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18년 03월 17일 11시 35분 KST

엄마가 여자와 연애했다는 사실이 내 삶에 끼친 영향

어린 시절을 이런 비밀과 함께 보냈다는 건 축복이자 부담이었다.

Westend61 via Getty Images

 1984년, 나는 싱글 맘 아래서 자랐다. 나는 7살이었다. 나와 어머니는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살며 같은 침실을 썼기 때문에 어머니의 방에 누가 자고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캐롤(가명)이었다. 그녀는 근처 아칸소 시골에서 5학년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러 달이 지났고 우리는 캐롤을 자주 만났다. 지금 살던 아파트의 임대기간이 끝날 때 쯤, 어머니는 교외에 있는 여성 공동체 지역의 낡은 집으로 이사가겠다고 말했다. 그곳에는 수도와 전기가 없었다. 나는 끝없는 숲, 개울, 동물들이 있는 모험을 기대하며 신이 났다. 하지만 80년대 중반에 아칸소에 사는 두 여성이 두 여성이 KKK 본부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떨어진 곳에서 같이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전혀 몰랐다. 

어머니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캐롤은 일하러 갈 준비를 했다. 캐롤과 어머니는 나를 앉혀놓고 누가 묻거든 두 사람은 사촌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캐롤은 해고될 수 있다고 했다. 개학 첫 날 버스 기사가 물었다. 사촌이라고 말하자 기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뒤로도 여러 사람들이 물어보았다. 거듭되는 질문들에 일곱살짜리 어린애는 차차 깨닫게 되었다. 나는 동성애 혐오적인 발언들, 미국의 작은 동네 학교들에서 흔한 악담들을 알아듣게 되었다. 나는 ‘호모’, ‘게이’ 같은 말들을 알게 되었고, 그 뒤에 숨은 악의를 이해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내 어머니가 동성애자임은 분명했고, 동성애자들은 증오받았다.

어머니는 매일 여성과 같은 침대에서 잤고, 내 또래 가족들과 달리 동네 침례교나 감리교 교회에 가서 기도하지도 않았다. 내가 이 사실을 말하면 캐롤은 교사직을 잃게 될 것이고, 어머니와 캐롤에게 실제 피해가 가게 될 것이다. 내가 학교에서 왕따당하게 될 것 역시 무서웠다.

역사가 대니얼 리버스는 ‘Radical Relations: Lesbian Mothers, Gay Fathers, and Their Children in the United States since World War II’ 라는 책에서 70, 80년대에 게이 부모들이 양육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끊임없이 시달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이에게 피해를 준다”, 혹은 ”게이 집안에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다”는 인식에 공개적으로 맞서거나, 지하로 숨어들어 폐쇄적인 커뮤니티에서 비밀스럽게 살아야 했다.

미국에서 관용이 부족한 지역에 살며 게이임을 드러낸다는 것은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의 경우 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서 나를 떼어놓으려 하는 경우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머니가 캐롤을 만나기 일 년 전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의 부모는 이미 별거 중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의 정체성이 알려질 경우 누군가가 어머니에게서 나를 떼어놓으려 할 것이라며 걱정했다.

 

ELIZABETH ELFORD
The author, just home from Girl Scouts camp, with her mother in the summer of 1987.

그래서 나는 비밀을 철저히 지켰다.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이 정도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했다. 나는 친구들의 집에 자주 가지만, 왜 친구들을 우리 집에 부르지 않는지 설명해야 했다. 낯선 사람들을 싫어하는 도사견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지어냈다. 그 이야기는 잘 먹혔던 것 같다. 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몇 년 뒤 남자친구가 나를 우리 집에서 800미터는 떨어진 곳까지만 데려다 주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큰 비밀에는 깊은 수치심이 뒤따른다. 인생의 한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친다. 어머니와 캐롤의 관계를 바깥 세상에 숨기며, 나는 동성애자라는 건 좋지 않다고 배우게 되었다. 그뒤로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이 믿음을 버릴 수 있었다. 나는 여성 친구들에게 느꼈을지도 모를 로맨틱한 기분을 억누르는 법을 익혔다. 언제나 경계하며 감정을 눌렀다.

아칸소를 떠나 진보적인 지역으로 옮긴 다음에야 나는 어머니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저녁 식사 때마다 친구들의 요긴한 이야깃거리였다. 부끄럽지만 나는 ‘내 어머니와 어머니의 아내’라는 말 대신 ‘내 어머니와 어머니의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썼다. 내가 노골적인 농담을 던지는 게 친구들의 툭 터놓고 대화하는 것보다 더 쉬웠기 때문이다.

모든 편견이 그렇듯, 동성의 혐오의 가장 깊은 곳에는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이 공포는 세대를 따라 전달된다. 그리고 이 공포는 의도적이고 신중하게 교육하고 인식해야만 바뀔 수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언어로 귀결된다. 아이들이 자신의 또래들에게 설명하고 방어할 수 있도록 여러 생각과 단어를 갖춰주어야 한다.

