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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14일 14시 50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3월 14일 14시 50분 KST

우리에게 필요한 '메타 페미니즘'

현대 한국의 넷-페미니즘 담론 비평

huffpost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여성 혐오주의자이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이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 진영에서든, 대학 캠퍼스에서든 간에 말이다. 어쩌면 이를 페미니즘 운동의 성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페미니즘에 대한 옹호는 인간이 갖추어야만 하는 최소한의 덕목이라는 인식이 확산하였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대개 여성 억압이 가장 유서 깊고 가장 만연한 억압임을 전제하며, 심지어 그렇기에 여성 억압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 한국의 페미니즘 담론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이루고 있는데, 한쪽은 ‘워마드’로 대표되고, 다른 한쪽은 교차적 페미니스트와 맥을 같이 한다. 한때나마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했던 필자는 두 흐름에 휘말리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이에 편승하기도 했다. 얼핏 다르게 보이는 두 흐름은 모두 페미니즘은 만병통치약이라는 강력한 신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게일 루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다루어지는 방식은 1970년대에 맑시즘이 그러했던 것과도 매우 흡사하다. 페미니즘 운동은 점점 ‘운동을 위한 운동’으로 변질되었고, 활동가 개개인은 성찰의 기회를 잃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담론과 운동이 방향성을 잃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한국 사회는 페미니즘 담론의 비평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 페미니즘 담론에 말을 얹는 이들은 대부분 페미니즘에 무지한 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의 ‘비판’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성을 촉구하는 몇몇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반-여성주의자의 항변으로 치부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회 운동이 그렇듯이 페미니즘 운동 또한 내부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부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양질의 담론이다. 이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더욱 정의롭고, 효과적인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배제적 페미니즘’과 교차적 페미니즘 담론을 운동의 성과와 관련지어 비평하고, 담론이 형성된 원인을 살핌으로써 문제 극복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TZAHIV VIA GETTY IMAGES

Ⅰ. 워마드와 ‘배제적 페미니즘’의 부상(浮上)

태초에 녹색의 땅이 있었다. 그것은 ‘거울’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피신처’이기도 했다. 넥슨 성우 교체 사태 이후로는 ‘남혐’이라 비난받는 빌미를 제공하는 ‘낙인’이 되기도 했다. 학자와 평론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전복, 혹은 대항폭력의 결과로 해석했다. 이처럼 메갈리아와 메갈리안의 탄생은 한국 페미니즘 담론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역사의 중심이었던 메갈리아가 쇠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우리는 메갈리아의 쇠퇴에 주목해야 하는가.

여성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 되던 메갈리안들은 메갈리아 내부에서 발생한 게이 혐오 발언에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메갈리아의 분열과 워마드의 등장은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 억압에 분노하던 이들이 반드시 페미니스트일 필요는 없고, 그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정의할 필요도 없다. 어떤 이들은 페미니즘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페미니즘은 오로지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 빈곤층, 여성 외국인, 여성 퀴어, 여성 장애인만을 위한 운동. 여성혐오를 하는 게이는 ‘똥꼬충’이라 불려 마땅했다. 그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워마드는 탄생했다.

