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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미드 ‘프렌즈’가 불편해진 이유

ⓒNBC

모든 세대에겐 그 세대를 대변하고 나아가 한 시대를 정의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엑스(X)세대에겐 미국 엔비시(NBC) 시트콤 <프렌즈>(1994~2004)가 그런 작품이었다.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에 위치한 카페 ‘센트럴 퍼크’를 근거지 삼은 여섯명의 백인 남녀가 어른의 삶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그린 시트콤 <프렌즈>는 10년 동안 미국을 넘어 전세계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프렌즈>는 엑스세대가 일과 사랑을 대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대변하는 쇼였고, 세상을 향한 <프렌즈>의 긍정적인 태도는 보는 이들을 웃게 만드는 유쾌한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러나 한때 찬란했던 것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찬란하리라는 보장 같은 건 없다. 종영 뒤 14년이 지난 2018년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는 <프렌즈>를 다시 선보였다. 종종 “다시 여섯명이 모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올리고, 아직도 철마다 유행성 독감처럼 “<프렌즈> 극장판이 나온다더라”는 루머를 서로에게 전염시키는 팬들을 겨냥한 편성이었으리라. 그런데 2018년의 기준으로 다시 본 <프렌즈>는 더 이상 예전만큼 빛나지 않는다.

 

그 시대의 ‘한계’를 보여줬던 인기작들

 

로스(데이비드 슈위머)는 커밍아웃 뒤 이혼한 자신의 전처에게 자꾸만 레즈비언을 비꼬는 농담을 던지고, 챈들러(매슈 페리)가 게이로 오인받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로 묘사되며, 챈들러의 트랜스젠더 아버지는 그 존재 자체로 농담의 소재가 된다.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추파를 던지는 조이(맷 르블랑)의 행동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성희롱이고, 실력도 안 되는 남자를 외모만 보고 데이트를 하기 위해 비서로 고용하는 레이철(제니퍼 애니스턴)은 인사위원회에 회부되어도 할 말 없는 인물이다. 물론 요즘 나오는 작품들이라고 정치적으로 공정한 인물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프렌즈>는 종종 마이너리티들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그리면서 주인공들이 표현하는 혐오가 당연한 일인 것처럼 묘사했다. 새롭게 <프렌즈>를 접한 밀레니엄 세대 시청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프렌즈>에 환호했던 엑스세대 시청자 또한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리가 이런 쇼를 그렇게 좋아하고 환호했던 거야? 고정 캐스트 전원이 백인이라는 사실은 방영 당시에도 널리 지적받았던 문제이지만 에피소드 곳곳에 성소수자를 조롱하는 농담, 성차별적인 묘사와 여성 혐오, 외모 지상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이제서야 새삼 재발견됐다.

한 시대를 정의하는 프로그램이란 말은 다시 말하면 그 시대의 한계까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1990년대는 낡은 고정관념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하던 시기인 동시에 그 고정관념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프렌즈>와 비슷한 시기 인기리에 방영되던 에이비시(ABC) 시트콤 <엘런>(1994~1998)은 1997년 주연배우 엘런 디제너러스와 작중 엘런이 시차를 두고 커밍아웃을 한 이후 심각한 공격에 시달렸다. 온 가족이 보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못마땅해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시청률 감소와 논란이 이어지자 에이비시는 다음해인 1998년 프로그램을 종영했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프로그램에 꾸준히 성소수자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는 건 모험 취급을 받았다. 한쪽에서는 유리천장을 깨부수려는 여성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여성에게 느끼하게 추파를 던지는 남성의 행동은 별다른 지적을 받지 않던 시절. <프렌즈>는 그런 시절의 모습을 최대한 유쾌한 톤으로 기록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과 사랑했던 이들 모두 그게 어떤 이들에겐 심각한 결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지금보다 훨씬 단순하고 간명하던 시절.