부모가 언어를 갖춰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신이 본 대로 따라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언어를 가져오게 된다. 나는 이에 대해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내면화된 언어밖에 갖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의 정체성 때문에 나를 쉽게 꺼내놓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싫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 관계를 끝내라고, 도시의 작은 임대 아파트로 돌아가자고 애걸했다. 남자친구를 찾으라고 했다.

어린 시절을 이런 비밀과 함께 보냈다는 건 축복이자 부담이었다. ‘차이’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지내야 하는 불안감도 더 잘 의식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상황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어린 아이 둘을 키우는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의 삶까지 공감할 수 있기 까지는 몇 해가 걸렸다. 십대 시절의 나는 버릇없고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아이였다. 어머니를 별로 존중하지 않았고 캐롤에게는 더욱 막 대했다.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안다는 사실 때문에 대담하게 굴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공개하지 못했던 이유를 난 지금은 안다. 그때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유레카 스프링스는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 건너온 유별난 아티스트와 작가들이 많이 살았지만, 그곳 주민들은 상업이나 행정에 그다지 개입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캐롤은 땅을 사고 집을 짓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은행 담당자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몰랐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극장은 베리빌에 있었는데, 나는 영화를 보러 가면 어머니와 캐롤 사이에 앉았다. 손을 잡거나 키스하는 일은 없었다. 학교에서 일했던 캐롤은 동료 교사들, 학부모들, 학교에서 늘 사생활을 간섭받았다. 이제 나는 두 사람이 늘 가면을 써야했다는 것, 아무도 깊은 질문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걸 알겠다.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커플로 지낼 수가 없었다.

나는 최근 마흔이 되었다. 어머니가 캐롤과 사귀게 되고, 인생이 극적으로 달라졌을 때의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다. 어머니의 결정이 얼마나 용감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들 두 사람이 어린 나이에 감수했던 위험, 그에 따라 치러야 했던 희생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은 여러 불리함을 감수해야 했다. 대출 금리는 얼마였을까? 집을 지으려 했을 때 땅값을 바가지 쓰지는 않았을까? 자기 아이가 없던 캐롤은 내가 학교 행사에 오지 못하게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내가 농구 경기에서 치어리더를 할 때 캐롤은 옥외 관람석에 앉아야 했다.

2018년에 게이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나처럼 비밀에 의한 고립 상태를 겪지 않길 바란다. 지금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여러 도움이 있다면 작은 동네에서 큰 비밀을 지니고 사는 게 좀 더 쉬웠을까 궁금하다. 내가 #gaymom 이라는 해시태그를 검색할 수 있었다면, 인스타그램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부모님들에 대해 웃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정상적인’ 아이들처럼.

지난 십 년 동안 나는 평등권, 평등하게 결혼할 권리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운동을 보았고, 대안 가족을 아름답게 즐겨 묘사하는 아티스트와 작가들을 보았다. 그들은 아이들이 예술과 문화에 반영된 모습을 보게 해준다. 동성애자 부모 밑에서 자란다는 것에 대한 낯선 면들을 덜어준다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영향은 아이들에게 설명해 줄 때 사용하는 나의 언어다. 이제 내 아이들은 자기 친구들도 할머니가 세 명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남편과 나는 나의 두 어머니에 대해 따스하게, 가족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이성애자 부모에 대해 말할 때와 다르지 않다.

명확하고 이해심이 있는, 정확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성적 지향을 설명해주는 것 이상의 일이다. 어린 나이에 이런 기술을 가르치면 회복력, 관용,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생긴다. 나는 내 가족과 내 자신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언어를 배웠더라면 하고 바란다.

 

Jens Tandler / EyeEm via Getty Images

몇 년 뒤에는 내 아이들의 질문은 폭이 넓어질 것이고 구체화 될 것이다. 나는 동성간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답해줄 기회가 생길 것이다. 아이들은 가까운 곳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지내는 동성 커플들, 아칸소에 있는 두 할머니들이 그 예다. 아이들의 세상은 열려 있으며 수치는 없다. 응당 그래야 한다. 작은 비밀들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수치를 낳는 비밀이 어린 시절에 있어서는 안된다.

내 어머니는 레베카를 만나게 되어 캐롤과 헤어졌다. 어머니는 열기구를 타는 곳에서 23년 전에 레베카와 결혼했다. 여성과의 두 번째 연애는 공개적으로 하겠다고 결심했고, 두려움없이 당당하게 식을 올렸다. 17세였던 나는 부끄러웠고 결혼식 내내 무례하게 굴었다. ‘실수로’ 잔디밭에서 반지를 잃어버렸다.

30대가 되고 아기를 갖게 되자 어머니가 치렀던 희생, 어머니가 살아가기 위해 매일 필요했던 용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우리는 어머니의 삶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내게 사과했지만, 나는 어머니를 용서할 필요가 없다. 용서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내 삶을 사는 게 중요함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허프포스트US의 글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