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18년 03월 21일 11시 59분 KST

일본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하지 못하는 이유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비난, 피해 사실 알고도 모른 척 하는 사내 문화

이토 시오리가 TBS 전 워싱턴 지국장 야마구치 노리유키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한 이야기를 엮어 낸 책 ’블랙박스’의 표지.

일본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 한국과 미국에 견줘 상대적으로 더딘 확산세를 보이면서 일본 출신 기자들이 외신을 통해 조금씩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지난 2월8일 <워싱턴포스트>는 ‘#미투 운동이 일본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쇼지 카오리 기자는 “#미투 운동이 일본에도 상륙했다. 사람들이 이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여성 인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며 “일본 사회는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이고, 여성들은 차별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어소시에이티드프레스>(AP) 역시 2월28일 ‘가부장제인 일본에서 미투를 말하는 건 비난과 무시의 위험이 있다’는 기사를 발행했습니다. 야마구치 마리 기자는 “여성이 오랫동안 (성범죄에 대한) 잘못의 책임을 져 온 가부장적 사회에서 피해 여성은 지지와 정의를 찾기보다는 범죄와 희롱을 잊어버리려 노력한다”고 밝혔습니다. 영어로 발행된 기사지만, 두 기사는 모두 지난해부터 시작된 일본의 ‘미투 운동’이 미국만큼 크게 번지지 못하는 원인을 짚었습니다. 왜 일본에서 미투 운동의 불씨는 타오르지 못했을까요?


■미투 폭로 석연찮게 처벌 무마되고 2차 가해까지

일본의 미투 운동에서 기폭제가 충분치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5월18일 <데일리신초>는 “29살의 프리랜서 기자가 2015년 4월4일 도쿄 브로드캐스팅 시스템(TBS)의 전 워싱턴 지국장이자 아베 총리의 측근인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52)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성폭행 발생 이후 외국에서 기자로 일하던 피해자 이토 시오리(伊藤詩織·29)가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성범죄를 더 강력하게 처발할 수 있도록 형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 일본 미투 운동의 시초 격입니다. 이토는 당시 “TBS 인턴으로 일하던 중 야마구치로부터 ‘새 일자리 얘기를 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초밥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며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술을 몇 잔 마셨는데 의식을 잃었고 이후 호텔 방에서 강간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은 정치적 연관성도 있어 파장이 커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토는 사건 직후 경찰에 피해 사실을 알렸고, 곧 ‘준강간’(일본의 법에서 의식 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을 지칭)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국외에 있던 야마구치가 일본에 입국할 때 체포하겠다던 경찰은 이듬해 6월8일 나리타 공항으로 입국예정인 야마구치를 체포하려다 말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며 돌연 구속 집행을 중단했고,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당시 언론은 가해자인 야마구치가 아베 총리와 개인 연락처를 공유하는 인사라는 점을 거론하며 정치권의 압력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을 던졌습니다.

피해자 이토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후 이토에게는 ‘죽여버리겠다’는 식의 협박 이메일이 쏟아졌습니다. 기자 회견장에서 단추를 풀었다는 이유로 “복장이 단정치 못하다”는 댓글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AP 보도를 보면, 인터넷에는 “그녀가 유혹했다” “유명인의 삶을 망치고 있다” “골칫거리다”와 같은 2차 가해 댓글이 달렸고 가해자인 야마구치는 되레 이토에게 1000만엔(당시 약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일본에서 성폭행 피해 여성 ‘하자품’ 취급”

이처럼 어렵사리 용기를 낸 폭로에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피해자가 되레 2차 피해를 받는다는 점이 또 다른 미투 폭로를 크게 위축시켰습니다. AP는 2015년 일본 정부 설문 조사를 보면, 강간 피해자 가운데 4분의 3은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경찰에 신고하는 비율도 고작 4%뿐이라고 전했습니다. AP는 이어 “2017년 통계를 보면, 강간 사건의 3분의 1만이 법정까지 가고, 성폭행을 시도한 1678명 가운데 285명만이 3년 이상의 형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감내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성범죄 전문인 일본 변호사 츠노다 유키코는 AP에 “많은 사람이 이토의 문제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일본에서 미투 운동이 크게 번지지 못하는 이유”라며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하자품’으로 취급당했다”고 지적했습니다.

 

Twitter
유명 블로거이자 방송인인 이토 하루카의 트위터 계정. 사진 트위터 갈무리.

