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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폭행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강요는 없었다'고 말하는 걸까?

법이 그렇게 되어있다.

  • 허완
  • 입력 2018.03.08 09:54
ⓒPacific Press via Getty Images

“성관계에 강요는 없었습니다.”

‘#미투’ 운동이 본격화한 뒤 피해자의 성폭력 증언을 맞닥뜨린 가해자들의 전형적인 첫 반응 중 하나다. 성관계는 있었지만 합의나 동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왜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강요 없음’을 강조하는 것일까.

현행 형법 및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성폭행(강간)을 ‘폭행·협박’에 의한 강제적 성관계로 규정한다. 그리고 법원은 이 폭행·협박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해자가 심각한 수준의 폭행·협박을 했거나 △피해자가 강하게 저항 또는 도망친 경우 등으로 엄격하게 한정해 제시하고 있다. 미투 운동을 통해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폭행·협박’이 없었음을 주장하는 이유다.

실제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접수된 성폭행 피해 상담 사례를 분석해본 결과, 절반가량은 현재 기준으로는 강간죄로 처벌하기 어려운 경우로 나타났다. 성폭행 피해 상담 사례 124건 가운데 ‘강간죄’ 혐의가 인정될 조건을 갖춘 경우는 15건(12.1%)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거절 의사를 표시했지만 엄격한 의미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사례는 절반에 가까운 54건(43.5%)에 달했다. 나머지 55건(44.3%)은 상담 내용만으로 판단하기 힘든 경우였다.

ⓒhyejin kang via Getty Images

 

폭행이나 물리적 강압이 동반되어야 ‘성폭행’으로 인정하는 엄격한 법적 기준과 판례 탓에, 원치 않는 성관계는 성폭행이라고 간주하는 피해자의 인식과는 큰 간극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법을 바꾸거나 법원의 해석 범위를 넓힘으로써 성폭행 판단 기준을 ‘자유로운 합의나 동의 없는’ 성관계로 확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경 성폭력상담소장은 “합의 또는 동의의 부재를 성폭행의 판단 기준으로 삼게 되면 현재 폭행·협박의 유무나 피해자의 저항에 집중된 수사의 틀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명시적인 동의를 받았는지 여부로 바뀌어 실질적인 가해자에 대한 수사로 집중될 수 있다”며 “이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사회규범이 안착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그동안 법원도 성범죄의 구성요건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해온 경향이 있다”며 “당시 상황과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를 맥락적으로 고려하고,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더라도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이유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성폭력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캐나다 법원은 2016년 ‘데이트 성폭행’으로 기소된 무스타파 우루야 사건에서 성폭행의 기준으로 ‘적극적 합의’를 내세웠다. 당시 판결은 “적극적 합의란 성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이고, 의식적이며, 자발적인 동의이며, 침묵이나 저항 없음을 동의로 해석해선 안 된다”고 성폭행 기준을 넓게 해석했다. 독일에서는 2016년 쾰른 광장에서 일어난 집단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아예 법이 개정돼, 피해자의 내외부적 의사 표현이 “싫다”는 쪽이면 동의 없는 성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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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여성 #성범죄