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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가스 테러’로 다시 불붙은 ‘100년 앙숙’ 영-러 외교분쟁

최근 영국이 쫓아낸 러시아 외교관 추방 규모는 33년 만에 최대다.

ⓒMicroStockHub via Getty Images

영국이 전직 러시아 스파이 부녀에 대한 신경가스 공격을 이유로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추방하겠다고 밝히면서 영-러 갈등이 공개적 보복 단계로 접어들었다. 러시아 정부도 맞대응을 선언해, 러시아와 서구의 ‘신냉전’ 가열이 불가피하다.

영, 대러 압박에 동참 호소…미국 가세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14일 의회에 나와, 전날 자정까지 영국 남부 솔즈베리에서 발생한 세르게이 스크리팔(66) 부녀에 대한 신경가스 공격을 해명하라는 최후통첩을 러시아가 거부했다며 외교관 추방 계획을 밝혔다. 또 러시아와의 고위급 접촉을 중단하고, 6월에 러시아에서 개막하는 월드컵에 영국 각료나 왕실 인사가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영국 방문도 취소한다고 했다. 메이 총리는 “그들은 군사적 용도의 신경가스를 유럽에서 사용해놓고도 비꼼과 모욕,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메이 총리가 러시아의 반응을 “완벽한 경멸”이라고 비난한 가운데, 영국 정부는 우방들의 단호한 공동 대응을 요구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외무장관은 ‘동맹국들은 러시아에 함께 맞서야 한다’라는 제목의 <워싱턴 포스트> 기고에서 “고요한 중세 도시(솔즈베리)가 2차대전 이후 유럽 땅에서 처음으로 신경가스 공격을 목도했다”“영국인들의 공포감”을 언급했다. 그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 국가가 영국에서 살인을 기도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친구들이 우리를 지지해줄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희망한다”고 했다.

ⓒADRIAN DENNIS via Getty Images

미국은 영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를 파괴하고 더럽히려는” 러시아의 시도를 비난했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영국에 대한 “절대적 연대”를 표현하며 “미국은 군사용 신경가스를 이용한 두 사람에 대한 공격에 러시아가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는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솔즈베리는 화학무기 공격의 마지막 장소가 되지 않을 것이며, 뉴욕을 비롯한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도진 영-러 ‘100년의 앙숙’ 관계

영국의 러시아(옛 소련 포함) 외교관 추방 규모는 33년 만에 최대다. 두 나라는 1985년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런던지부장’으로 이중스파이였던 올레그 고르디예프스키의 영국 망명 사건 때 서로 31명씩 외교관을 추방했다. 영국이 가장 많은 러시아인들을 추방한 때는 1971년으로, 간첩 행위를 이유로 90명을 내쫓았다. 당시 영국 주재 소련 외교관 수는 550명이었다. 지금은 59명 중 40%에 해당하는 규모를 추방하니까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소 냉전’이라는 표현에 가려지기는 했어도, 과거에도 영-러의 스파이전은 미-소 간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로 치열했다. 이번 사건은 그런 앙숙 관계를 재조명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현대사에서 영-러의 견원지간은 냉전 개시 전인 1918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러시아가 1차대전에서 발을 빼자, 영국은 미국·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캐나다·일본·이탈리아 등을 부추겨 소비에트 러시아를 침공했다. 폐위돼 그해 7월에 처형당한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영국 왕 조지 5세는 사촌간이었다.

영국은 이후에도 소련이 유럽을 공산화하고 그 영향이 자국에 미칠 가능성을 크게 걱정했다. 2차대전 발발 전까지 독일에 유화적 태도를 보인 것에는 소련에 맞서는 방패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비서에게 “히틀러가 지옥(소련)에 쳐들어갔으니 하원에 나가 악마(스탈린)에 대해 좋게 얘기해줘야겠다”고 말했다. 처칠은 소련이 영국이 대독 전쟁에서 동맹이 된 뒤에도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에게 “볼셰비키는 악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난 그들한테 일말의 신뢰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냉전은 이런 근본적 불신과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소련으로서는 돈의 유혹과 체제에 대한 환멸에 영국 MI6 등 서구 정보기관의 이중스파이가 된 정보 요원들이 골칫거리였다. 양국은 냉전 종식 후에도 소규모 ‘스파이 추방전’을 이어갔다. 양국 사이에서는 냉전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양국의 적대 관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나 러시아 이중스파이들이 영국을 망명지로 택하게 만들었다. 2006년 영국에서 러시아 쪽의 소행으로 강하게 의심되는 방사능 물질 공격으로 사망한 전직 국가보안위원회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도 그들 중 하나다.

ⓒHeritage Images via Getty Images

강경한 푸틴…영, 맞서기 쉽지 않은 상황 

영국이 대응에 나섰으니 이제 러시아가 보복할 차례다. 러시아 외무부는 메이 총리의 발언에 “전례 없이 노골적인 도발”이라고 반응했다. 또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맞서기로 했다”, “곧 대응하겠다”며 보복을 예고했다.

18일 대선 투표에서 4선 당선이 확실시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4일 보란듯이 크림반도에서 마지막 유세를 했다. 그는 청중을 향해 “당신들의 결정으로 역사적 정의가 회복됐다”고 역설했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병합한 일로 서구의 제재를 받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푸틴 대통령의 연설에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영토”라고 반박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앞서 영국의 최후통첩에 신경가스 샘플을 러시아로 보내면 한 번 조사해보겠다는 투로 답했다.

러시아가 어떤 대응을 할지가 이번 사태의 전개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국제 관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영국이 더 강력한 조처를 하기에는 힘이 부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우선 메이 총리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진 상태다. 게다가 영국은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기로 한 상황이라 유럽 동맹국들의 일치된 지지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러시아의 도발적 언행에 위협을 느끼지만, 이미 정서적으로 멀어진 영국을 선뜻 돕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유럽의 한 외교관은 유럽연합의 통합을 거부한 영국이 유럽연합 차원의 대러시아 제재를 추구한다면 아니러니가 아니냐고 <워싱턴 포스트>에 말했다. 미국이 철강 관세 부과로 유럽을 화나게 만든 점도 영-미의 대응에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 영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도 러시아가 유럽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이 기구 차원의 대응을 요구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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