또 다른 이토의 사례도 있습니다. 이토 하루카(伊藤春香·29)는 약 18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블로거로 ‘하추’라는 닉네임을 쓰며 유명 방송인이기도 합니다. 이토 하루카의 미투 폭로는 남성이 권력을 잡은 사회에서 피해자가 얼마나 나서기 힘든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이토 하루카는 지난해 12월17일 버즈피드 재팬을 통해 “대기업 광고 대행사인 덴츠의 유명 프로듀서인 기시 유키(岸勇希·40)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이토 하루카는 2010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책을 단 기시 유키가 신입사원인 자신에게 한밤중에 “지금 (술을) 마시고 있는 곳으로 와라. 귀여운 여자도 데리고 와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여성을) 소개하는 정도밖에 없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고 폭로했습니다. 특히 이토는 기시가 심야에 집으로 불러 “내 마음에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몸을 사용하라”며 성관계를 요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알고도 모른 척’ 사내 문화도 폭로 막는 주범

그러나 그녀의 편에 서서 피해 사실을 증언해 줄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버즈피드 재팬은 이토 하루카의 제보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덴츠 내부의 다른 이들을 취재했는데, 누구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그 중 몇명이 “언젠가는 누군가 나서서 사실을 밝혀야 한다”며 익명을 조건으로 취재에 응했고 “인사과 역시 그의 언행과 성희롱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답변을 얻어냈습니다.

이처럼 ‘알고도 모른 척’ 하는 사내 문화가 폭로를 막는 주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버즈피드는 여성인턴들이 기시에게 피해를 보았다며 “취업에 목을 매야하는 인턴들이 기시가 인사에서 결정권을 쥐고 있을 거라는 두려움에 말하지 못했다”고 해석했습니다.

 

Twitter
시이키 씨가 “댓글난이 지옥”이라고 올린 트윗. 사진 트위터 갈무리.

미투의 불씨를 꺼뜨린 또 다른 요인은 역풍입니다. 두 명의 이토에 이어 대학생 사업가 시이키 리카(椎木里佳·29)의 폭로가 더해지면서 일본의 미투 운동은 잠시 폭발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시이키 역시 이토 하루카의 폭로와 같은 날인 지난해 12월17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광고 업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성희롱과 성적 요구가 만연해 있다”며 “이를 거절해서 일 얘기가 무산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라고 털어놨습니다. ‘#metoo’의 해시태그를 달고 ‘광고 업계’를 거론한 이유는 앞선 이토의 폭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미투 폭로에 백래시로 또 다른 가해

<아사히신문>의 당시 보도를 보면, ‘#미투(metoo)’ 해시태그를 단 일본의 트위트 수는 2개월 동안 약 6만 개를 기록하며 세계 8위 수준이었지만, 이토 하루카와 시이키 리카의 폭로가 있었던 17일과 18일을 거치며 7만을 넘어 세계 3위로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역풍이 불었습니다. 시이키의 트위터에 수 많은 사용자들이 몰려 와 “거짓말이다” “(남자와 밥을 먹은)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이다”라는 식의 댓글을 달았습니다. 시이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 댓글을 “지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백래시’(Backlash·반격)입니다. 백래시란, 사회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자신의 중요도와 영향력,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불특정 다수가 강한 정서적 반응과 함께 변화에 반발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입니다. 주로 성적,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기제로 작용하는데요. 미국의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동명의 저서 <백래시>(아르테)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정치·사회·문화적 역풍을 해석하면서 개념화했습니다. 버즈피드 재팬은 “미국에서의 #미투 확대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강한 역풍으로 인해 침묵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많았다”고 밝혔습니다.

Asahi
미투 운동에 대한 〈아사히신문〉의 독자 설문조사. 아사히신문 갈무리.

폭로를 어렵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 폭로해도 가해자 처벌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폭로 이후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역풍이 피해자를 괴롭게 합니다. 이런 수치는 설문 조사를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사히신문>이 2017년 12월26일부터 올해 1월17일까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88.9%가 미투 운동에 대해 “공감”(75%)하거나 “공감하는 편”(13.9%)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이 벌어지는 토양을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일본 사회는 추행 등 성폭력 피해의 목소리를 내기에 좋은 사회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한 비율이 92.9%였습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75.6%, “그렇지 않은 편”이 17.3%였습니다.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유를 묻자 “비방이나 중상을 받는 등 다른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33.8%), “폭로를 해도 피해자의 치료와 가해자의 처분 등 적절한 대응을 기대할 수 없다”(28.6%) “‘약간의 성희롱은 참아야 한다’는 풍조”(18.9%)라는 대답 차례였습니다.

물론 한국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도 한국 사회에선 최근 이어지고 있는 미투 열풍에 대한 지지 여론이 상대적으로 더 높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가 최근 온라인에서 20∼50대 성인남녀 1063명을 대상으로 미투(me too)·위드유(With You) 운동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더니, 응답자의 88.6%가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위드유’는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히는 운동입니다. 응답자의 74.4%는 해당 운동에 동참 의사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미투’ 운동을 통해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73.1%가 ‘용기 있는 행동을 격려해주고 싶다’고 답했고요. ‘피해를 당한 사실로 인해 안쓰럽다’고 답한 응답자는 21.6%였습니다. 특히 응답자의 63.5%는 “미투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캠페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