워마드(WOMAD)의 어원으로는 크게 두 가지 가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여성(Women)’과 ‘떠돌이(Nomad)’의 합성어라는 설이다. 즉, ‘떠돌이 여성’으로, 워마드가 메갈리아에서 유래되었음을 나타낸다. 또 한 가지는 ‘여성(Women)’과 ‘격분하다(Mad)’의 합성어라는 설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워마드는 분노한 여성들의 군집이다. 이러한 어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 워마드는 메갈리아에 사상적 기반을 빚지고 있고, 둘째, 워마드의 가장 지배적인 공기는 분노다. 워마드는 흔히 한국 페미니즘의 이단아로, 페미니즘이 혐오에 악용되는 최초의 사례라 비판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워마드가 뿌리를 두고 있던 메갈리아에서도 차별과 혐오는 항상 존재해왔다. 가난 혐오, 외국인 혐오, 트랜스 배제(성기 환원주의, 및 신체 정상성 조장)는 워마드와 메갈리아가 공유하는 부분이었다. 따라서 워마드는 페미니즘 담론에서 ‘없던 혐오’를 ‘창출’해낸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했던 혐오를 답습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워마디언과 메갈리안의 유일한 차이점은 메갈리안과는 달리 워마디언은 혐오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조장했다는 것이다. 메갈리아에는 간간이 자신이 트랜스 여성임을 밝히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고, 비-서울권에 거주하는 이들이 지역적 특색을 지닌 여성 혐오 양상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여성 성노동자가 진상을 부리는 (대체로 남성인) 고객들로 인한 힘듦을 토로하는 글도 있었다. 메갈리아에도 혐오 발언은 존재해왔지만, 이에 대항하고 자신의 소수자성을 밝히는 사례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마디언들은 달랐다. 그들은 여성 억압은 모두 같은 형태를 지닌다고 가정하며, ‘여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집단도 배제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들은 ‘창녀’와 ‘창녀가 아닌 여성’ 간의 유사성을 간파하면서도 ‘그 어떤 사람도 창녀가 되면 안 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그들은 트랜스 여성을 기존의 ‘여성성’에 순응하기만 하는 가장 극단적인 여성혐오주의자로 매도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온라인상에서 게이, 트랜스 여성과 드랙퀸, 크로스드레서 등 규범 밖의 젠더표현을 하는 ‘남성’을 아웃팅하는 데 앞장섰다. 노동자 계급의 남성들이 자신의 분노를 자신의 아내와 자식에게 쏟아붓듯이 워마드와 뜻을 같이하는 여성들의 분노도 점점 아래로만 향했다. 메갈리아의 움직임은 대항폭력이라 볼 여지가 있지만, 워마드의 그것은 폭력에 더 가까워 보인다.

워마드는 정치 혐오적인 특성도 있는데, 이 또한 메갈리아와 무관하지 않다. 가장 지배적인 의견은 아니었더라도 메갈리아에서도 ‘여성들의 문제인데 여성 단체가 아닌 다른 단체들이 끼어들어야 하는가.’는 불만은 늘 존재해왔다. 노동자연대, 알바노조, 청년좌파로 대표되는 노동 단체는 항상 눈엣가시였다. 앞서 예시로 든 그 단체 중 몇몇은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묵살했으며, 내부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은폐한 이력이 있다. 이를 빌미로 몇몇 사람들은 계급문제보다 젠더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억압은 서로 교차지점을 가지며,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메갈리아는 단체 내 자정을 위해 노력하는 노동자 계급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힘을 보태주기보다는 그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강남역에서 페미사이드가 발생한 그 날, 시위를 조직하면서도 메갈리안들은 노동 단체들의 연대를 못 미더워했다. ‘공을 가로챈다.’는 이유에서였다. 페미니즘의 발전에 맑시즘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빈곤한데도 말이다. ‘정치 혐오하는 페미니스트’는 모순 어법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여성 문제는 정치적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정치성을 띠는 것은 당연하다.

소수자 혐오와 정치 혐오적 정서는 워마드의 페미니즘 운동이 전략적 실패를 거두게 했다. 특히 TERF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워마디언’들은 여성 혐오에 반하기 위해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트랜스 배제는 신체 정상성과도 관련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규정하는 이상적인 신체는 문화적으로 장려되는 남성성을 갖춘, 장애가 없는 내국인 시스젠더 남성의 몸이다. 신체 정상성 규범에 의하면, 여성, 퀴어, 장애인 그리고 외국인은 영원한 타자이다. ‘여체’는 인간(남성)에 미치지 못하는, 더 열등한 것이기에, 여성이 ‘여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더 정밀하고 엄격한 기준이 필요했다. 이상적인 ‘남체’는 거의 모든 남성이 가지고 있는 신체이지만, 이상적인 ‘여체’는 실재하는 여성이 가지기 힘든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여체’이기 위해서는 가슴이 발달하고, ‘여성기’가 있으며, 임신/출산이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여체’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미의 기준과도 일치한다. 남성의 눈으로 대상화할 수 있는 신체 - 뽀얀 피부와 큰 눈, 높은 콧대와 갸름한 얼굴형. 적당히 말랐지만 굴곡 있는 몸매. 얇고 긴 팔다리. 전체적인 분위기도 사회적 주류의 요구에 걸맞게 때때로 청순하고, 때때로 섹시해야 한다. 모든 여성, 그리고 임신 가능성이 있는 비-여성들은 박근혜 정부의 출산지도와 ‘이상적인 유방’이라는 제목으로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미지에 분개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억압인 동시에 ‘여체’에 대한 억압이다. ‘여체’를 획일화하고 이를 국가의 필요에 따라 동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유방이 발달하지 않은 여성도 여성이다. 그렇다면 페니스를 가진 여성이 여성이라 불리지 못

할 이유가 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주류 사회의 ‘여체’ 억압에 동조하는 일이 아닌가. 페미니즘에서 교차성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아니지만, 페미니즘 담론을 확장하고 연대의 명분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교차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은 페미니즘 담론을 극소수 특권층 여성의 전유물로 전락시켜버린다.

