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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전형적 ‘가스라이팅’이다

'착해'보이는 이 가해자는 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뒤흔든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검에 자진 출두해 청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검에 자진 출두해 청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김경호 선임기자

“형법상 ‘강간’은 폭행·협박이 있어야 한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에서는 폭행·협박이나 피해자의 저항 여부는 논외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실상의 지배력을 행사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안희정 전 지사와 김지은씨는 도지사와 수행비서로, 업무상 고용 관계가 확실하다. 너무나 전형적인 사례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너를 가져서 미안하다, 너한테 상처 줘서 미안하다,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부끄러운 짓을 했다, 늘 그렇게 얘기하셨습니다.”

“미투 언급을 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한 상태에서 또다시 그랬다는 게 저한테는 여기는 벗어날 수가 없겠구나, 지사한테 벗어날 수 없겠구나,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성폭력 공식’에 맞지 않는 사건

3월5일 JTBC ‘뉴스룸’에 나온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정무비서 김지은씨는 한국 사회에 아주 낯설고 새로운 유형의 ‘성폭력 가해자’를 등장시켰다.

‘안희정’이라는 이름은 한국 사회를 집어삼키고 있는 #미투로 인해 성폭력 가해 사실이 폭로된 안태근, 고은, 이윤택, 조민기, 김기덕 등과 ‘권력형 성폭력’이라는 한 배를 탔다. 그러면서도 피해자에게 보인 태도에선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강압적이고 뻔뻔해 악마 같은 느낌을 주는 다른 가해자들과는 천양지차인 이 ‘착해’ 보이는 가해자는 그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성폭력에 대한 편견과 통념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기사에 달린 인터넷 댓글들은 기존의 ‘성폭력 공식’에 맞지 않는 사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대중의 혼돈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폭행당했으면 바로 신고를 해야지 수개월간 성폭행당했다는 게 말이 되냐. 바보 천치도 아니고… 싫으면 왜 거절을 못해.”

“그 직장이 뭐라고 머물러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항할 수 없었다,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말, 참 이해할 수 없다. 다 큰 성인이.”

“안 지사와 잠자리가 있었던 건 맞더라도 정말 강압에 의한 것인지 철저히 밝혀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난 여자지만 정말 여자가 이해 안 간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한 번 성폭행당했다면 바로 사표 던지고 나오든 고소하든 할 것이지, 계속 있으면서 두번 세번 더 당했다는 게 대체 뭔 소리인가? 한 번이었다면 이해하겠는데 여러 번 성폭행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김지은씨의 JTBC 인터뷰 기사에 달린 이 댓글들은 500건 이상 추천받은 것들이다. ‘한겨레21’은 안 전 지사의 성범죄를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 댓글들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봤다. 성폭력에 대한 이 같은 대중의 편견과 통념 너머에 #미투 이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지은씨는 왜 첫 번째 성폭행을 당했을 때 신고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왜 상습적인 피해를 당해야 했을까. 이 질문의 해답은 안 전 지사의 ‘범죄심리’ 분석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의 사례

형법은 성폭행을 두 가지로 구분해 처벌한다. ‘강간’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이다. 법률 전문가들은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 적용되는 혐의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형법 제303조,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0조)으로 꼽는다. 업무나 고용관계 등으로 자신의 보호·감독을 받는 사람을 성폭행한 이들에게 적용되는 혐의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형법상 ‘강간’은 폭행·협박이 있어야 한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에서는 폭행·협박이나 피해자의 저항 여부는 논외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실상의 지배력을 행사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안희정 전 지사와 김지은씨는 도지사와 수행비서로, 업무상 고용 관계가 확실하다. 너무나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위력’이라는 말은 김지은씨의 성폭행 피해에 물음표를 던지는 이들의 의문을 푸는 열쇠다. 대법원(2005.7.29 선고)은 위력에 대해 “피해자의 성적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으로서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으며 폭행·협박뿐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이라 판시한 바 있다. 과거 성추문 또는 스캔들로 치부되던 권력형 성범죄를 일컫는 법률 용어가 ‘위력’인 셈이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상황에선 가해자가 물리적인 강압을 동원하지 않고도 심리적으로 피해자를 통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른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다. 남편이 온갖 거짓말과 상황 조작으로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내용을 담은 영국 연극 <가스등>(Gaslight)(1938년)에서 유래한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애초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과 같이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심리 조종의 방식으로 이해됐다. #미투에 앞서 벌어진 지난해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당시, 문학 권력을 지닌 문인들의 성폭력 유형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은 <가스등 이펙트>에서 ‘잘못이 없는데도 잘못한 것 같고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어 그 사람의 말을 믿게 되는 병리적 심리 상태’를 ‘가스등 이펙트’로 정의했다.

경남 진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을 지낸 강문순 여성주의상담연구회 이사는 안 전 지사의 성범죄를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의 사례라 본다. “가스라이팅의 핵심은 피해자가 스스로를 불신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믿는 것이다. 자신을 성폭행한 사람이 우상이거나, 안희정 전 지사같이 직장 상사이면서 같은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성폭행을 당하고서도 그를 적으로 만드는 게 너무 힘들다. 결국 자신이 경험한 피해가 사실일까, 피해이긴 한 걸까 끝없이 자신을 의심한다.”