그 ‘단순하고 간명한’ 미덕은 멀쩡하게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을 몰라도 됐던 무지에서 나왔다. 억압이나 불평등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사람은 은연중에 그 상황을 정상 상태로 인지하게 된다. 장애인의 이동권이 극도로 위축된 서울에서 일평생을 보낸 비장애인들은 길이나 대중교통에서 휠체어를 탄 보행 장애인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다. 길에서 장애인을 만날 일이 거의 없기에 보행 장애인과 마주친 상황 자체를 낯설어하는 것이다.

이성애를 정상이라고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소수자에게 무례한 농담을 낳고, 전통적인 성 역할을 표준이라 강요하는 사회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가린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신분제와 노예제는 말도 안 되는 폭력이지만, 신분제와 노예제가 잔존하던 시절을 살던 이들에겐 그게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을 것이다. 호주제도, 동성동본 금혼도, 이혼 뒤 여성에게만 6개월의 재혼금지 기간을 부과하던 개정 전 민법도, 그 시절에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끊임없이 묵살당해왔던 이들에게나 이상했던 것이지,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겐 “뭘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난리냐”는 식으로 넘겨버릴 수 있는 일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 <프렌즈>를 다시 보면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건 <프렌즈>를 만들고 향유하던 이들이 이성애 중심적인 성차별주의자에, 외모지상주의를 옹호하는 인종주의자 집단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늘날 불편을 느끼고 호소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공정한 ‘프로 불편러’들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지난 14년 동안 그런 묘사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과거에서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에 조금씩 눈을 뜨며 천천히 진보해 그게 터무니없이 부당해 보이는 오늘까지 도착했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프렌즈>의 공동제작자였던 마르타 카우프먼의 최신작 <그레이스 앤 프랭키>(2015~)는 동성결혼, 입양으로 이뤄진 다민족 가정, 열린 연애, 노년의 성 등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는 시트콤이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도, 향유하는 이들도 조금씩 더 공정한 세상을 향해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소수자가 당당히 서는 그날을 향해

 

2018년 3월 넷플릭스에서 2번째 시즌을 공개한 여성 슈퍼 히어로물 <제시카 존스>(2015~)는 새로 공개된 13편의 에피소드 모두 여성 감독에게 연출을 맡겼다는 소식으로 화제가 됐다. 누군가에겐 신나는 소식이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참 서글픈 일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진이 전부 남성으로 가득 채워지던 시절 그에 대해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흥미롭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라. 감독 전원이 남성인 건 화젯거리가 될 까닭 없이 당연한 일이지만 감독 전원이 여성인 건 어찌나 드문 일인지 그 자체로 화제가 되고 셀링 포인트가 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멕시코 출신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셰이프 오브 워터>(2017)로 작품상과 연출상을 수상한 게 화제가 되고, 핵심인물 전원이 흑인인 슈퍼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2018)가 박스오피스에서 돌풍을 불러일으키는 게 화제가 되고,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하기 위한 워싱턴포스트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다루며 남성 저널리스트가 아닌 여성 사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한 <더 포스트>(2017)의 성취가 화제가 된다. 신나는 동시에 서글픈 일이다.

신나는 기분을 서글픈 자각이 덮어버리려 할 때마다 미국의 코미디언 티나 페이가 2010년 마크 트웨인 상을 받으며 남긴 수상 소감을 다시 떠올리려 한다. “저는 이 상을 수상한 사상 세번째 여성이 됐습니다. 릴리 톰린과 우피 골드버그에 이어 이름을 올리게 되어 영광입니다만, 하루빨리 여성이 더 많은 성취를 거둬 몇번째 여성인지 세는 일을 그만두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날의 새벽으로 진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더 많은 여성 작가와 감독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성소수자를 농담거리로 삼는 이성애자들의 농담 대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성소수자들이 새로운 물결을 이루고,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이들 대신 이민자들과 핍박받던 인종이 마침내 당당하게 함께 서는 그날의 새벽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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