다른 사회적 약자 집단에 속한 이들을 공격하고, ‘여성’을 편협하게 정의하며 더 많은 사람을 배제하려는 것은 전략적으로 바람직한가. 필자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Ⅱ. 모범답안이 된 교차적 페미니즘

워마드로 대표되는 ‘배제적 페미니즘’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SNS, 특히 트위터 계정과 이를 기반으로 한 단체들의 활동을 예로 들 수 있다.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다양한 성별, 성장배경,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비-여성이 여성 억압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여성 억압’은 항상 동일하게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을 비교적 일찍 알아챘다. 그들 중 몇몇은 한국의 넷-페미니즘에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배제적 페미니즘’에 비해, 교차적 페미니즘은 좀 더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대부분의 (외국인, 혼혈, 장애인, 퀴어, 성노동자 등의) 트위터 이용자가 요구하는 바에 부합했다. 교차적 페미니즘은 여성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부각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도 적용할 만했다. 그러나 교차적 페미니즘만이 ‘배제적 페미니즘’에 대항할 수 있는가? 과연 교차적 페미니즘은 ‘배제적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넷-페미니즘 담론의 모범 답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 먼저 ‘교차성’ 개념이 제안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호 교차성 이론의 창시자인 킴벌리 크렌쇼는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범주가 단일하지 않으며, 젠더, 인종, 사회 계급 등 다양한 측면이 상호 교차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흑인 여성은 흑인 억압과 여성 억압의 영향 하에 있을 뿐만 아니라, 흑인 여성으로서도 억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 억압의 작동 방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규명한 모델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 교차성 개념, 그리고 교차적 페미니즘에는 다음과 같은 한계가 존재한다.

첫째는 ‘교차성’ 모델 자체의 한계이다. 교차적 페미니즘은 인종주의와 트랜스 정치, 페미니즘의 연결성을 강조한 획기적인 모델로 평가받았지만, 페미니즘이 발전해 온 계보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기존의 프레임으로 새로운 현상(혹은 이전에 주목받지 못했던 현상)을 분석하려는 시도는 늘 존재해왔고, 페미니즘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20년 동안 유행한 교차적 페미니즘은 맑시스트 페미니즘의 한계를 공유하고 있다. 맑시즘 페미니즘이 맑시즘을 핵심중추로 삼아 페미니즘을 분석했듯, 교차적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다른 이슈를 분석한다. 맑시스트 페미니즘은 계급해방이 여성해방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교차적 페미니즘 또한 여성해방이 퀴어와 장애인, 비-백인과 문화적 소수자 또는 나이로 인해 차별받는 이들을 해방하리라고 가정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맑시스트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계급차별과 여성 억압의 공통점을 분석하며 계급차별만큼 여성 억압은 중요한 문제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억압을 이원화한 모델에 불과하며, 계급차별과 여성 억압 이외의 이슈는 비교적으로 덜 중요한, 사소한 이슈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맑시스트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더라면 교차적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열쇠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중요한 사실은 거대 이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또 다른 거대 이론은 기존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억압을 핵심 중추를 통해 분석하려는 시도는 또한 억압의 ‘하위분류’들 간의 차이를 간과한다는 면에서도 문제적이다. 비-백인, 퀴어, 장애인, 외국인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게 교차적 페미니즘이라면 그러한 ‘하위분류’에 속하는 범주가 받는 억압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가? 교차적 페미니즘의 아이디어에 따르면 ‘여성’이라는 속성을 공유하더라도 인종, 국적, 성 정체성, 장애 여부에 따라 억압의 작동 방식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같은 범주 내에서도 여성 억압을 받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정교하고 영향력이 큰 억압을 받을 것이다. 교차적 페미니즘의 대전제가 전자이든 후자이든 결국 특정 범주의 구성원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억압받으리라고 결론지을 위험성을 내포한다.

