 팀장한테 사귀자고 했거든요. 그러면 내가 원치않은 관계를 당한 피해자가 안 될 것 같았어요. 적어도 수치스럽진 않잖아요. 제가 미쳤던 것 같아요.” 그 일 뒤에 팀장에게 건넨 말이 이씨의 발목을 잡았다.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된 사유서를 보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오히려 고소인에게 사귀자는 제안을 하는 등 통상적인 성범죄 피해자로 보기 어려운 행동을 한 사실은 인정된다”라고 써 있다. 그러나 성폭력 상담 전문가들은 이런 심리 상태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봤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피해자들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작동하는 심리적 기제로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라며 “성폭력 피해자들은 ‘나도 능동적으로 관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것을 부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팀장은 준강간 혐의로 불기소 처분이 나기도 전에 이씨를 무고와 명예훼손 등으로 역고소했다. 이씨가 이런 내용에 대해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올리자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도 추가됐다.

정신적인 충격에 경제적 문제까지 겹쳐왔다. 회사는 12월 이씨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사건 발생 이후로 사람 만나는 게 무서워 이씨는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벌이도 없는 상황에 무고가 아님을 변호해 줄 변호사까지 구해야 했다. 가족의 외면도 이씨에겐 상처가 됐다. “가족들은 역고소 당한 다음에 모든 상황을 알게 됐어요. ‘너만 참으면 될 걸, 그걸 못해 너만 피해받는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부모님 세대에선 이게 흉이잖아요.”

다행히 이씨는 무고·명예훼손 혐의 등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 받았다. 검찰은 “피의자(이씨)가 만취하여 심신상실 상태에서 고소인과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가졌다고 볼 증거는 불충분하더라도 고소인(팀장)을 처벌받게 할 목적으로 일부러 허위신고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적시했다. 적어도 무고의 의도는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이씨는 현재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친구집과 찜질방을 전전하며 살고 있는 중이다. “무고로 고소를 당했다는 기사가 뜨니까 사람들은 ‘돈 때문에 그랬다’는 둥 이미 절 꽃뱀처럼 여기더라고요.” 이씨는 ‘#미투 운동’을 보면 괴롭다고도 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증언하는지 알아요. 그 분들도 저처럼 증언한 걸 후회하면 어떡해요?” 이씨의 무고 사건을 변호한 김상균 변호사는 “무고로 역고소를 당할 경우 다른 수사관에게 또 다시 성범죄 피해사실을 말해야 하고, 그 자체만으로 ‘꽃뱀론’ 등 2차 피해를 입게 된다”며 “2차 가해자에게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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