피해자 심리 조종 성폭력 정당화

이런 정황은 김지은씨의 인터뷰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지사님이) 다 잊어라, 항상 잊으라는 얘기를 저한테 했기 때문에 내가 잊어야 하는구나, 잊어야 되는구나, 그래서 저한테는 있는 기억이지만 없는 기억으로 살아가려고 그렇게 다 도려내고 도려내고,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성폭행 피해가 명백한데도 “잊으라”는 가해자의 말을 따른 것은 자신의 피해 사실마저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가스라이팅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김지은씨는 안 전 지사에게 속수무책으로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less / huffpost korea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리를 조종해 자신의 성폭력을 정당화하고,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 2016년 말 촛불혁명의 이면에서 이어졌던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때 드러난 배용제씨의 제자 성폭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 예술고등학교 실기 강사로 재직하면서 제자들을 성추행·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2017년 9월 1심 재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고, 올해 3월7일 2심 판결에서도 징역 8년형이 유지됐다.

피해자들은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배씨에게 오랜 기간 성폭행을 당한 원인으로 가스라이팅을 꼽았다. 피해자 ㄱ씨는 가해자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이상한 경험을 털어놨다. “부모님 문제로 힘들어하니까 ‘내가 너의 보호자가 되어서 지켜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계속 성관계를 요구하고, 나는 거절하고 거부하는 상황이 나중에는 미안해졌다. 정말 집요하게 요구했다. ‘나한테 잘해주고 싶다는데, 그럼 요구를 들어줘야 맞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ㄱ씨는 성폭행을 정당화하던 배씨의 궤변을 기억한다. “‘이런 걸 겪어야 니가 더 큰 작가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일탈은 사회지도층이나 꿈꾸는 거지, 사회지도층 아닌 사람은 일탈이라는 개념도 없다’고 했어요. ‘일탈을 즐길 수 있는 곳에 초대를 한다’면서 마치 나에게 좋은 선물을 주는 것처럼 말했죠. 내가 싫다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너도 결국 하게 될 거다’라고 하니까, 나중에는 ‘정말 내가 뭘 몰라서 그러는 건가’ ‘정말 선의로 나를 도와주려는 것인데 내가 날카롭게 받아들이나’ 이런 생각 때문에 혼란스러웠습니다.”


피해자의 두려움에 집중해야 

또 다른 피해자 ㄴ씨도 배씨의 상황 조작 탓에 스스로를 의심한 날들을 말했다. “배용제씨가 언어적 성희롱을 하는 것에 학생들이 기분 나쁘다고 학교에 항의한 적이 있어요. 그런 게 있을 때마다 우리한테 와서 ‘억울하다’ ‘걔들이 예민한 거다’ ‘웃으면서 받아주고 나중에 다른 말 한다’고 답했습니다. 자꾸 그러니까 ‘이 사람이 진짜 억울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예민하게 굴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 때문에 나중에는 저항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김지은씨의 JTBC 인터뷰를 봤다는 ㄴ씨는 김지은씨가 네 차례나 성폭행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자신이 겪은 일처럼 이해하고 있었다. “저도 그때 너무 힘드니까 힘들다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런데 제가 말을 하면 선생님하고 다른 친구들 관계가 다 끊어질 수 있는 거잖아요. 다른 친구들은 여전히 선생님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제가 말을 하면 입시가 불투명해지고 친구들의 미래를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희정 지사도 다음 대선주자로 꼽히는 사람인데, 그래서 말을 할 수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재련 변호사(법무법인 온세상)는 사회가 피해자들의 이런 심리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위력은 상대방의 힘에 눌려서 겁을 먹는 것이다. 피해자가 피해를 당할 때 두려움 때문에 상대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응할 수밖에 없다면 자발적 동의라고 볼 수 없다. 특히 피해자의 두려움이 주관적인 것이고, 합리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교수가 나를 성폭행했는데, 교수가 해고당할까봐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인 것도 두려움이다. 미국의 판례들을 보면 피해자 관점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굉장히 많이 언급한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범죄를 다룰 때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긍정적으로 ‘예스’를 했는지 봐야 하고, 이때 피해자가 갖고 있는 두려움에 집중해야 한다. 이게 바로 사법부가 가져야 할 피해자 관점이다.”

2016년 가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당시 또 다른 시인에게 당한 성폭행 사실을 공론화한 ㄷ씨는 자신의 피해 경험을 여성 문인 138명이 참여해 자신들의 피해 경험을 공유한 책 ‘참고문헌 없음’에 실었다.

그는 이 책에 실은 자신의 경험을 트위터에 24시간 게재하고 내렸다.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는 글이지만, 가해자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역고소’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가 좋다’ ‘시를 봐주겠다’는 가해자와 원치 않는 만남을 이어오다 세 차례 고통스런 성관계를 갖게 됐다. 자신의 사례가 언급되자, 가해자는 ㄷ씨의 트위터와 ‘참고문헌 없음’에 실은 글 2편을 명예훼손 혐의로 각각 고소했다.

 

위력에 대한 해석 확장할 필요 

ㄷ씨는 2017년 8월 검찰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한 이 일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그 사람이 저의 손발을 포박하거나, 무서운 말로 죽이겠다고 한 게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의 성적인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나라 법은 저한테 ‘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냐’ ‘왜 거절하지 못했냐’고 물어요. 조사를 받으면서 ‘이제 진짜 성폭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내 인생이 망가진 건 그 사람 때문인 게 명백한데, 그 사람은 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 그럼 내 잘못인가….”

조사나 수사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사법기관이 보이는 태도 역시 피해자에게는 자신의 피해를 부정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이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당시에 나왔던 피해 사례들도 사실상 위력에 해당될 수 있다. 현행법 규정이 제한적이라 업무상 고용관계가 인정되는 관계 이외에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적용이 어렵다. 업무상 관계를 아주 넓게 해석하거나 위력 부분에 대한 해석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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