둘째는 ‘교차성’ 모델의 적용 방식이 가지는 한계이다. ‘특권 포지셔닝’은 이러한 한계를 잘 부각한 대표적인 사례다. 본래 이 실험의 목적은 ‘사회적 시스템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동시에 어떻게 사람들을 소외시키는지를 물리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인식론은 결국 억압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을 ‘불행경쟁’에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했다. 흔히 가장 다양한 층위의, 가장 정교하고 복잡한 억압을 겪는 집단은 빈곤층 노년 장애인 퀴어 여성이라고 말해진다. 그런데 같은 조건에서 꼭 같은 방식으로 억압을 겪을까? 빈곤층이라면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사회보장 제도에 따라 그가 겪는 억압의 양상은 달라질 것이다. 노년이라면 자식의 유무, 그들과의 관계가 억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장애인이라면 장애인 등급제를 받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는 사회적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퀴어라면 시스 동성애자인 편이 트랜스젠더, 바이섹슈얼, 에이섹슈얼 혹은 크로스드레서, 에세머인 편보다 더 퀴어 커뮤니티의 지원을 받기 용이할 것이다. 그리고 특권의 적용 양상을 물리적으로 확인하려는 시도의 이면에 감춰진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가장 많은 특권을 가진 이들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많이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불행하다는 것인가? ‘특권’이라 호명되는 것은 사실 가장 기본적인 권리임을 고려하면, 특권이 행복의 기본 전제라 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이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은 가장 불행한 이들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가장 ‘불행한’ 이들, 즉 ‘최(最) 소외계층’은 연민과 시혜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결론, 이것이 초래한 결과는 바람직한가? 의도가 어떻든 간에 조금이라도 특권을 가졌다는 점에 안도하고, 타인의 삶에 등급을 매기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루인은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범주 없이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지적하며, 범주는 삶을 설명하는 도구도, 삶을 이해하는 표식도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마지막으로 특정 범주가 받는 억압은 고유하다는 교차적 페미니즘의 전제는 환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며, 타자를 가시화할지언정 비체를 조명하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차이의 정치학이지만 거대 이론으로 거듭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차이를 조명하지 못한다. 결국 교차적 페미니즘은 ‘배제적 페미니즘’의 대안일 수는 있으나, 최선이 아니라 차선일 뿐이다.

