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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의 장애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장애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형식 중 하나이다.

ⓒJoe Giddens - PA Images via Getty Images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3월 14일에 내 휴대 전화에 떴다. 곧 내 소셜 미디어에는 물리학의 역사를 바꾼 호킹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 올라왔다.

내가 가장 먼저 본 이미지는 미첼 토이의 만화였다. 호킹이 휠체어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우주를 바라보는 실루엣이었다. 운 슈의 만화도 보았다. 호킹이 의자에서 일어나 블랙 홀에 빨려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주류 매체들도 크게 나을 바가 없었다. CNN은 “[호킹이] 심신을 쇠약하게 하는 질병을 극복했다”고 보도했다. 폭스 뉴스는 “[호킹은] 신체가 마비되었지만 꾸준히 인류에 기여했다”고 알렸다. NBC는 호킹이 휠체어 때문에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지는 않았다”고 썼다. 알 자지라는 “점점 더 쓸모없어지는 그의 몸이라는 껍질 안에는 면도날 같이 날카로운 정신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호킹은] 엄청난 신경병을 극복했다”고 썼다. BBC는 “[호킹의] 삶은 반짝이는 지성과 망가져가는 신체의 병치였다”고 보도했다. 텔레그래프리즌 매거진, 로스 앤젤레스 타임스도 ‘휠체어에 묶인 삶’이라는 표현을 썼다.

호킹의 장애가 짐이었다, 탈출해야 할 대상이었다는 보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실망스럽지만 놀랍지는 않다. 매체는 장애를 거의 다루지도 않거니와, 장애를 다룰 때면 장애인 차별을 일삼는다. 나는 호킹의 천재성을 아주 조금이라도 가질 수 없지만,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인한 장애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아주 잘 알고 있다.

호킹은 21세 때 루 게릭 병(ALS) 진단을 받았다. 루 게릭 병은 근육 운동 상실을 초래하고 결국 마비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호킹은 첫 진단을 받았을 때 예상되었던 것에 비해 훨씬 더 오래 살았다.

나는 27세에 엘러스-단로스 증후군(EDS) 진단을 받았다. EDS는 유전에 의한 퇴행성 콜라겐 장애이며 여러 증상을 동반한다. 콜라겐은 신체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다. 우리의 몸을 만드는 벽돌, 벽돌 사이의 모르타르가 모두 콜라겐이다. 콜라겐에 유전적 문제가 있을 경우, 심각한 영향이 생길 수 있으며 수명이 짧아질 수도 있다. 내가 매일 겪는 증상만 적어도 이 기사보다 훨씬 길어지겠지만,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나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관절 탈구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만성 통증에 시달린다.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내 병력의 수수께끼 같던 부분의 상당수가 이 진단으로 인해 해결되었다. 우리 사회가 장애를 본질적으로 좋지 않은 것으로 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애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달라진다. 위의 기사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호킹의 ALS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EDS가 내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주었듯, ALS가 호킹의 삶의 모든 면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매일 통증에 시달린다. 이 통증은 약이나 수술로 나아지지 않는다. 매번 탈구 될 때마다 통증은 더 심해지고, 나는 이 고통을 겪으며 살다가 결국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육체적 고통에 점철된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내게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매일 어떻게 이걸 견뎌내는지 의아해 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나는 매일 EDS를 극복하려 싸우지 않는다. 그저 병을 지니고 살아갈 뿐이다. 이건 내 존재의 현실이다. 치료법이란 없다. 내 DNA 구조를 바꾸어 정상적 콜라겐을 만드는 이중 나선 구조로 짜맞추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EDS를 지니고 살든가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전직 장의사로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만져보았다. 지금 31세인 나는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통증이 뒤따르는 장애를 지니고 산다는 건 쉽지는 않다. 내 몸은 내 삶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더 자주 제한하는 것은 장애가 없는 사람들만을 위해 설계된 이 세상이다.

내가 휠체어를 쓰기 때문에 약혼자와의 데이트가 너무나 힘들 때, 나는 내 장애와 싸우는 게 아니다. 내가 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사설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약을 사지 못할 때면 나는 내 장애와 싸우는 게 아니다. 건강 보험 비용 때문에 내가 내 병을 관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과 싸우는 것이다. (호킹은 마지막 순간까지 건강 보험 민영화에 맞서 싸웠다. 그는 영국 건강 보험이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는데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내가 휠체어를 쓰면서 일어날 때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나를 놀릴 경우, 나는 장애가 양극성이 아닌, 폭넓은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세상과 싸우는 것이다.

종 안의 다양성은 종의 강화를 위해 필요하다. 겸상 적혈구성 빈혈 환자는 말라리아에 면역성이 있다. 전화, 인터넷, 문자 메시지는 난청 때문에 발달했다. 나는 EDS 환자들이 우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몸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 우주인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호킹 자신도 ALS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더 많았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매체가 장애에 긍정적인 면이 없다고 묘사하는 것은 장애가 인류의 드넓은 유전적 차이의 하나임을 인식하지 못함에 다름 아니다.

매체는 장애를 잘 다루지도 않거니와, 다룬다 해도 장애인 차별에 크게 기울어 있다. 언어는 우리의 경험에 큰 영향을 준다. 호킹의 장애가 호킹이 ‘극복’ 또는 ‘정복’해야 했던 것이라는 매체의 보도는 장애는 혁신을 가로막고, 위대한 지성과 공존할 수 없고, 창조성을 막는 것이라는 낡고 부정확한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치료를 멀리하게 만들고 장애를 놀림감으로 삼는다. 장애는 다양함의 정상적, 중립적 형태일 뿐이나,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장애를 근절하고 고치고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만든다.

호킹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원리를 밝힌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장애인으로서 매일 매일을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우주의 원리를 밝혀냈다. 다른 장애인들의 삶과 마찬가지였다. 무신론자였던 호킹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내세로 걸어가는 그림은 장애와 천재성, 성공, 만족이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암시나 마찬가지다. 모욕적인 처사다.

낡고 상투적인 말들을 되풀이하지 말고 이제 새로운 맥락을 만들자. 장애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형식 중 하나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보다 너그럽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 글은 허프포스트US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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