III. 페미니즘의 ‘실패’와 그 원인

 많은 여성학자,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넷-페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그들의 성과에 주목하려 했다. 넷-페미니즘은 진입 장벽이 낮고, 파급력이 크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무비판적이고,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한다는 단점이 있다. 가장 많은 동의를 얻는 메시지가 가장 큰 힘을 얻는다. 여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기 위한 시간은 없다. 넷-페미니즘이 성공이라면, 그것은 절반짜리 성공일 것이고, 그것이 실패라면 절반짜리 실패일 것이다. 그렇다면 넷-페미니즘의 ‘실패’와 그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 정체성 정치의 정수(精髓)라고도 할 수 있는 당사자성은 인권의 장에서 발화할 자격을 얻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되었다. 최근 2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인권 담론은 당사자 중심으로 구성되어왔으며, 페미니즘 담론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인 남성보다 여성 억압을 경험하고,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여성 당사자의 발화를 더 가치 있게 평가하려는 시도 역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당사자성은 다음과 같이 페미니즘 담론의 형성 및 확장에 기여했다. 먼저, 당사자성은 발화 혹은 담론 생산의 주체로서 ‘여성’을 소환하였다. 이는 단지 기존 패러다임을 통해 여성을 포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사자성에 기반을 둔 사유는 절대 중립의 영역에 있다고 여겨졌던 지식이 실은 제1세계 비-퀴어 비-장애인 백인 남성을 위주로 구성되었음을 역설한다. 즉 기존 지식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이 형성된 과정을 향한 비판과 검토가 가능해졌다. 또한, 당사자성은 단 한 번도 지식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이들(사회적 약자 집단에 속한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보편화하고, 이를 이론화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제공했다. 기존 지식의 편향성이 드러나면서, ‘여성학’과 ‘퀴어학’ 혹은 ‘장애학’의 ‘편향성’을 비판하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뿐 아니라 당사자성은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혐오인지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하는 분석 틀을 제공하였다. 이전에는 특정 발언 혹은 행위의 내용만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나, 이제는 발언자와 수행자의 사회적 입지라는 기준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분석 틀을 이루는 두 요소 중에서 전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후자의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었다. 드디어 보편적 지식과 절대적 진리의 시대가 가고, 당사자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체성 정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분석 틀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한지,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당사자성은 필연적으로 환원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는 쉽게, 여성 억압 기제의 억압을 받는 이들은 당연히 여성일 것이라 가정한다. 이러한 환원론적 시각은 한 개인이 다수의 소수자성을 지니게 될 가능성을 간과한다. 예를 들어 여기에 혼혈인 동시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지정 여성이자 논 바이너리 트랜스인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는 혼혈인가 정신질환자인가? 여성인가 트랜스인가? 우리는 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으며, 그 사람은 어떤 집단에서 대표성을 가질까? 결국 그는 어떠한 범주에 속하든 대표성을 가지진 못할 것이며, 정신질환자 중에서도 혼혈, ‘여성’ 중에서도 트랜스로 인식될 것이다. ‘정신질환자이자 지정 여성’, ‘혼혈이자 트랜스’라는 수식어는 대안이 될 수는 있지만, 최선책은 아니다. 결국 그는 호명하는 이의 필요에 따라 ‘여성/트랜스’, ‘혼혈’ 혹은 ‘정신질환자’라 불릴 것이다. 이렇듯 당사자성의 환원주의적 특성은 특정 프레임으로는 인식, 적용 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당사자’와 함께 ‘당사자성’ 개념의 협소성 또한 문제가 된다. 페미니즘 진영에서 당사자성은 매우 고정적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고정적인 틀을 지속시키는 맥락이 존재한다. 그리고 학문으로서 존재하는 페미니즘(여성학)은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사회 운동과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동시에, 여성 지식인들을 적극 수용하고, 그들의 재능과 경력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해주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여성학계는 단지 학계가 아닌, 여성(이라고 인정받은 이들에 한해서)이 안전을 보장받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쉼터(shelter)이다. 그렇기에 ‘여성’과 ‘당사자’의 기준을 엄정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했다. 그리하여 다른 학문이 ‘금녀’의 구역인 반면, 여성학과는 ‘금남’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성학과를 비롯한 페미니즘의 공간은 결코 권력 구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여성 간에도 위계는 존재했고, 이를 무시한 결과로 여성학계와 페미니즘 단체에는 특권층 중심주의, 한국계-중심주의, 시스-이성애 중심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은 여성 억압은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여성이 여성 억압의 유일한 피해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경직된 당사자성을 주창하는 페미니즘 진영의 전통은 당사자성을 재사유하고, 이를 확장하려는 시도의 걸림돌이 되었다.

둘째, 연대의 실패이다. 특히 계급투쟁과 문화 정치를 양분하려는 사유 방식은 페미니즘 진영을 비롯한 좌파 진영 전체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리사 두건은 ‘평등의 몰락’에서 진보 좌파 활동가와 지식인이 경제 대 문화정치, 정체성 기반 대 좌파 보편주의 수사, 이론적 비판 대 실천적 조직 캠페인이라는 비생산적인 전투에 빠져버렸음을 지적했다. 그녀는 이 저서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의 정의와 기원을 밝히고, 좌파의 분열을 일으킨 원인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좌파가 분열했다는 그녀의 주장은 오직 한때나마 연대가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기에 성립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아래를 향한 재분배를 목표로 한 좌파 진영의 강력한 연대가 존재한 적 있었는가? 한국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공유하고 있지만, 곳곳에 쏟아져 나오는 우익 프로파간다(반-동성애, 반-이슬람 프로파간다)에 비해서 미국 좌파 담론은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 좌파 진영이 미국 좌파 진영들이 향유하는 연대의 기억을 공유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소수자 인권 운동/담론은 근 10~20년간 성장했으며, 아직 발전 초기 단계이다. 한국의 좌파 운동은 흔히 계급투쟁으로 대표되며, 좌파진영에서 문화정치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반면, 한국 문화정치의 큰 지분을 차지하는 페미니즘 운동과 LGBT 운동은 혐오 발언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집중하느라 여성/성소수자 이슈와 계급문제의 연관성을 포착하지 못했다.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이 다른 진영과 연대할 만한 기회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젠더가 인종과 무관한 개념이라 여겨지고, 여성학과 교수가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세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여성학이라는 학문으로 변모한 순간부터 한국의 페미니즘 담론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페미니즘이 엘리트 여성에게 보급되고, 엘리트 여성이 페미니즘 담론을 재생산하여, 하층 계급(빈곤층, 저학력, 퀴어, 장애인) 여성들은 담론 생산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가장 혁명적인 색채를 지녔던 페미니즘은 인종주의, 시스-이성애중심주의, 학력주의/학벌주의 등 기존 억압 기제들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동원되었다. 이렇듯 ‘배제적 페미니즘’은 이미 학계에서 정설이 되어가고 있으며, 학문적 위상을 얻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은 궁극적으로는 구조적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가부장제에서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이에게 대항할 것을 요구하고, 성폭력 생존자에게 더 ‘합리적인’ 대응을 요구한다. 이러한 억압 구조에서 가해자가 해야 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요구는 과연 여성주의적(的)인가? 이러한 요구가 여성주의적(的)이라면 여성주의는 과연 유효한가?

소수자는 수적으로 열세에 있는 집단을 지시하는 개념어는 아니지만, 수적으로 열세인 소수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부닥친다. 수적으로 열세라는 점은 인적 자원의 부족, 결핍이며, 그것은 곧 운동력의 고갈을 의미한다. 만약 에너지의 고갈이 지속한다면 당장 활동가의 수가 부족하여 인력난에 시달릴뿐더러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교차적 페미니즘을 표방하겠다는 선언은 한편으로는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비-서울권에서는 좌파 진영에서 가장 유행하는 페미니즘 담론을 겨우 접할 수 있는 정도다. 퀴어 이론, 장애학, 반-식민주의 이론은 서울, 그것도 소위 명문대학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만 접근 가능하다. 특정한 담론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자칭 교차적 페미니스트들이 타인의 언-PC함을 비판하고, 그를 온라인에서 조롱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이는 모든 앎이 권력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질문이다. 억압받은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사회적 주류의 눈으로는 포착하지 못하는 세상을 본다. 그러므로 특정 담론을 접하기 전에도 우리는 억압의 부조리함에 분노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혐오 발언을 처벌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발화 주체가 드러나지 않는 온라인에서는 흔히 모든 혐오 발언이 동일 수위에서 다뤄지고 비판받는다. 조리돌림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PC의 수호자’들은 정작 모든 혐오 발언이 같은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어떤 혐오 발언은 사회적 약자의 발언권을 묵살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어떤 것은 피해적 사회화의 산물이거나 언어 재전유일 수도 있다. 남성이 여성을 ‘김치녀’라 부르는 것은 여성이 자기 자신을 ‘김치녀’로 부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논리다. 또한 모든 단어는 혐오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 있으며, 이는 사용하는 양상에 따라 혐오 발언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든 발언을 혐오 발언이라 규정하며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하기보다는 담론과 정보의 불균형을 인지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직접적인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계급투쟁과 유리된 문화정치는 공허하다.

셋째, 페미니즘의 절대화, 이상화이다. 이는 ‘배제적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이들과 교차적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다. 성향과 관계없이 페미니스트는 여성해방을 최우선시하고, 페미니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페미니스트라 자칭하는 이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지게 하거나, 반대로 도덕적 부채감에 시달리게 하기도 했다.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은 대개 여성 억압이 다른 억압에 선행하며, 이에 맞서는 것이 최우선이라 전제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여자라서 죽은 사람은 애도하면서도 트랜스 여성을 구타하는 영상을 오락거리로 소비하고,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남성들(그들이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이유는 빈곤 문제와는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을 ‘거지새끼’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심지어 ‘도덕을 버린다’라고 표현하면서 적극적으로 다른 억압 기제에 동참하기도 하는데, 이는 페미니즘이 도덕이 아닌 상식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를 통해 ‘배제적 페미니즘’이 페미니스트들의 도덕적 해이에 기여할 것이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 교차적 페미니스트일 경우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교차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억압뿐만 아니라 다양한 억압 기제에도 관심을 가지는데, 대개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경험체계, 가치체계를 반영한다. 교차적 페미니즘은 엘리트나 지식분자의 전유물이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이는 다양한 소수자성을 지닌 사회적 약자 집단(중에서도 담론에 접근 가능한 환경이 주어진 이들을 중심으로)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장애인 여성이 교차적 페미니즘을 통해 장애학과 여성학의 접점을 찾으려 하고, DFAB(Designated Female at Birth) 트랜스가 교차적 페미니즘을 트랜스 친화적으로 이해하는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배제적 페미니즘’ 담론과 마찬가지로, 현대 한국의 교차적 페미니즘 담론은 당사자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여기서 당사자성으로 인한 또 하나의 딜레마가 등장한다. 더 많은 당사자성(소수자성)을 확보할수록, 자신의 언행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당사자성은 특정 주장의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하는 조건인 동시에,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더 많은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도록 강제하는 억압 기제로 작동한다. 특권층 여성은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비-한국계/외국인/장애인/퀴어/빈곤층 여성은 교차적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발언권을 얻기 위해 더 처지가 나쁜 이들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장애인의 장애인 혐오, 퀴어의 퀴어 혐오는 조명되지 않고, 그들이 남긴 말은 발화 주체가 삭제된 채 온라인 공간에서 부유한다. 소수자이기에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은 도덕적 정당성을 잃으면 소수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더 많은 당사자성(소수자성)은 또한 도덕적 부채감의 원인이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는 소외계층의 여성들이 페미니즘 운동에 진입하기 어렵게 만들고, 더 많은 스트레스로 인한 빠른 은퇴를 초래한다.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이들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더 많은 재산, 소득을 가진 이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토록 당연한 원칙이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가? 우리는 어쩌면 자신이 페미니스트이기에 ‘상식’에 부합한다거나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은연중에 자신이 경험하는 억압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며, 다른 억압 기제에 동참하지는 않았는가? 페미니스트 선언은 그 어떤 것의 면죄부도 되지 않는다. 이 선언은 오로지 깊은 사유와 성찰에 의해서만 유효하다.

 Ⅳ. 우리에게 필요한 ‘메타-페미니즘’

“페미니즘은 리부트되었다.”는 손희정의 “과감한 진단”처럼 메갈리아의 등장과 함께 페미니즘은 트렌드가 되었다. 이는 페미니즘 담론 자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증가했고, 페미니즘이 소수 담론의 위치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페미니즘 담론의 질이 낮아지고, 생산 주체의 비판이 결여된 채 담론이 생산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우리는 페미니즘의 전망을 낙관해야 할까, 비관해야 할까?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닐 것이다. 벨 훅스와 손희정은 기존 페미니즘 담론에 문제를 제기하며, 자아성찰과 내부 비판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메타-페미니즘’은 어쩌면 대안적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페미니즘 담론에 ‘메타’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려 노력한다. 즉 당사자성의 순기능은 인정하되, 당사자성의 협소성에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현재까지 통용되는 당사자성의 정의에 따르면, 억압 기제(여성 억압)가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대상(여성)이어야 당사자성을 지닐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비-당사자도 여성 억압을 받을 수 있다. DFAB라면 여성이 아니더라도 낙태죄의 영향을 받고, 바텀은 여성이 아니지만 성관계를 할 때 ‘여성’의 것에 준하는 불안감을 느낀다. 여성이 아니더라도 여성으로 패싱 가능하면 밤길이 두려울 수 있다. 당사자성의 협소한 정의에 따르면, 이와 같은 비-당사자들의 경험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경험을 당사자성 없이 설명하려는 시도는 정당한가? 담론에서 소외된 이들의 경험을 이론화하기 위해서라도 당사자성은 재정의 되어야 한다. 여성 억압의 유일한 피해 집단은 여성이 아니다. 젠더와 젠더 수행의 측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여성과 연관되어 있는 집단(여성, DFAB, 바텀, 드랙퀸 등)은 모두 여성 억압의 영향 아래에 있다. 혹자는 언어의 사회성을 근거로 언어를 바꾸려는 시도를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는 항상 가변적이었으며, 언어를 바꾸려는 노력 하에 이루어진 변화는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천과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는 단지 의미를 지시하는 기호가 아닌, 일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규범으로 작동한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몰카’ 대신 ‘불법촬영’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제안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몰카’는 이를 지시하는 행위의 심각성을 지우고, 가해의 뉘앙스를 의도적으로 감춘다. 반면 ‘불법촬영’은 국가에서 규정하는 범죄는 모두 비윤리적이라는 자유주의적 시각에 입각했을지언정 ‘몰카’보다는 그 심각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경각심을 준다. ‘당사자성’도 마찬가지다. 당사자성의 협소성은 실제 억압 기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하며, 언어 사용자가 당사자성을 단편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언어를 바꿀 수 있다면 인식과 규범을 동시에 바꿀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가치체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둘째, 전략적으로 진영 간 연대는 필수적임을 인지한다.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이를 실현할 방법을 구체화해야 한다. 혹자는 페미니즘의 주체는 여성으로, 이는 오직 여성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이론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젠더’ 개념은 트랜스젠더의 등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맑시즘은 계급투쟁을 이론화한 결과물로써 여성 노동력 착취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페미니즘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페미니즘 역시 다른 억압 기제를 분석하고 이해할 만한 틀을 제공할 수 있다. ‘가스라이팅’은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그러나 가스라이팅은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관계 폭력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처럼 각 진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는데, 필자는 이를 ‘인식론적 연대’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인식론적 연대는 당사자 중심의 정체성 정치를 보완하기 위한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태 좌파는 불필요한 진영 싸움에 많은 시간과 운동력을 할애했다. 나에게 해당하지 않는 소수자성에 가해지는 낙인을 피해가기 위해 우리는 무단히 애쓴다. 가장 자유주의적인 퀴어 운동가들은 퀴어 정체성은 병이나 장애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가장 자유주의적인 장애 운동가들은 장애를 (유약함으로 대표되는) 여성성과 구분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내면화된 약자 혐오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려 했다면 타자와 구분되려 했을까? 퀴어가 퀴어 정체성 때문에 가난해질 가능성을 직시하고, 가난한 이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자신의 젠더 수행과 성적 실천이 ‘퀴어’하다고 여겨질 가능성을 파악한다면 어땠을까? 소수자성으로 인한 낙인을 피해가려 하지 않고, 낙인을 무효화하기 위해 투쟁할 수 있다면? 어쩌면 내면의 혐오를 극복하고, 타자와 구분되려 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연대가 가능한지도 모를 일이다.

셋째, 인식론으로서,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이 가지는 한계를 파악한다. 인식론으로서의 페미니즘은 남성-가해자와 여성-피해자라는 이항 대립 구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이들을 사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도식은 동성 간에 데이트(가정) 폭력 및 성폭력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페미니즘은 백인 특권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역사가 있으며, 한국 여성학계 및 페미니즘 운동 진영도 주류 혹은 특권층 중심적인 경향을 띤다. 페미니즘 담론은 비-퀴어, 비-장애인, 중산층, 한국계 한국인 여성의 이슈로 대표되었고, 트랜스 여성 혹은 이주민 여성이 겪는 문제는 미시적인 것 혹은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끊임없이 저평가되었다. 이는 페미니즘 학계/진영뿐만 아니라 모든 인권 담론, 사회 운동의 장이 공유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문제점들이 정당화되지는 않으며, 학계에서든 ‘운동권’에서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의 유행은 담론으로서,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에 악영향을 준다.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적 성공의 수단이나 지식인들이 향유하는 고급 담론이 되거나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그의 발언권을 묵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사유가 결여된, 페미니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의 결과다. 모두가 페미니즘을 알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학자나 사회 운동가마저도 페미니즘이 의미하는 바와 페미니즘 운동으로부터 초래될 수 있는 결과가 어떠할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소위 ‘선배’ 페미니스트들은 성매매 특별법의 제정을 성과로 여기며 자랑하지만, 정작 공권력의 단속(을 가장한 폭력)을 피해가며 일하는 성노동자 여성의 열악한 처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성찰과 비판이 없는, 운동을 위한 운동은 위험하다. 사회 운동은 선한 의도만으로는 성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손희정의 말처럼 우리는 바야흐로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대에 있다. 인식론으로서, 사회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이 계속 유효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여성 억압이 존재하는 한, 페미니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페미니즘이 특권층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운동으로서 성과를 거두기 위해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메타-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것이 페미니즘의 방향성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는 되었으면 한다. 여성학 전공자이든, 사회 운동가이든,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이 글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과 운동 전략을 점검할 기회를 얻는다면 이 글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페미니즘이 약자 혐오를 하기 위한 명분이 아니라 약자 혐오에 대항하는 유의미한 담론, 운동으로 남아있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글 : 인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